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4 헌름과 인릉 (02-445-0347) /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94호.
내비게이션에서 헌릉을 검색하면 헌인릉을 찾아간다. 편의상 줄여서 헌인릉이라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헌릉과 인릉이다.

헌릉ㆍ獻陵-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헌릉은 조선 3대 태종(太宗, 1367~1422, 1400~1418 재위)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의 능이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1400년에 왕위에 오른 후 중앙과 지방의 제도를 정비하고,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을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태종 사이에 양녕, 효령, 세종, 성녕의 네 아들과 딸 넷을 두었다. 1420년(세종 2) 태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헌릉에 모셔졌다.
정자각 옆에 있는 신도비각에는 1424년(세종 6)에 세운 신도비(보물 제1804호)와 1695년(숙종 21)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 신도비(神道碑) : 왕과 대신 등의 무덤 앞에 세워 죽은 이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

헌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전체적으로 넓은 능역과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조선 전기의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능침은 모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저와 영탁을 새겼다. 문무석인은 각 2쌍씩, 석마, 석양, 석호는 각각 4쌍식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조선왕릉 중에서 2배로 석물이 많아 완벽한 쌍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판위가 있고, 길은 향로와 그 옆에 약간 낮은 어로가 있지만 헌릉에는 판위와 어로가 없다.

홍릉의 정자각은 기단석이 이층으로 되어있어 매우 낮다. 그러다보니 정자각으로 올라가는 신계(향계)와 어계의 계단석이 두개씩이다.
정자각 왼쪽(북서측)에 소전대가 보인다.

소전대(燒錢臺) - 정자각의 북서측에 있는 소전대는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태조 건원릉과 이곳에서만 볼 수있는 조선시대 초기 석물이다. 세종이후에는 예감으로 대체되었다.

일반적으로 정자각에서 성역 공간인 사초지로 이어진 길은 신교 뿐인데, 헌릉은 정자각 뒤로 사초지가 멀다. 그래서일까, 왕릉에 모셔진 神이 돌아가는 신로(神路)가 길게 널어져 있다.

현재 조선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 및 헌릉에서 볼 수 있다.

세조 때 영의정 정인지 등이 왕의 공덕은 실록에 있으므로 새로이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주청해 이후 왕릉에서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는 왕들의 덕을 적은 비석으로 헌릉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다. 임진왜란 때 손상된 원래 신
도비(왼쪽)와 1695년(숙종 21)에 하나 더 증설해 세운 것(오른쪽)이다.

다섯개의 고석(鼓石)

사방에서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가운데 하나 더하여 다섯개이다. 이것 또한 태조 건원릉과 이곳에서만 볼 수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능제이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부디 나의 부득이한 정을 알아다오” (태종)

천하의 태종도 어느덧 후사를 생각해야 할 나이에 이르렀다. 이제 자신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왕에게 새 시대를 열어주어야 하는 책임이 그에게 주어졌다. 태종은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전철을 밟게 하지 않기 위해, 또 지속된 왕권 강화와 왕실
안정을 위해 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장자 양녕이 세자로 책봉되고, 태종은 세자 교육에 온 정성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자 양녕의 문제는 아비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할 뿐이었다. 양녕의 삐뚤어진 행실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10년 넘도록 세자의 후계자 수업에 공을 들였지만 모두 허사였다. 장
성한 양녕은 조정의 일이나 글 공부에는 아예 뜻을 두지 않았다. 한 시대를 쥐고 흔들었던 태종이라 할지라도 아들의 기행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세자 나이 열 일곱이 되던 해, 태종실록 10년 11월 3일 기사 속에는 여느 응석받이 부모와 다르지 않은 태종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날은 세자가 몰래 기생 봉지련을 궁중에 불러들인 날이었다. 이를 알게 된 태종이 참다못해 봉지련을 옥에 가두니, 세자가 근심 걱정으로 음식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태종은 세자가 병이 날까 두려워 봉지련을 풀어주고 비단까지 하사하게 된다. 아들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평범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래도 태종은 세자에 대한 기대를 거두지 않았다. 때로는 엄하게 꾸짖고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며 세자를 어르고 달랬다. 항상 곁에 두고 감시하는 것도 소홀하지 않았다. 매사냥을 갈 때도, 신하들이 마련한 연회에도 꼭 세자와 동행했다. 그러나 기대
를 가지면 가질수록 번번이 실망만 안겨주는 양녕이었다. 반면에 셋째 아들 충녕(세종)의 총명함은 태종을 웃음 짓게 했다.
마침내 태종은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은 것이다. 태종 재위 마지막 해의 일이다. 마지막까지도 양녕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던 태종의 수심 가득한 얼굴이 그려진다.

“너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도록 바랐는데, 어찌 뉘우치지 않아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드느냐, 나와 너는 부자지간이지만 군신의 도리 또한 있다. 이제 충녕이 너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반드시 너를 대접하는 마음이 두터울 것이다. 부디 나의 부
득이한 정을 알아다오. 이제 광주廣州에서 네가 사랑하던 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살라."
(태종실록 18년 6월 6일)

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세자를 폐할 때 통곡으로 하교했다고 한다. 흔히 세간에 냉철한 모습으로만 그려졌던 태종이기에 그의 전언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에게 양녕을 포기한 것은 평생 지켜온 자신의 신념을 무너뜨려야 했던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자를 바꾼 태종의 결단은 왕으로서 조정의 앞날을 생각하고 아비로서 아들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또 결과적으로 세종의 치세를 가능케 한 현명한 결정이기도 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