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클라이버 (스크랩)

음악이야기 2020. 11. 30. 19:40 Posted by 문촌수기

[박종호의 문화一流] 산속에서 바람처럼 세상을 등진 지휘자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는 겨울에도 아름답다. 밤새 눈이 내려 렌터카를 포기하고 택시를 잡는다. 호텔의 컨시어지들조차 그곳을 몰랐으며, 택시 기사들도 고개를 흔든다. 결국 내가 내미는 ‘콘시차’의 주소 하나만 보고서 한 기사가 나의 모험에 가담한다.
차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숲은 짙어지고 침엽수들은 높아진다. 마을은 보이지 않고, 낮인데도 사방이 어두워진다. 그런데 오르막길에 나무가 쓰러져 있고 눈까지 쌓여 있다. 이제는 기사도 포기한다. 나는 차를 내려 혼자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내비게이션도 잡히지 않는다. 몇 번이나 산길을 잘못 들고 몇 차례나 외딴 집을 두드린다. 이윽고 한 아주머니가 나와 작은 교회를 가리킨다. 교회의 마당에 작은 묘지가 있다. 드디어 ‘카를로스 클라이버’라고 새겨진 비석을 찾는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십여 년이 걸린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1930~2004)는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로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음악사상 부자(父子)가 모두 초일류 지휘자였던 거의 유일한 경우다. 그가 베를린에서 태어난 것은 아버지가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치가 정권을 잡자, 다섯 살의 카를로스는 아버지를 따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부자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버리고 아르헨티나를 새 조국으로 삼았다.

아버지 에리히와 함께 시대를 풍미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그는 진정한 예술가이자 자유인이었다. /유니버설뮤직(Gabriela Brandenstein/DG)

카를로스는 지휘자가 되기 위한 최상의 조건에서 났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아버지는 베를린으로 돌아가 원래 자리에 복귀했다. 반면 카를로스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아인슈타인을 배출한 명문 취리히 연방공대에서 화학을 전공한다.
그러나 피는 어쩔 수 없었다. 음악이 간절했던 카를로스는 아버지 몰래 뮌헨의 2류 극장에 말단으로 취직하였다. 그는 극장의 밑바닥 일부터 배웠는데,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가 지휘하는 데에 큰 자산이 되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있는 베를린 부근 포츠담의 작은 극장에서 지휘자로 데뷔한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애써 모르는 척했지만, 아들은 연이어 성공을 거둔다. 이윽고 그는 1974년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여, 전설로 남은 이 공연으로 최정상의 지휘자 반열에 오른다. 이후로 그가 녹음하는 거의 모든 음반들이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는 명반이 되었다.

프리랜서 지휘자로 자유롭게 활동
이렇게 클라이버는 정상에 섰고, 독특한 개성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많은 극장과 오케스트라에서 그를 원하였지만, 그는 본인이 원할 때에 원하는 곡만 지휘할 뿐이었다. 그는 데뷔 초기의 잠시 동안 외에는 악단이나 극장의 직위를 가지지 않은 채로 프리랜서로 지냈다. 즉 바람처럼 떠돌다가 하고 싶을 때에만 지휘대에 올랐다. 이렇게 기분 따라 다녀도 그가 원할 때면 어디서나 일정을 내어주고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는 사실이 그가 최고임을 입증하는 예일 것이다.

슬로베니아 콘시차

그는 명성보다는 자유를 원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지휘자 카라얀은 “그는 냉장고가 비어야만 지휘하러 나온다”고 했다. 비아냥거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생활로 조용히 살던 수도사 같은 자세를 칭찬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클라이버가 한 시즌에 한 번이라도 지휘해주기를 원했던 세계 최고 수준의 뮌헨 국립 오페라극장은 직함도 없는 그의 방까지 마련해 놓고, 그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올 수 있도록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정신없이 사는 동안 그는 유유자적하게 자유를 누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유랑 가객은 삶을 마감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의 새 음반을 갈망했지만, 그는 흔한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 하나 남기지 않고, 그렇게 청중이 원했던 바그너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도 한두 작품만 남긴 채로 사라졌다.

아내 고향 슬로베니아에서 生 마감
클라이버는 자신에게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어느 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고향인 슬로베니아의 산중 마을 콘시차였다. 그는 아내의 무덤이 내려다보이는 집을 구해서 자신의 마지막 길을 준비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묘를 모르게 해달라는 말과 함께….

슬로베니아 산중 마을 콘시차에 있는 작은 교회 앞마당에 카를로스 클라이버 묘지가 있다. /박종호 대표
그러나 광적인 팬들의 화환이 그의 묘에 놓인 것은 장례가 끝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들을 미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부터도 그의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볼 때마다 사무치게 그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해 겨울에 나도 그를 찾아서 콘시차까지 반쯤 걸어서 눈길을 갔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 음악 생활에서 밀린 숙제를 마무리하는 기분이었다.
클라이버의 화려한 지휘 스타일이나 자유분방했던 생활에 그를 비난하는 얘기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돌출적인 행동을 못마땅해하였고, 과장되었다고 흉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그가 떠난 지금 생전의 행동이 출세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님은 자명해졌다. 도리어 그런 그를 잠시나마 오해한 우리가 부끄럽다. 그는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채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이 이끄는 대로만 살고 연주하고 싶었던, 진정한 예술가요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조선일보 입력 2020.11.30 03:00

https://youtu.be/2Sw97Nzvv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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