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3년의 어느 추운 겨울밤, 한 정신착란증세의 노인이 청문을 열어 젖히고 비엔나의 시민을 향해 놀라운 고백을 한다.
"모짜르트 나를 용서해다오, 고백하노니
내가 너를 죽였다 모짜르트!”
한 순간이 지나 그는 자살을 시도하나 곧 눈덮인 길을 지나 정신병원으로 옮겨진다. 그는 미친 것이다.
몇 주일 후 독방에 있는 이 노인에게 한 젊은 신부가 찾아와 그의 자살 기도에 관한 참회를 듣는다. 그밤에 듣게되는 참희의 내용이 영화 아마데우스(Amadeus)의 줄거리를 이루게 된다.
이 노인은 다름 아닌 안토니오 살리에리, 지금은 거의 잊혀진 작곡가이나 그 당시엔 비엔나에서 가장 존경받고 높은 보수를 받던 음악가이다. 이태리 소읍 출신의 소년이였던 그는 음악을 통해 신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신이 자신에게 음악적 재능과 작곡가로서의 불멸의 명성을 허락해준다면 자신의 순결과 가장 깊은 겸양 그리고 끝없는 근면을 바치겠다는 경건한 맹세를 교회에서 하게 된다.
이 미친 노인은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르였다. 그러나 이는 영화의 장면일 뿐,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내밀었던 최후의 작품, <레퀴엠>을 부탁한 이는 살리에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레퀴엠>은 여러가지 상상력과 신비 그리고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내 청춘의 시기,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고 그 감동을 이어가고자 OST 레코드판을 구입했었다. 오랫만에 다시 들어본다.
레퀴엠*
모차르트가 남긴 미완성 걸작이자 마지막 유산.
떠난 자와 남은 자에게 건네는 위로
부천시립합창단과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국내 최정상 솔리스트, 고음악 스페셜리스트 김선아 지휘자가 순도 높은 연주로 모차르트 최후의 마스터피스를 재현한다
지휘 김선아
협연 소프라노 양지영, 알토 김정미, 테너 김효종, 베이스 바리톤 우경식, 오르간 이수정
연주 부천시립합창단,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레퀴엠(Requiem)
레퀴엠(Requiem)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위령미사)’때에 하느님께 죽은 이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 주시기를 청하며 연주하는 전례 음악이다. 이 미사는 입당송(入祭唱, Introitus)의 가사가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주여, 저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로 시작하므로 레퀴엠 미사 (Requiem Mass)라 불렀으며, 여기서 사용된 곡은 레퀴엠이라고 하였다. 레퀴엠은 진혼곡(鎭魂曲)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프로그램
1부 해설 (상임지휘자 김선아)
Intermission
2부 모차르트, 레퀴엠
W. A. Mozart, Requiem d minor K.626
I. Introitus (입당송)
II. Kyrie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III. Sequenz
1. Dies irae (진노의 날)
2. Tuba mirum (놀라운 금관 소리 울려 퍼지네)
3. Rex tremendae (무서워해야 할 대왕이시여)
4. Recordare (주여 생각해 보소서)
5. Confutatis (사악한 자들이 혼란스러울 때)
6. Lacrimosa (눈물과 한탄의 날)
IV. Offertorium (봉헌송)
1. Domine Jesu (주 예수 그리스도)
2. Hostias (주께 바칩니다)
V. Sanctus (거룩하시다)
VI. Benedictus (주의 축복 있으라)
VII. Agnus Dei (하나님의 어린 양)
VIII. Communio (영성체송)
모차르트 레퀴엠 전곡
https://youtu.be/54h8TxJyNy0?si=W50D4ifa7i0kUOzi
모차르트, 레퀴엠 해설
W.A.Mozart,
Requiem d minor K.626
글| 음악평론가 이준형
모차르트 최후의 작품인 죽은 이를 위한 미사(Missa pro defunctis) 즉 레퀴엠은 엄밀한 의미에서 미완성에 그친 '파편'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일찍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천재를 상징하는 일종의 아이콘이 되었다. 아마도 서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전설과 신비를 몰고 다니는 작품이며, 창작과
정을 둘러싼 술한 의문과 작품의 정체성에 대한 뜨거운 논의는 거의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순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식지 않고 있다. 그리고 영화 <아마데우스>는 이 모든 신비에 결정적인 아우라를 더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음악 작품으로서의 모차르트 레퀴엠에 총체적으로, 깊이 있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모든 허구와 신화를 걷어내고 작곡가가 남긴 미완성 악보와 그 이후에 벌어진 역사적 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크리스토프 볼프가 정확하게 지적한 대로, 모차르트 레퀴엠은 서양음악 역사상 최초로 음악 원전과 작곡 양식, 심지어 필적학에 관한 현대적인 의미의 엄밀한 분석과 검증을 받은 작품이다. 말하자면 서양음악사에서 음악학(音樂學)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때이른 죽음은 레퀴엠 전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프란츠 폰 발제그(Franz von Walsegg) 백작의 부인 안나가 1791년 2월 14일에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빈 남서쪽에 있는 슈투파흐 성의 영주였던 백작은 아마추어 연주자로 본래부터 다른 작곡가들에게 곡을 의뢰한 다음 자기 작품으로 발표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죽은 아내를 위해서 당연히 자신의 신원을 숨긴채 중개인을 통해 1791년 여름(7월경)에 모차르트에게 레퀴엠 작곡을 의뢰했다. 제시한 보수(50두카트에 절반은 선지불)도 좋았지만 5월에 슈테판 대성당의 부 카펠마이스터에 취임했던 모차르트로서는 빈으로 이주한 이후 별로 쓰지 않았던 교회 음악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난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티토 황제의 자비> 작곡과 초연(프라하), <마술 피리> 초연 등 다른 작품들 때문에 레퀴엠 작곡은 아마도 <마술 피리> 초연이 끝난 10월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11월 20일부터 침상에 눕게 되었기 때문에 결국 본격적인 작곡 작업은 아마도 한달 남짓한 기간이었을 뿐이며, 짧은 시간과 건강 상태를 고려하면 초안 형태라고는 해도 놀랄 만큼 많은 양을 작곡한 셈이다.
12월 5일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레퀴엠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오케스트레이션까지 모든 작곡이 완료된 부분은 입당송(Introitusy) 뿐이었으며, 자비송(Kyrie)부터 8마디만 작곡한 '눈물의 날(Lacrimosa)'을 제
외한 '부속가(Sequentia)' 전체와 '봉헌송(Offertorium)'은 성악 파트만 완성되었을 뿐 기악파트는 바소 콘티누오와 드문 드문 단편적인 모티브만 제시되었을 뿐이다. 그 나머지 부분은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만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마지막 '영성체송(Communioy)'에서 '입당송과 자비송'을 반복하려고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눈물의 날' 8마디가 모차르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업한 부분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레퀴엠 전체의 유기적인 통일성을 위해서 '눈물의 날' 작곡을 뒤로 미루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콘스탄체로서는 이미 절반의 선금을 받은 레퀴엠을 완성해서 의뢰인에게 넘겨주는 일이 절박했으므로 죽은 남편의 몇몇 측근들을 상대로 완성 작업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아이블러(Joseph Eybler)를 위시한 몇 명이약보를 받아 작업했지만 중도에서 포기했고, 결국 최종적인 의뢰는 쥐스마이이 (Franz Xever Sissmav)에게 들어갔다. 쥐스마이아는 1791년에 모차르트의 곁에서 <마술 피리>와 <티토 황제>의 작곡을 보좌한 음악가로, 무엇보다도 레퀴엠 작곡 과정에서도 모차르트와 함께 연주하고 기악 편성 등 완성에 관한 지침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악보를 받은 쥐스마이아는 아이블러 등이 앞서 했던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을 그대로 따르기도 하고 몇몇 부분은 수정 및 보완했으며, 거룩하시도다(Sanctus),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 영성체송과 '눈물의 날'의 8마디 이후 나머지 부분을 완전히 새로 작곡했다. 전체 완성 작업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석달 안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레퀴엠의 일부(아마도 '입당송'과 '자비송')는 그가 세상을 떠나고 불과 며칠 후인 12월 10일에 성 미하엘 대성당에서 있었던 모차르트를 기리는 미사에서 연주되었으나 완성된 전곡은 1793년 1월 2일 빈에서 황실 도서관장이자 모차르트의 가장 충실한 후원자 중한 사람이었던 스비텐(Gottfried van Swieten) 남작이 모차르트 유가족을 위해서 조직한 연주회를 통해 초연되었다. 그런데 콘스탄체는 레퀴엠 원본을 백작에게 보내는 한편 그와는 별
도로 정서한 필사본을 몇몇 고위 인사들과 출판사에도 팔면서 작품이 본래 미완성작이며 쥐스마이어가 완성했다는 사실을 숨겼다. 또한, 1800년에 총보를 처음 출판한 브라이트코프 & 헤르텔 역시 쥐스마이어가 자신의 역할을 설명한 편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묵살했다. 그러나 쥐스마이어가 편지를 독자적으로 신문에 공표하고, 모차르트의 전기작가인 니메체크와 로슐리츠가 작곡에 대해서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면서 혼란과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콘스탄체나 아이블러, 쥐스마이어 등 작품의 완성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자세한 사실을 밝히기를 꺼렸기 때문에 레퀴엠에 관한 몇몇 부분은 영원히풀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고 말았다.
한편 1825년에 작곡가이자 음악 이론가 및 법학자였던 베버(Jacob Gottfried Weber)가 <모차르트 레퀴엠의 진정성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고 레퀴엠이 사실상 모차르트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레퀴엠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베토벤과 괴테, 슈만 같은 이들까지 논쟁에 참여했으며, 1827년에는 처음으
로 출판 악보에 쥐스마이어의 이름이 (비록 내용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언급되기에 이른다. 결국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막시밀리안 슈타틀러, 오토얀, 이그나츠폰모젤, 요하네스 브람스, 리처드 태러스킨 등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자필 악보에서 모차르트가 남긴 부분과 다른 사람들, 특히 쥐스마이어가 보필한 부분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1965년 노바크(Leopold Novak)가 편집한 신 모차르트 전집(Neue Mozart-Ausgabe)에서 모차르트가 남긴 미완성 악보를 제시하면서 작품의 기원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많이 풀리게 되었다. 그러나그로 인해서 과연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부분, 그리고 완전히 새롭게 작곡한 부분이 작곡가의 본래 의도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 또 1960년에 베를린 국립 도서관에서 발견된 모차르트 자신의 레퀴엠 스케치 (여기에는 '눈물의 날의 마지막 부분에 쓰고자 만든 아엔 푸가 16마디도 포함되어 있다. 이 푸가의 첫 주제는 '입당송' 주제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쥐스마이어의 작업에 음악 문법적인 오류가 적지 않다는 사실 역시 그의 작업을 수정 및 보완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작품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에 참여했던 여러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마다 자신이 새롭게 편집, 혹은 보완한 모차르트 레퀴엠 악보를 만들게 된다. 이들의 작업은 쥐스마이어의 작업을 보완하는 데 그친 것(바이어, 랜던)도 있지만 반면 쥐스마이어의 작업을 완전히 삭제하거나(몬더), 베를린에서 발견된 아엔' 푸가를 활용해서 '눈물의 날'을 새로 만드는 등(몬더, 드루스, 레빈)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대로 쥐스마이어의 작업에 모차르트의 의도가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지는 결국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또한, 레키엠의 작곡을 옆에서 지켜보고 도왔던 쥐스마이어가 홋날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리라는 점 역시 충분히 추측 가능하다. 실제로 콘스탄체는 쥐스마이어에게 책상 위에 있던 약보 스케치도 함께 넘겼다고 밝혔으며, 모차르트가 마지막 며칠 동안 병상에서 쥐스마이어에게 작품 완성에 대한 지시를 했다는 증인도 있다. 게다가 모차르트가 작곡을 할 때 통상적으로 먼저 머릿속에서 전체 작품에 대한 명
확한 구상을 완성한 후에 악보에 기입하는 절차를 따랐음을 감안하면, 또 쥐스마이어가 훗날 작곡가로서 이에 필적할만한 어떤 완성도나 유기적인 구상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가 새로 작곡한 부분에도 어떤 형태로든 모차르트의 숨결이 담겨 있다는 추측은 결코 무리한 억측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앞으로 어떤 판본이 새롭게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쥐스마이어가 D단조 레퀴엠이라는 작품에서 작곡가 모차르트를 제외하고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 누구도 쥐스마이어를 통하지 않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만날 수는 없키 때문이다. 또한, 200년이 넘는 연주 전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종한 문화적 유산이다.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작곡하면서 바로크 시대 이래의 교회음약과 레퀴엠 전통, 빈에 이주한 다음 새롭게 알게 되어 깊이 연구했던 헨델과 바흐 가문(대바흐, W.F.바흐, C.P.E.바흐)의 음악, 그리고 잘츠부르크 시절에 직접
연주에 참여하며 강한 인상을 받았던 미하엘 하이든의 레퀴엠(1771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부속가인' 진노의 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구원과 안식에 대한 희망, 그리고 천상과 지상을 아우르는 공동체 의식을 노래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은 14세기에 가장 늦게 레퀴엠에 도입된 이 부분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지만 바로크 시대부터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했는데, 모차르트 역시 '진노의 날'에 매우 공을 들였다.
아마도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충격적이고 회화적인 묘사가 두드러진 라틴어 가사가 본질적으로 오페라 작곡가였던 모차르트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던 것 같다. 격렬하게 질주하는 '진노의 날' 첫 합창부터 마지막 '눈물의 날'에서 모든 미련을 내려놓는 듯한 투명한 평온함은 마치 작곡가가 자신의 때 이른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준다.
한편 음악적인 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성악, 특히 투명하면서도 간결한 4성부 합창이 작품전편의 핵심을 이루며 시종일관 작품을 이끌어 간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특정 선율을 길게 강조하는 일이 드물고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등 모차르트가 후기 작품에 즐겨 썼던 악기들이 배제된 기악 파트 역시 풍부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반주 기능에 머물고 있다. 이는 작곡가가 잘츠부르크 시절에 썼던 교회음악 작품들이나 또 다른 미완성작인 C단조 대미사(K.427), 혹은 하이든의 후기 미사곡들과는 확연히 다른 레퀴엠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오페라에서 <코지 판투테>가 그랬듯이 모차르트의 교회음악이 점점 더 간소하고 침착하고 유려해지면서 뜨거운 정열을 내면으로 같무리하는 새로운 경지로 접어드는 단계였음을 알려준다. 또한, 곳곳에서 탁월한 대위법을 구사하면서 작품 전체의 흐름을 규정하고 유기적인 통일성을 만드는 것이 돋보이는데, 이것은 바흐와 헨델의 영향이라고 할수 있으며 '입당송'과 '자비송'에서는 헨델의 작품들에서 직접 주제를 인용하기까지 했다. 그런 의미에서 레퀴엠은 비록 안타깝게도 미완성에 그치기는 했지만 모차르트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쌓아올린 극음악에 대한 통찰력과 바흐와 헨델에게서 배운 강력한 표현, 그리고 빈 고전파 음악의 무르익은 음악 언어가 하나로 엮인, 10년 동안의 빈 시대를 총정리한 기념비적인 작품인 것이다. 또한, 모차르트가 숨을 거둔 순간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레퀴엠 신화는 모차르트와 당시 사회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자 한 음악 작품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줄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기념비이기도 하다.
○ 모차르트 레퀴엠 중 진노의 날
https://youtu.be/yrXIjfAQn2c?si=At2QSWlMlPNk9-ZP
○ 모차르트 레퀴엠 중, 부속가
6. Lacrimosa (눈물과 한탄의 날)
https://youtu.be/MafAZeag1_0?si=ybVMDMQmoAl6E6I9
○베르디의 레퀴엠 중, 진노의 날
https://youtu.be/ZjfN7m9Ow8o?si=LNM38MH_i9tQ7D9N
○ 베르디의 레퀴엠 전곡,
정명훈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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