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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유산의 길

사도세자와 정조의 뜰 : 융릉과 건릉

by 문촌수기 2015. 10. 3.

사도세자와 정조의 뜰, 융릉과 건릉

(길 위의 인문학 산책)

경기도 인문교양교육자료개발연구회, 인문학 길 위에서 만나다.’의 원고입니다.

매홀고등학교 황보근영

 

3-2-융릉과건릉.pdf: 파일을 받아 읽어보세요.

융릉 건릉의 배치도와 관람 포인트 융릉의 원형 연못 곤신지 : 원형 연못은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정조가 아버지를 연모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넓은 참도 봉분 병풍석의 연꽃봉오리 인석 건릉에서 나오는 길 참나무 숲 길 재실의 향나무와 개비자나무

- 문화재청 융릉관리소 융릉 건릉안내지에서

 

융건릉의 정식 명칭은 융릉(隆陵)과 건릉(健陵)’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면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며 당당히 외쳤다. 역적으로 몰리며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며 복권시킨다. 먼저 양주의 배봉산에 있는 아버지의 수은묘를 영우원(永佑園)으로 높였다.

 

이후 존호를 장헌세자로 올린 다음,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통상 왕릉은 한양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두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정조는 이 원칙을 무시했다. 키 큰 장정들을 모아 한 걸음을 크게 잡은 뒤에 이곳 화산이 100리 안이라고 주장하며 천장을 강행하였다. 탕탕평평과 임기응변의 그의 도량이 돋보인다. 그 후 1899년 고종 때에 장헌의황제로 추존되면서 묘호를 장조(莊祖)라 하고 능호를 융릉으로 승격하며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혜경궁 홍씨도 장헌의황후로 봉해졌다.

 

홍살문에서 참도를 걸으면 정자각과 봉분이 일직선상에 있어 능침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융릉은 봉분이 훤히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즉 능침공간이 정자각에서 오른쪽으로 삐져나와 보인다.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돌아가실 적에 얼마나 답답했을까라며 안타깝게 여긴 아들의 효심에서 비롯되었다. 사초지도 다른 능과 달리 매우 낮다. 찾아오는 백성들을 조금이나마 가까이 보고자 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