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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law)&효과(effect)&증후군(syndrome)

노블레스 오블리주

by 문촌수기 2016. 10. 1.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들

 

'명예(Noblesse)만큼 의무(Oblige)를 다해야 한다.'의 프랑스말에서 비롯된 노블레스 오블리주 !

즉, 높은 사회적 위치의 사람들이 짊어져야 하는 명성만큼의 도덕적 의무를 이르는 말인데요.

부정과 부패로 얼룩덜룩한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본받아야 할 지구촌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들을 살펴 보려 합니다.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키나투스 (Lucius Quinctius Cincinnatus, 기원전519~기원전430)
기원전 519~430년에 살았던 로마의 귀족입니다. 그의 아들이 폭행 사건을 일으키고 망명하자,

 당시 로라법에 따라 킨키나투스는 아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전 재산을 털어 보석금을 내야 했습니다.

이후 킨키나투스는 빈털터리가 되어 로마 변두리로 이사해 농사를 지으며 오두막에서 살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로마 주변 부족이 로마를 침략하자 원로원은 한마디 상의 없이 전 집정관이었던 킨키나투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농사일을 하고 있던 킨키나투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로마로 가 전쟁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보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어요.

킨키나투스는 로마의 영웅이 되었지만, 남아 있는 독재관의 임기마저 사양한 채 농부의 신분으로 돌아갔습니다.

 


레이디 고다이바 (Lady Godiva, ?~1067?)

 

영국 중세 코번트리의 귀족 레오프릭의 부인입니다. 영주 레오프릭이 농민들의 세금을 끌어 모아 자신의 부를 쌓자,

 이 모습을 지켜보던 고다이바는 남편에게 세금을 낮춰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부탁을 탐탁지 않게 여긴 레오프릭은 아내에게 농민을 위하는 마음을 몸소 보이라며,

그녀가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한 제안을 했습니다. 그것은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면 농민들의 세금을 낮춰 주겠다

것이었습니다. 중세 사회에서 여성이, 그것도 귀족의 부인이 알몸을 보인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다이바는 농민들을 위해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농민들은 그녀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

그녀가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창문을 굳게 닫은 채, 단 한 명도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칼레의 시민 (1419)


14세기 백 년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칼레 시는 영국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시민들은 1년 동안 버티며 맞섰지만 결국 항복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에 칼레 시에서는 사자를 보내 영국의 왕에게 항복하며 자비를 구했고, 그 결과 칼레 시민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모든 시민을 대신해 그동안의 항쟁을 책임질 시민 대표 여섯 명을 처형하겠다고 알려 왔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나선 시민은 칼레에서 최고의 부자로 꼽히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였습니다.

뒤이어 시장, 법률가, 상인 등 귀족들이 줄지어 자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섯 명의 시민 대표는 다음날 교수대로 향했지만, 영국 왕비의 만류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시모 데 메디치 (Cosimo de' Medici, 1389~1464)


14세기 초부터 직물 교역을 통해 부를 쌓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장남으로, 15세기 이탈리아의 금융인이자 인문학적 지식인입니다.

아버지의 은행업을 물려받은 코시모는 유럽 16개국에 지점을 둔 메디치 은행의 경영자이자 유럽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가치 있게 쓸 줄 알았던 그는 특히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여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책에 관심이 많아 세계 각국에서 모은 고문서와 책들을 소장한 도서관을 세운 뒤 시민들에게 개방했습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공공 도서관입니다.


조지 피보디 (George Peabody, 1795~1869)

 

적은 돈으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다가 유럽 부자들의 돈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금융업을 시작했고,

전 세계의 신뢰를 얻은 이 은행은 오늘날의 J.P.모건이 되었습니다.
은퇴 후 그는 미국과 영국에 대부분의 재산을 환원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다양한 교육 사업에 투자해서 세계적인 음악원인 피보디음악대학을 세웠습니다.

또한 영국에서는 피보디 신탁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는 일에 많은 돈을 기부했습니다.
교육과 빈민 구호에 대한 그의 기부는 이후 미국식 기부 문화의 전통으로 정착되어 카네기, 록펠러, 빌 게이츠를 통해 계승되었습니다.

 

존스 홉킨스 (Johns Hopkins, 1795~1873)

 

존스 홉킨스 병원


존스 홉킨스의 가문은 500여 명의 노예를 거느리며 광활한 담배 농장을 경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되기 수십 년 전인 1807년 가문의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스스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도 존스 홉킨스와 그의 가족들은 꾸준히 링컨의 노예 폐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자선 사업도 활발히 벌였습니다. 그는 대학과 병원을 세워 달라는 유언과 함께 거의 전 재산인 1천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1876년 그의 바람대로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오늘날 세계 최고의 의과 대학이자 병원인 존스 홉킨스 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앤드루 카네기 (Andrew Carnegie, 1835~1919)


미국의 철강 재벌입니다. 현재 미국 최대의 종합철강회사인 US 스틸은 카네기의 철강 회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산업화와 함께 카네기의 철강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으며, 카네기는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66세가 되던 해, 카네기는 승승장구하던 철강 사업을 갑작스레 접고 전 재산을 들여 자선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남은 인생을 자선 사업을 하며 보내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02년 워싱턴 카네기협회를 세워

미국 전역에 2,500개의 공공 도서관을 지었습니다.

 

이회영 (1867~1932)

 


호는 우당으로, 대대로 선비 정신을 이어 온 명문가의 자손이며 독립운동가입니다.

1896년 경기도에서 인삼 농장을 경영했으며, 그 수익금으로 항일 의병들의 자금을 후원했습니다.

이회영은 독립 협회에 가입해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의 국권 침탈이 겉으로 드러나자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지원했습니다. 또 비밀 결사인 신민회에서 활동했으며 항일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조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과 독립군을 길러 내는 데 힘쓰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32년 여순 감옥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 현 시가 600억에 이르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우당 선생의 일대기를 만나 보세요 ! ▼▼▼

 

이회영, 전 재산을 바쳐 독립군을 키우다

작가
이지수
출판
보물창고
발매
201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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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 (Warren Buffett, 1930~)

 


뛰어난 투자 실력과 기부 활동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기업인이자 투자가입니다.

그는 2006년 빌 게이츠의 재단에 370억 달러를 기부했으며, 2007년에는 21억 달러에 해당하는 주식을 자선 단체에 기부했습니다.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밝힌 그는 빌 게이츠와 함께 전 세계의 부자들을 만나 재산의 반 이상을 기부하는 것

목표로 하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 캠페인을 주도하며 기부 문화를 널리 퍼뜨리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 (Bill Gates, 1955~)

 


마이크로소프트 사를 창립한 미국의 천재 기업가입니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 전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기증할 것이며

자녀들에게는 1인당 1천만 달러씩만을 상속한다고 밝혀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자녀들에게 상속할 재산은

빌 게이츠 전 재산의 8천 분의 1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자녀들이 가난에 시달리지 않을 최소한의 금액이라고 합니다.

2000년에는 국제적 보건의료확대와 빈곤퇴치, 미국 내에서의 교육기회확대 등을 목표로 세계 최대 규모의

빌 & 멀린다 게이츠 재단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룡 (Jackie Chan, 1954~)

 


홍콩 출신의 영화배우입니다. 10여 년 전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며 중화권의 대표적인 기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 나머지 재산마저 모두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기부금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것이 평생 마음에 남는다는 그의 뜻에 따라

중국 전역에 학교를 세우고 불우한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데 사용될 예정입니다.

 

 

마크 저커버그 (Mark Zuckerberg, 1984~)

 

 

페이스북의 공동 설립자이자 회장 겸 CEO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미국에서 선정한
‘미국 50대 고액 기부자 명단’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주도하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 캠페인에도 동참했으며, 2014년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에볼라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 2,500만 달러를 기부하여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습니다.

 

 무려 1,2,3탄에 걸쳐 동양에서 서양까지 그리고 고대부터 현대까지 두루 살펴 전 세계의 '진짜 부자'들을 만나 보았는데요.

나도 돈만 많으면 베풀고 살 텐데, 하는 생각보다 언제나 주변을 살피고 온정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도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는 비밀 중에 하나랍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의 존경과 선망을 한몸에 받는 동시에 한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만석꾼 가문,

경주 최 부잣집의 숨은 부(富)의 비밀을 알려 주는 『경주 최 부잣집은 어떻게 베풀었을까?』를 소개해 드릴게요 !

 

 

법률신문 연구논단>

https://www.lawtimes.co.kr/Legal-Info/Research-Forum-View.aspx?serial=1760&page=1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법적 역할 -도덕적 의무의 법적 모델에 관한 성찰-

손용근 서울행정법원장 

I. 서언

사람들은 흔히 그가 속한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일반인들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가 충족될 때 지도층 인사들을 존경과 신뢰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철학과 도덕성을 갖춘 상류 지도층 인사들의 존재를 갈구하면서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노블레스 오블리제, 노블레스 오블리지 등으로 상이하게 사용되어 왔으나, 2002년 4월에 열린 「정부ㆍ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표준어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라는 말이 자주 인용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요컨대,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의 고위직과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사들이 지녀야 할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상류 지도층 인사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바탕 위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솔선수범하여 앞장서 나감으로써 사회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고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등 여러 사회적 순기능이 기대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나라 지도층 인사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제대로 실행하고 있는가?

 

Ⅱ.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주요 사례

1. 지성은 그리스인, 체력은 켈트인과 게르만인,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 경제력은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어떻게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지적한다. 로마의 귀족들은 평민보다 앞서 의무를 감당하고 절제된 행동으로 사회의 본보기가 되었다. 국고가 바닥나자 전시국채를 발행하여 원로원 위원과 고위 관료, 부자들에게만 구입하도록 하였고, 지도층이 먼저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쳤다. 귀족들은 스스로 자진하여 세금을 낼 뿐만 아니라 국난이 일어났을 때 솔선수범하여 전쟁터에 나아가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실제로 로마의 원로원 등 귀족들 상당수가 전쟁터에서 희생당했다고 한다.

귀족들이 솔선수범을 보이자 평민들도 자발적으로 세금을 냈고 다투어 전쟁터로 나갔다. 마침내 로마는 명장 ‘한니발’을 꺾고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그리스를 차례로 정복하여 세계적인 대국을 이뤘다.
그러나 로마는 제정(帝政) 이후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종되면서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 몽고 대제국을 건설한 징키스칸은 전쟁터로 출전할 때마다 항상 자신의 네 아들을 선두에 세워 병력을 지휘토록 했으며, 그 결과 3차에 걸친 서방원정을 대승으로 장식하고 광대한 몽고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전쟁사의 미스터리라고 말하고 있는 워털루 전투(The Battle of Waterloo)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설명되고 있다. 객관적으로 전력이 절대적 열세에 있었던 영국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전사자들의 신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프랑스군의 전사들 중에는 하층민이 많았지만, 영국군의 전사자들 중에는 ‘이튼칼리지(Eton College)’ 출신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귀족들의 자제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440년 헨리 6세(Henry VI)에 의하여 설립된 이튼칼리지는 주로 상류 부유층 자제가 입학하며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대학이나 사관학교 등으로 진학하여 영국의 지도자가 되는 일종의 ‘귀족양성학교’였다. 그런데 이튼칼리지 학교 출신들, 즉 귀족들의 자제들이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앞장을 서게 되자 서민 출신의 군인들도 용감하게 싸워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경우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깊게 배어 있다. 역대 미국의 지도자들 역시 앞장서서 전장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35대 대통령인 ‘존F.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2차 대전 중 미육군에 지원했으나 허리디스크로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그는 여름 내내 맹렬한 허리강화운동을 한 끝에 해군에 입대하여 태평양전쟁에 참가했다.

6.25 전쟁 중 미장성의 자제만 142명이 참전하여 그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Ban Fleet) 장군은 그가 지휘하던 6.25 전쟁터에서 두 아들을 잃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6.25 전쟁에 자기 아들을 참전시켰는데, 그 아들은 전사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의 시신 수습을 하지 말라고 특별히 지시했다. 주석의 아들이니 그 시체를 찾기 위해 많은  병사들이 희생될 것을 알고 내린 지시였다.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바탕으로 마오쩌둥은 10억의 중국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3. 우리나라의 경우도 역사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을 찾을 수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 화랑도(花郞徒)로 대표되는 신라 상류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기 600년 김유신의 동생 김흠춘은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의 결사대로 인해 수세에 몰리게 되자 아들 ‘반굴’에게 “지금이 충ㆍ효를 함께 이룰 수 있는 기회”라고 하면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싸우라고 했다. 이에 반굴은 용감하게 싸움에 임하여 장렬히 전사하고, 이를 본 ‘품일’은 그 아들 ‘관창’에게 반굴처럼 용감히 나가 싸우라고 했다. 관창도 전사를 했다. 두 장수의 아들이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소식은 신라 군사들의 전투의지를 불러일으켜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경주 최씨 가문의 400년 동안 내려오는 가훈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최씨 가문의 6가지 가훈은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 것(즉 권력의 한계를 가졌던 것이다).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말 것(재산도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말 것.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할 것. 다섯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부자이지만 젊을 때 3년 정도는 검소하게 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자기집 사방 백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등이다. 대대손손 대를 이어 6가지 가훈을 실천한 최씨 가문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었다. 9대에 걸쳐 진사를 지낸 지식 있는 양반 부자로 정당하게 부를 축적했으며, 그 부를 사회에 적절히 환원함으로써 민중의 존경을 받았다. 최씨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은 독립운동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백산상회를 세워 독립자금을 조달했으며, 일본 총독부의 끈질긴 관직 제의도 거부했다.

Ⅲ.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우리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어떠한 의미와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까? 사회지도층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는 무엇이며, 과연 어떠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인가? 특히 전문지식인의 한 표상인 교수나 전문직업인의 한 표상인 법조인에게 필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무엇인가?

먼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 주체에 대하여 알아본다. 과거 고대 로마와 서양의 귀족사회에서는 귀족들과 상류층 인사들이 당연히 여기에 포함이 되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여 왔는데, 귀족제도가 없어진 현대사회에서는 누가 그 주체가 되어 이를 실천해야 하는 것인가?

당연히 이 시대에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지도적인 지위에 있거나 고위층의 인사,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주체가 될 것이다.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정치가와 고위공직자, 경제활동을 주도하고 있는 재벌들과 기업가와 부자들, 학자와 교수 등 전문 지식인,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의 전문직업인, 군의 고급지휘관 등으로서 모든 분야에서 국가를 이끌어 가고, 사회를 유지해 나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계층과 사람들은 모두 포함이 되어야 할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장 귀중한 것을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이다. 국가의 안보가 위협을 받고, 또 전쟁에 처하였을 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참여하고 또 희생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요즈음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과 불우한 이웃, 장애인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귀중하다고 여기는 재물을 기부하고 봉사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실천해야 할 중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무엇일까? 사회가 극도로 다양화된 오늘의 현실에서 교수가 보여야 할 모범으로서의 최고가치 중 하나는 사회를 진단하고 이론적 처방을 제시함에 있어서 가치종합성, 가치중립성을 지니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미래를 감지하는 탁월한 예지력을 보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가치가 이분적으로 나뉘어 논리적인 투쟁을 사회적 토대 위에서 감행하고 있을 때 이를 정확히 진단하고 생산적인 미래를 창조할 지식적, 지혜적 모델을 제시할 ‘오블리주’를 느끼고 있는 것인지 한번 자성해 볼 일이다.

또한 오늘날 법조인이 시급히 실천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우선적으로 거론되어야 할 것이 ‘진실에의 용기’일 것이다. 과거에 진실에의 용기가 부족한 것이 사법부 불신의 단초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기관, 소송당사자, 여론 등으로부터 독립하여 주저 없이 사회공동체가 추구하는 진실을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역지사지의 자세’, ‘정직성’,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위한 공정한 법집행’, ‘부정한 청탁의 배격’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Ⅳ. 결론 - 도덕의 법적 모색

오늘날 우리 사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오죽하면 우리 사회지도층은 사회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지도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급속한 사회화를 거치면서 새로운 사회지도층 집단이 형성되어 왔지만 군사정권 등을 거치면서 ‘화랑도 정신’이나 전통사회의 명문가들이 지켜왔던 ‘선비정신’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사회지도층과 그 자녀들의 행태는 국민들에게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안겨주고 있다. 병역기피, 탈세, 부정입학 등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해이’는 우리 사회 전체의 부패구조로 확대 재생산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지도층은 ‘오블리주 없는 노블레스’, 다시 말해 ‘의무를 망각한 상류집단’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자기의 위치에 따른 책임을 자각하고 사회적 약자를 돕는 등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절대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노블레스만 있고 오블리주는 없는 국가는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다. 사회지도층은 무릇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한 집단이나 국가의 당당한 지도층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사회 구성원들에게 감동적이며 공감적인 것을 주어야 한다. 가정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은 방어의 최전선에 나서야 하며, 회사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자신의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사장이 진정한 존경과 추종을 얻게 된다. 국가사회에서도 이는 불변의 진리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자발성과 도덕성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법적 강제성 같은 실천의 강제를 수반하지 못한다는 한계성이 있다. 그 한계성으로 인하여 한낱 입에 발린 구두선, 치장적 교양이나 겉멋이라는 비난에 직면하는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학자와 법조인 등이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의 오블리주에 유의하면서 공직사회와 기업, 근로자의 노사관계 등에 초점을 두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논의해 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있어서 고위 공직자와 대기업 오너나 최고경영자 및 단결된 근로자 등이 갖는 시회적인 영향력을 감안하여 보면 시의적절한 뜻이 있다고 본다. 도덕과 윤리에 보다 친화적인 개념을 법적인 접근방법으로 논의해 본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모색적 지표제시가 가능하지 않을지 자못 기대가 크다. 다만, 법학자와 법조인 스스로도 ‘노블레스’의 하나임을 고려할 때 자신들의 ‘오블리주’를 먼저 논하지 아니하는 아쉬움이 없지 아니하다.

 

6.25전쟁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 유투브 동영상 https://youtu.be/KbKBROPMKuA

 

신라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쥬

[배연국칼럼] 그들은 왜?

자식을 사지로 보낸 신라인 / 안보 앞에 사익 앞세운 정치인
지도층 도덕적 의무 없이는 국가존속 남북통일 불가능

관련이슈 : 배연국 칼럼  2016.08.25. 세계일보

간절한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1356년 만에 어제 꿈속에서 신라 화랑 관창을 만났다. 얼굴은 열여섯의 앳된 소년 그대로였지만 그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기개가 흘렀다. 죽은 관창에게서 산 화랑정신이 느껴졌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보던 분을 이렇게 뵙다니! 꿈인지, 생시인지요?” “헛헛! 꿈이오, 꿈. 그러나 현실보다 더 생생한 꿈일 테지. 대관절 이 사람을 만나려 한 까닭이 무엇이오?” “화랑께서 통일한 이 나라가 지금 반 토막이 나 있습니다. 남북통일을 실현할 혜안을 빌리고자 찾은 것입니다.”

관창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마 통일전쟁이 한창이던 옛날 자신의 시대를 떠올린 것이리라. 660년 황산벌에서 백제의 결사대와 맞선 신라군은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자 김유신 장군의 동생 흠순이 아들 반굴을 불렀다. 반굴은 “나라에 목숨을 바쳐라”는 아버지의 명을 좇아 혼자 적진으로 달려가 최후를 맞았다. 뒤이어 진골 귀족인 품일 장군이 아들 관창을 적진으로 보냈다. 결국 관창은 말안장에 머리만 매달린 채 돌아왔다.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잡은 채 말했다.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나랏일을 위해 죽었으니 후회가 없으리.” 신라군은 그 기세를 몰아 백제군을 물리친다. 약소국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나중에 당나라군까지 몰아낸 것은 지도층의 정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윽고 화랑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일찍이 지도층이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않는 나라가 강대국이 된 적이 없소. 나는 하늘나라에서 많은 국가의 장수와 병사들을 만날 수 있었소. 로마제국과 미국, 영국, 조선의 사람들에게서 숱한 이야기들을 들었소. 로마에선 전쟁이 나면 귀족과 부유층이 앞장섰다고 하오. 영국은 상류층 학교인 이튼스쿨 출신 2000여명이 1,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소. 미국도 예외가 아니오. 6·25전쟁 때 목숨을 잃거나 부상한 장성의 아들이 35명이나 된다고 하잖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꼭 그런 강대국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소! 지도층의 의무는 국가 존속의 기본요건이오. 1967년 여름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터졌어요. 작은 이스라엘이 6일 만에 큰 나라의 무릎을 꿇렸지요. 전쟁에서 많은 사상자가 났지만 두 나라 간에 확연한 차이점이 있었어요. 이집트에선 사상자가 대부분 사병이었던 반면 이스라엘에선 거의 다 장교였습니다. 장교들이 맨 앞에서 싸운 것이 승리의 비결이었던 거지요.”

관창은 우리 역사에서도 지도층의 자세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갈렸다고 역설했다. 지도층의 정신이 살아 있었던 고구려와 신라는 수십만의 외적을 물리쳤지만 양반층이 병역을 외면한 조선은 고작 3만의 후금 군대에 무너졌다고 말했다. “지금 대한민국에선 ‘헬 조선’이라는 용어가 유행한다고 들었소. 나라가 지옥이라니! 대체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되었소. 조선 양반들처럼 병역을 회피하고 탐욕을 일삼는 지도층의 책임이 무엇보다 크오.”

화랑의 목소리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지도층의 타락을 꾸짖는 대목에선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기까지 했다. 천년이 지났지만 화랑의 애국 혼은 살아 있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것도 따지고 보면 지도층의 타락 때문이오. 정치인들이 나라의 안위는 안중에 없이 국민 감정을 부채질하고 있으니!”

“부끄럽습니다.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낍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화랑이 말했다. “한 말씀만 더 드리지요. 통일은 대박이 아니오.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지 않소? 귀한 것을 손에 넣고 싶으면 그것을 위해 먼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법이오. 신라 지도층이 무엇 때문에 자식의 목숨을 사지에 내던졌는지 생각해 보시오.” 

날이 밝아오자 화랑 관창은 지도층 의무의 화두를 던지고 표표히 사라졌다. 북한이 또 미사일을 쐈다. TV를 틀었다. 사드 문제로 들끓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뉴스 화면을 스쳤다. 

배연국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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