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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릉 제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쌍릉)

 예릉睿陵(철종과 철인황후)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능의 형식 :쌍릉능의 조성 :1863년(고종 1), 1878년(고종 15)

능의 구성
예릉은 조선 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철종장황제, 오른쪽이 철인장황후의 능이다. 예릉은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마지막 조선왕릉의 형태로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예릉의 문무석인과 석마, 장명등, 석양과 석호 일부는 중종의 구 정릉(靖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정릉(靖陵)을 서울 강남으로 천장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장명등은 문석인 가운데가 아닌 능침 앞쪽으로 배치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배치방법이다.

능의 역사
1863년(철종 14)에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64년에 고양 희릉(禧陵) 서쪽 언덕인 구 정릉(靖陵)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철인장황후 김씨가 1878년(고종 15)에 세상을 떠나자 예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향로와 어로. 황제릉 조영원칙에 따라 향로 좌우에 어로를 깔았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후 향로 왼편으로 어로를 하나 더 깔다보니 정자각에서 볼 때 참도가 왼편으로 치우쳤다.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이야기

철종장황제(재세 : 1831년 음력 6월 17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 재위 : 1849년 음력 6월 9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인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아들로 1831년(순조 31)에 경행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할아버지는 은언군으로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은언군은 정조 즉위 후 역모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순조 1)에 신유박해사건 때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이후 순조는 1830년(순조 30)에 은언군의 가족을 방면하였고,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이 1831년(순조 31)에 철종을 낳았으나, 헌종 즉위 후에 역모사건으로 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계속 강화도에서 생활하였다가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숙황후의 명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처음에는 순원숙황후의 수렴청정을 받아 국정을 운영하였고, 1851년(철종 2)부터 친정(親政)하였다. 헌종 대에부터 시작된 삼정(三政 :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진주민란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도로 인해 국정을 바로 잡지 못하였다. 그 후 1863년(철종 14)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었다.

이야기 더하기 ㅡ 극에 달한 세도정치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진다면 동생이나 조카벌이 왕통을 잇게 한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 드릴 때에 항렬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는 법도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동 김씨 척족들의 세도 권력 유지 차원에서 선왕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을 왕통을 잇게 했다. 원범은 천애고아가 되어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년여가 지난 어느날 갑자기 왕이 되었다. 순원왕후 김씨의 명이었다. 나이도 어린 데다 배운 것도 없다보니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였다.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이때부터 절정을 이루었다.
본디 세도ㆍ世道 정치라 함은 조광조가 도학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킨데서 주창된 것이다.즉,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여 정학을 북돋는 일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유탁을 받은 사돈이자 초계문신인 김조순은 12세의 어린 순조가 왕이 된 후, 안동 김씨 척족들의 세도ㆍ勢道가 시작되었다.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이야기
철인장황후 김씨(재세 : 1837년 음력 3월 23일 ~ 1878년 음력 5월 12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씨의 딸로 1837년(헌종 3)에 순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858년(철종 9)에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다. 철인장황후는 안동 김씨 출신의 왕비였지만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고, 말수가 적고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순대비(明純大妃)가 되었으며, 1878년(고종 15)에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인장황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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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릉ㅡ조선 제23대 순조

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2020. 11. 22. 21:05 Posted by 문촌수기
인릉ㆍ仁陵

조선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

인릉은 조선 제23대 순조(純祖 : 1790~1834, 1800~1834 재위)와 순원황후 김씨(純元皇后 金氏: 1789~1857)의 능이다.
순조는 정조와 유비 박씨의 아들로 1800년 11세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가 순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다. 이후 순조는 직접 정사를 돌보았으나 세도정치로 국정이 어지러워 부정부패가 생기고, 자연 재난, 홍경래의 난 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순원황후는 1802년(순조 2)에 왕비가 되었다. 헌종과 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수렴청정을 하여, 조선의 왕비 중 유일하게 2번 수렴청정을 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각각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와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추존되었다.
인릉은 처음 파주 장릉(인조와 인열왕후) 근처에 있었다가, 1856년(철종 7)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 수렴청정(垂簾聽政) : 대비가 발을 내리고 정치 상황을 듣는다는 의미로, 어린 왕을 도와 정치에 참여하는 것

* 인릉 연혁
- 헌종 1년(1835년) 경기도 파주에 순조숙황제 등 조성
- 철종 7년(1856년) 지금의 자리로 천릉 遷陵
- 철종 8년(1857년) 순원숙황후 안장安葬, 합장릉으로 조성
* 인릉 제향일
- 매년 1회 (10월 20일)
※ 제향일정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인릉 관람포인트 1>
인릉의 곡장 뒤 잉 부분은 꿈틀거리는 것처럼 봉분을 향하고 있다.
풍수에서는 산을 용으로 보는데 흔히 용이 아홉 번 꿈틀거리고 뻗어 나간 자리에 명당이 있다고 한다. 특히 왕릉을 택지할 때는 사초지 '강'과 봉분이 있는 '혈', 그리고 곡장 뒤의 ‘잉'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인릉의 잉 부분은 용이 꿈틀거림을
멈추고 생기를 모아 놓은 듯 봉분을 향하고 있어 명당이라 일컬어진다.

 

 

<인릉 관람포인트 2>
인릉의 문·무석인 4기의 생김새가 각각 다르다.
능 앞에 세워진 문관 형상의 석물 문석인과 무관 형상의 석물 무적인이 전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의 생김새도 각각, 석물의 생김새도 각각이다. 석물은 모두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보니 이렇듯 생김도 각각 다르게 조각된 것이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이 아이가 타고난 운은 나에게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순조)


"오색 무지개가 종묘 우물에 뻗어 있으며 신비로운 빛이 궁궐 숲을 둘러싸고 있으니, 이 어찌 하늘이 주신 기쁨이 아니겠는가. 원자(순조) 울음소리가 나자마자 어린이 늙은이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어나와 좋아하는 빛이라든지 춤추는 모양이 자기 집안의 경사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정도이니, 이는 사람들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무
엇이겠는가.”
(정조실록 14년 6월 18일)

정조실록에 따르면 순조의 탄생 순간은 더없이 화려하다. 그만큼 정조는 아들 순조를 아끼고 귀하게 여겼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기억하는 정조이기에 그의 아들 사랑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순조실록은 훗날 순조가 무럭무럭 자라 우뚝한 곳마루에 용의 얼굴을 하고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이 정조의 모습과 똑같았다. 이에 정조께서 매우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이 아이가 타고난 운은 나에게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하였다.'고 전한다. 정조의 기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정조는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갑작스레 승하하고 만다. 어린 순조가 후사를 잇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미처 여유 부릴 틈도 없이 왕좌에 올라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순조의 나이 11세. 한창 부모 품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을 나이에 왕위에 올라 신하를 거느리고 백성을 돌봐야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비록 시작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만 했던 어린 왕이었을지라도 순조는 한나라의 군주로서 덕목과 위엄을 잃지 않았다. 친정 이후에는 실무 관원들과 직접 만났고,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바에 귀 기울였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 정조의 빛나는 업적을 잇기 위해 <대학유의>, <만기
요람> 등 학문과 정사에 관한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현실은 순조의 노력과 뜻대로 흐르지 않았다. 수렴청정의 그늘은 오랫동안 그의 뒤를 따라다녔고 두 왕비 집안(경주 김씨와 안동 김씨)의 권력 다툼은 국정의 어려움을 가속화했다. 세도정치와 탐관오리가 활개를 치자 생활이 궁핍해진 백성들이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고 거기에 천재지변까지 겹쳐 민생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순조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재 속에서 백성들의 아픔을 보듬으려 노력했다.

“세금 징수가 가난한 민가에 날로 가중되어 백성들의 걱정과 탄식이 들려오는데, 위에서는 이를 들을 길이 없다면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보호하려고 하더라도 될 수가 있겠는가?"

어린 나이에 즉위해 정권의 험한 물살에 휩쓸린 가엾은 임금이었을지라도 백성을 살피는 마음만큼은 어느 왕에 못지않았다. 1826년(순조 26) 봄,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순조는 한탄한다.

"집집마다 들어가 보면 텅 비어 있고 마을마다 나가 보면 밥 짓는 연기가 끊겼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충분히 먹고 배를 두드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흉년 들어 굶주려 죽는 이들조차 구제하지 못하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쌀밥과 비단옷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끼겠는가?"

순조는 왕실 곳간을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쓰이도록 했다. 또한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을 진정시킨 뒤에도 가장 먼저 살핀 것 역시 민생이었다. 그의 몸은 왕좌에 있었지만 두 눈과 귀는 늘 백성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ㅡ 서울 헌릉과 인릉 안내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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