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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릉(서삼릉)ㆍ제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

by 문촌수기 2020. 12. 16.

예릉 제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쌍릉)

 예릉睿陵(철종과 철인황후)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능의 형식 :쌍릉능의 조성 :1863년(고종 1), 1878년(고종 15)

능의 구성
예릉은 조선 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철종장황제, 오른쪽이 철인장황후의 능이다. 예릉은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마지막 조선왕릉의 형태로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예릉의 문무석인과 석마, 장명등, 석양과 석호 일부는 중종의 구 정릉(靖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정릉(靖陵)을 서울 강남으로 천장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장명등은 문석인 가운데가 아닌 능침 앞쪽으로 배치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배치방법이다.

능의 역사
1863년(철종 14)에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64년에 고양 희릉(禧陵) 서쪽 언덕인 구 정릉(靖陵)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철인장황후 김씨가 1878년(고종 15)에 세상을 떠나자 예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향로와 어로. 황제릉 조영원칙에 따라 향로 좌우에 어로를 깔았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후 향로 왼편으로 어로를 하나 더 깔다보니 정자각에서 볼 때 참도가 왼편으로 치우쳤다.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이야기

철종장황제(재세 : 1831년 음력 6월 17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 재위 : 1849년 음력 6월 9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인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아들로 1831년(순조 31)에 경행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할아버지는 은언군으로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은언군은 정조 즉위 후 역모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순조 1)에 신유박해사건 때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이후 순조는 1830년(순조 30)에 은언군의 가족을 방면하였고,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이 1831년(순조 31)에 철종을 낳았으나, 헌종 즉위 후에 역모사건으로 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계속 강화도에서 생활하였다가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숙황후의 명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처음에는 순원숙황후의 수렴청정을 받아 국정을 운영하였고, 1851년(철종 2)부터 친정(親政)하였다. 헌종 대에부터 시작된 삼정(三政 :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진주민란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도로 인해 국정을 바로 잡지 못하였다. 그 후 1863년(철종 14)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었다.

이야기 더하기 ㅡ 극에 달한 세도정치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진다면 동생이나 조카벌이 왕통을 잇게 한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 드릴 때에 항렬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는 법도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동 김씨 척족들의 세도 권력 유지 차원에서 선왕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을 왕통을 잇게 했다. 원범은 천애고아가 되어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년여가 지난 어느날 갑자기 왕이 되었다. 순원왕후 김씨의 명이었다. 나이도 어린 데다 배운 것도 없다보니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였다.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이때부터 절정을 이루었다.
본디 세도ㆍ世道 정치라 함은 조광조가 도학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킨데서 주창된 것이다.즉,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여 정학을 북돋는 일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유탁을 받은 사돈이자 초계문신인 김조순은 12세의 어린 순조가 왕이 된 후, 안동 김씨 척족들의 세도ㆍ勢道가 시작되었다.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이야기
철인장황후 김씨(재세 : 1837년 음력 3월 23일 ~ 1878년 음력 5월 12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씨의 딸로 1837년(헌종 3)에 순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858년(철종 9)에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다. 철인장황후는 안동 김씨 출신의 왕비였지만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고, 말수가 적고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순대비(明純大妃)가 되었으며, 1878년(고종 15)에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인장황후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