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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길 인문학 산책

덕수궁,

by 문촌수기 2023. 11. 6.

덕수궁은 나에게는 마음이 무거운 궁이다. 치욕의 망국을 불러 온 궁이기 때문이다.
덕수궁은 조선의 14대 왕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 돌아온 후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집을 임시 거처[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처음 궁궐로 사용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운궁에 다시 왕이 머문 것은 조선 26대 왕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잠시 머물다가 경운궁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덕수궁에 여러 전각을 세우고 영역을 확장하였다. 당시 궁궐은 현재 규모의 3배 가까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일제 강압에 의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었다. 고종은 1919년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으며,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 권역이 빠르게 해체 및 축소되었다.


덕수궁의 역사
1392 조선 건국
1592 임진왜란 발발
1593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을 임시 궁궐로 삼고, '정릉동 행궁'이라 부름
1608 선조, 석어당(추정)에서 승하
광해군, 즉조당(추정)에서 즉위
1611 광해군,창덕궁으로 옮김.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 칭함
광해군, 경운궁으로 다시 옮김
1615 광해군, 창덕궁으로 다시 옮김
1618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석어당(추정)에 유폐
1623 인조, 즉조당(추정)에서 즉위. 창덕궁으로 옮김
1876 강화도 조약 체결. 문호 개방 시작
1896 고종,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1897 고종, 경운궁으로 옮김. 대한제국 선포
1904 대화재로 중화전, 석어당, 함녕전 등 전각 소실
1905 중명전에서 을사늑약 강제 체결
1906 대안문 수리 후 대한문으로 개칭
1907 순종, 창덕궁으로 옮김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부르기 시작
1910 석조전 완공. 국권 피탈
1919 함녕전에서 고종 승하
1938 석조전 서관 완공. '이왕가 미술관'으로 개관
1945 광복
1946~7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열림
2010 중명전 전시관 개관
2014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개관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대한(大漢)? 서울 한복판에 대한(大韓)이 아니고 대한(大漢)이라니!?
놀랍고 부끄럽고 의문이 든다.


이제사 알았다. '한'은 우리말 '하늘'을 문자로 표기하고자 억지로 빌려 쓴 글자였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체하시기 전에 말이다. '하늘ㅡ한ㅡ한강(漢江)ㅡ한양ㅡ대한문'으로 연결고리가 이어지니 부끄러움과 의문이 지워졌다.
대한문은 덕수궁의 동쪽 문이자 정문이다.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조선의 다른 궁궐처럼 남쪽 문인 인화문이었다. 그런데 1900년 동쪽의 대안문(大安門) 앞으로 큰 길이 나면서 인화문으로는 점차 사람들의 왕래가 뜸해지자, 덕수궁 화재 후 1906년대안문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그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고 정문으로 삼았다. 원래 이름인 대안문은 '크게 편안하다'는 뜻이며, '대한(大漢)'은 '한양이 창대해 진다'는 뜻이다.「대한문상량문(大漢門上樑文)」을 보면,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이 억만 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원전1 >고 나와 있다. 한양을 수도로 하여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말이다.
「대한문상량문」에는 “이에 대한(大漢)이란 정문을 세우니 고문(皐門: 왕궁의 바깥문)과 응문(應門: 왕궁의 정문)의 규모를 다 갖추었도다. 단청을 정성스레 칠하고 소한(霄漢)·운한(雲漢)*1의 뜻을 취하였으니 덕이 하늘에 합치하도다." <원전 2>라고 하여  '한(漢)'이  '하늘'을 뜻함을 분명히 했다.

*1 '소한ㆍ운한'은 모두 하늘ㆍ은하수를 뜻한다.
+은하수를 은한(銀漢)이라고도 한다.
~ 이조년의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원전 I>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권, 대한문상량문,
“河清屬千一之運,邦籙永昌,漢都奠萬億之基,門號特揭”
<원전 2> 앞의 책,
“乃立大漢正門, 備皐門應門之規. 塗勤丹雘,取霄漢雲漢之義,德合皥蒼”

중화전 영역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덕수궁을 정비하였다. 정전인 중화전 기단의 답도에는 용 문양을 새기고, 창호를 황금색으로 칠하여 황제국의 위용을 갖추었다. 중화전은1902년 지었을 때 중층이었지만, 1904년 화재를 겪고 1905년 다시 지으면서 단층으로 축소되었다. 중화전 남쪽 중화문을 둘러싸고 사방에 행각을 둘렀는데, 일제 강점기 이후 주변 행각과 전각이 헐리고 정원이 생기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즉조당과 석어당은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을 때부터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이다. 즉조당은 대한제국 초기에 정전으로 사용되었다가 중화전이 완성된 이후편전으로 활용되었다. 석어당은 덕수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중층 목조 전각이다. 1904년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1905년 다시 지었다.

■중화문ㆍ중화전(中和殿)


덕수궁의 중심 건물이다. 임금이 조회를 비롯해 하례(賀禮)를 받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등 나라의 중요한 행사나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다른 건물과 달리 두 단의 돌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지었는데, 1902년에 지은 것은1904년 화재로 소실됐고, 지금 것은 190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중화전 안에는'닫집' 혹은 '당가'라고 불리는 집 속의 집이 있고, 그 안에 임금이 앉던 어좌가있다.어좌 뒤로는 세 번 접었다고 해서 '삼절 곡병'이라 불리는 병풍이, 그 뒤로는 왕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1가 놓여 있다.
뜻풀이:中和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性情이라는 뜻으로 <中庸>에서 유래했다. 중용에서는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中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 한다. 中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和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道다. 중화를 지극히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원전1>고 했다.

<원전I>『중용』1장,“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發而皆中節,謂之和,中也者,天下之大本也,和也者,天下之達道也,致中和,天地位焉,萬物育焉。”

덕수궁 석어당

주련의 글
海屋籌添壽八百 (해옥주첨수팔백)
해옥(海屋)에 산가지 더하니 수명은 팔백 세요,

瑤池桃熟歲三千 (요지도숙세삼천)
요지(瑤池)에 복숭아 익으니 나이는 삼천 년일세.

석어당에 거처하는 임금의 장수를 기원한 시다. 해옥주첨(海屋籌添)은 장수를 상징하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바닷가 신선이 바다가 뽕나무 밭이 될 때마다 나뭇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그 니뭇가지가 열 칸짜리 집을 가득 채울 때까지 살았다고 전한다.
요지(瑤池)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곤륜산(崑崙山)의 연못 이름이다. 불사약을 가진 신녀神女) 서왕모(西王母)가 이 연못에 살며 복숭아를 심었는데, 열매가 익으려면 3천 년이 걸린다는 전설이 있다.
제작 정보 : 석어당 주련은 보통의 주련처럼 나무 판에 새긴 것이 아니라 종이에 글씨를 써 그대로 기둥에 발라 놓은 것이다.


함녕전 영역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고, 고종이 승하한 장소이기도 하다.
다른 궁궐과 달리 덕수궁에는 황후의 침전이 따로없는데, 그 이유는 명성황후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경복궁에서 시해된 후 고종이 다시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후의 침전을 대신하여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신 경효전을 세웠다. 경효전은1904년 화재로 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덕홍전이 전해온다. 덕홍전은 외국 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외관은 전통식이지만 내부는 서양식으로 꾸몄다.
정관헌은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절충된 독특한 외관을 가진 건물이다. 건물 주변을 다양한 문양으로 꾸며 장식성이 돋보인다.

정관헌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석조전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건립을 계획하여 1900년 착공하고, 1910년에준공하였다. 엄격한 비례와 좌우대칭이 돋보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내부에 접견실,대식당, 침실과 서재 등을 갖춘 근대 건축물이다. 석조전은 일제강점기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면서 훼손되었지만 2014년에 1910년 준공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중명전


중명전은 덕수궁이 대한제국 황궁으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황실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할 서재로 지어졌다. 당시 건물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1905년 11월,무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압 속에서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는 비운의 장소가 되었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고자 노력하였지만 결국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