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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유산의 길

서울 길 나들이2 -사직단

by 문촌수기 2016. 5. 4.
사직단 이야기  

한 나라의 주권은 백성에게서 나온다. 그 백성이 편안히 거처하고 배불리 먹고 살기 위해서는 국토가 안정되고 식량이 풍부해야 한다. 그래서 땅과 곡식은 백성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맹자는 말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百姓爲貴, 社稷次之, 君爲輕)"고.  
그는 참으로 위대한 사상가이다.    
 

사직단은 바로 국토와 식량의 근본인 땅과 곡식을 신(神)으로 섬기며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토지(땅)의 신을 사(社)라 하며, 곡식의 신을 직(稷)이라 한다. 좌묘우사(左廟右社)의 배치 양식에 의거하여 국왕이 거처하는 법궁(정궁)을 가운데 두고 동쪽(임금의 왼쪽)에 종묘를, 서쪽(임금의 오른쪽)에 사직단을 세우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드린다. 그래서 '종묘사직'이라 함은 곧 국가의 상징이 된다.  

겸재의 수성동도 현장인 옥인동 수성계곡을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사직단을 오랜만에 다시 들렀다. 그냥 답사겸 스쳐지나갈 작정이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보며 새로운 의문점이 일어나 훨씬 많은 시간을 이곳에다 투자했다.  다시 오길 참 잘했다. 그래서 그때는 몰랐던 것을 이제서야 새삼 알았다.

사직단의 정문은 북신문이란 것을. 그리고 그 안에 예감이 두개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토지신 사단(社壇)의 제단 위에는 돌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석주(石主, 돌주인)이라 한다는 것을.
사직단에서도 사직대제라는 제향의식을 가진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해설사와 함께 정문인 북신문을 거쳐 유문(幽門)으로 들어가 두개의 제단을 내 손으로 만져봤다는 것에 오길 잘 왔다 싶었다.

한편, 새삼 물을거리가 생겼다. 사방의 사신문은 홍살문과 같이 생겼는데 화살과 창살이 없다. 왜 그럴까? 고증과 복원의 실수였는가? 


(위의 사직단 안내도에서는 북신문(삼문)이 동쪽을 향하고 있다. 방위의 표시가 잘못되었거나 그림을 우하(右下) 방향으로 잘못그렸다.) 

북방에 위치한 북신문만 삼문(三門)이다. 그렇게 정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성과 도읍과 궁성 등 모든 문은 남문이 정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수원화성의 정문은 남문인 팔달문이 아니라,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이는 임금님이 계신 한양도성이 수원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사직단의 주인인 사신(社神)과 직신(稷神)은 하늘(Heaven)에 있으며, 그 하늘은 북(北)에 있기 때문에 북문이 정문인 것이다. 물론 모든 나라 모든 도읍의 사직단이 한결 같이 정문은 북문이라는 것은 자신하지 못하겠다.

북신문과 향축로 - 판위 - 어로 : 판위 위에서 임금은 남향하여 제단을 바라보며 사신과 직신을 맞이하고자 국궁사배하며 향을 피운다.

좀 더 높은 곳에 올라가야 사직단을 제대로 내려볼 수 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서신문 밖에 있는 낮은 언덕에 올랐는데, 정문인 북신문 방향에서 내려보기 위해서 서울 어린이 도서관 3층에 올라가서 찍었다. 사단(좌)과 직단(우)의 모습과 사직단을 두르는 유(壝)라는 낮은 담장과 네개의 유문도 분명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판위에서 오른편 서신문으로 이어지는 어로와 신실에서 사직단으로 이어지는 신위행로도 보인다.
아직 사직대제의 제향의식을 보진 못해서 잘 모르지만, 신실에 보관된 사신위패와 직신위패를 꺼내어 신위행로와 이어딘 남유문으로 들어와 사직제단위에 모셔놓고, 임금은 서신문으로 들어와 판위에서 남향하여 제단을 바라보고서 국궁사배하며, 북신문으로 들어온 향을 피워 하늘에 있는 사신과 직신의 혼(魂)을 모시고 폐(幣:비단)를 올린다. 이렇게 제향의식이 시작될 것이다.
 

신실에서는 4신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4신은 태사(太社)지신, 태직(太稷)지신과 그들의 아내라 할 수 있는 후토(后土)씨지신, 후직(后稷)씨지신이다. 사직대제를 지낼 때에는 신실에서 4신위를 모셔나와서 네개의 위판을 각 단에 배치하는데, 국사(國社)와 국직(國稷)은 각 단의 남쪽에서 북향하고, 후토와 후직은 각단의 북서쪽에서 동향하여 세운다.

정문인 북신문으로 들어가면 사각형의 웅덩이가 보인다. 예감이라 한다. 왕릉에서는 한개의 예감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곳은 좌 우 두개가 있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 제단이 둘이라서 그런가보다.  왕릉의 예감은 축문을 태운 재를 묻는데, 사직대제에서도 이 예감에 축문과 폐(비단)와 서직(黍稷:기장)을 태워 묻는다. 내가 만난 해설사님은 소,양,돼지의 털과 피와 백초와 오곡의 으뜸인 기장을 묻음으로써 땅으로 돌아간 백신(魄神)을 초청한다는 것이다.   

즉, 일반적인 제사의 영신례는 제주가 향을 피워 하늘로 돌아가신 조상의 혼(魂)을 신위에 모신 다음, 잔에 받은 을 모사기에 세번에 나누어 따르면서 땅으로 돌아간 조상의 넋인 백(魄)을 모신 다음에 제주를 비롯한 제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절을 두번올리면서 제사는 시작된다. 그런데, 해설사님의 말씀으로는 사직대제에서는 먼저 가축의 모혈과 기장을 예감에 묻음으로써 백신을 부르고 다음에 향을 피워 혼신을 모신다는 것이다. 또한 본래의 예감은 사람이 들어갈 만큼훨씬 크고 깊었다한다. 내가 잘못 듣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 우려되지만, 일단 기억된 것으로 기록에 남겨놓고 시간을 가지며 알아볼 일이다. 

   

1미터 정도의 제단은 3층으로 되어있다. 위는 하늘이요. 아래는 땅이며 가운데 두터운 돌은 사람(백성)이라는 것이다. - 해설사의 말씀.  정사방의 제단으로 오르는 사방의 계단도 계단석이 3개씩이다.   
특히, 사단(社壇) 위에는 직경 30센티미터 정도의 둥근 돌이 남쪽 계단 쪽에 박혀있었다. 사직단 안내도 그림에서도 자세히 보면 구분하여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이걸 묻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해설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직단은 지방 군현에도 있었으니 조선 땅에 400여 개 정도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이 곳 한양의 사직단에서만 유일하게 이 돌이 있다는 것이다. 이 돌을 석주(石主)라 한다. 석주(石柱) 아닌가 되물었지만, 주인 주(主)가 맞다고 하면서 한양의 사단(社壇)과 석주가 바로 조선 땅의 중심이며 그 주인이라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직경 30센티이며 깊이는 75센티 정도로 땅에 묻혀 있다고 한다.  

또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는 국토의 상징인 사단(社壇) 위를 덮고 있는 흙은 일반적인 흙으로 덮여 있지만, 그 안에는 오방색에 따라서 청토(동), 백토(서), 적토(남), 현토(북) 그리고 황제를 상징하는 황토(중앙)로 다섯 구역을 나눠 채워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곡식의 상징인 직단에서는 겉과 속이 똑같이 일반적인 흙으로 채워지고 덮여 있단다. 

비록, 정사각형의 제단이 한 나라의 국토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오행(五行) 오방(五方)을 다 가졌으니 우주를 상징하기도 한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지만, 사각형은 우주를 상징하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의문점이 떠올라 엉뚱한 질문을 드렸다. "사단에 채워진 오방색의 흙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사단이 국토(흙)의 상징이니 흙으로 채워졌다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식량(곡식)의 상징인 직단에서는 흙 위에 곡식을 심던가 곡식을 상징하는 풀이라도 자라도록 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웃으면서 말씀하시길, 결국 흙이 있어야 곡식이 자라니 '흙(土)'이 근본이란다.   

동에서 서향하며 서유문, 서신문을 찍은 사진. 지금은 숲을 이룬 작은 언덕이지만 사직단 본래의 모습은 이곳에 전사청과 제기고, 제정 등이 여기에 있어 제사 준비를 한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사직단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여러 부속 건물들을 허물어 사라졌다. 정문도 근대화 과정에서 도로폭이 확장되며 24미터 가량 뒤로 옮겨진 상태라 한다. 장기적인 복원계획에 의해 부속건물들이 차츰 복원될 예정이란다. 

 

사단을 오르는 남쪽 계단 오른편으로 치우쳐서 석주가 박혀 있다.

남유문에서 북향으로 바라보며 찍은 사진, 즉 오른쪽이 사단이고 왼쪽이 직단이다. 파란색 지붕이 서울 어린이 도서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