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으로 새로운 조선의 11대 임금으로 옹립된 진성대군(중종)은, 성종의 계비였던 대비윤씨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반정이 일어났을 당시에, 반정세력들은 곧바로 연산군의 측근세력있었던 임사홍, 신수근, 장녹수등을 처형했다. 그리고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는데, 강화도로 유배를 간 연산군은 2달 만에 원인 모를 병에 걸려서 사망하고 만다.
그런데 연산군이 박원종등 반정세력에 의해서, 독살당했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그런데 연산군의 처남으로서 연산군을 보필했던 최측근세력인 익창부원군 신수근은 반정이 일어난 즉시 처형당했는데, 문제는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된 진성대군(중종)의 부인 신씨가 바로 신수근의 딸이라고 하는 점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 새로운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게 되자, 진성대군의 부인인 신씨도 당연히 왕비로 등극하게 된다.
그런데 신씨는 조선의 왕비로 등극한지 7일만에 왕비에서 폐위되고, 사가로 쫒겨나는 불운을 겪고 만다.

진성대군(중종)의 부인 신씨가 왕비에서 쫒겨나게 된 이유는,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최측근세력이었고, 그는 이미 역적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반정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역적의 딸인 신씨를 국모로 모실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신씨가 왕비가 되면, 언제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했던 원수를 찾아내어, 피의 보복을 하게되는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중종반정 성공이후,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자는 반정세력의 우두머리격인 박원종이었는데, 박원종은 진성대군(중종)에게 압력을 가해서, 그의 부인인 신씨를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사가로 유폐시키고 만다.

이로써 신씨(단경왕후)는 조선역사상 가장 짧은 7일 동안만 왕비의 자리를 유지했던 가장 불행한 왕비로 기록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씨가 페위된 다음날, 중종은 반정의 핵심세력인 박원종의 조카인 장경왕후와 새롭게 혼례식을 올리면서 새로운 왕비가 탄생하게 된다.

♣ 중종과 폐비 신씨의 애절한 사랑과 이별이야기, 빨간 치마바위 이야기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게된 진성대군(중종)은 연산군이 재위하던 시절에, 연산군의 폭압정치와 탄압통치에도 최대한 몸을 낮추고 조심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재위시절 연산군은 자신의 정책에 조금이라도 반대하거나,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는 대신들은 가차없이 죽이는 등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저질렀었다.
연산군이 일으킨 갑자사화 때에만 해도, 무려 122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연산군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이렇게 포악한 연산군의 탄압과 횡포가 서슬 퍼렇던 시절에, 진성대군(중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몸을 최대한 낮추라고 조언하고 보필했던 부인 신씨의 충고와 조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연산군의 폭정시절에는 연산군의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에, 무고한 대신이나 선비들이 졸지에 역적으로 몰려서, 숙청당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부인 신씨의 충고와 기지로 진성대군(중종)은 몸을 낮추고 최대한 조신하게 행동함으로써, 숙청을 당하지 않고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진성대군(중종)과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인 폐비 신씨는 각각 12살과 13살의 어린 나이에 혼례를 치렀다고 한다.

지금의 초등학생나이인 어린 나이에 두사람은 혼인식을 치렀으니까, 진성대군(중종)에게 부인 신씨는 첫사랑이 되는 셈이며,
이렇게 어린 나이에 부부가 된 두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진한 우정을 키워나갔고, 성인이 된 후에 두사람의 애정은 매우 두터웠다고 하며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1506년 진성대군과 신씨의 나이가 각각 19살과 20살 되었을 때에, 연산군에 반대한 반정세력들에 의해서, 반정쿠테타가 일어났고, 반정군 군사들이 진성대군의 집앞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군사들이 집을 에워싸고 포위하자, 진성대군(중종)은 군사들이 자신을 해하려고 온 줄로 오해하고,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차고 똑똑했던 부인 신씨는 겁먹은 진성대군의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출동한 군사들의 말머리가 우리를 향해있으면, 우리를 해하려고 온 군사가 맞지만, 군사들의 꼬리가 우리를 향해 있다면, 그것을 오히려 공자를 호위하려 온 것이기 때문에, 자살여부는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출동한 군사들을 보고 무조건 겁만 먹고, 자살하려는 진성대군(중종)의 팔을 제지하면서, 설득했던 부인 신씨의 재치와 충고로, 진성대군의 자살을 막았다고 한다.

두사람이 대문을 열고서 군사들을 살펴보니까, 군사들의 말꼬리가 대문으로 향해있었고, 말머리는 대궐쪽으로 향해 있었다고 한다.
즉, 진성대군의 집앞에 모여들었던 군사들은 진성대군을 호위해서 대궐로 모시기 위해서, 출동했던 군사들이라고 한다.

1506년 9월 18일날, 박원종과 성희안 등을 중심으로 한 연산군 반대세력들이 군사를 동원해서 반정쿠테타를 일으켰고,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을 새로운 임금으로 옹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반정세력의 옹립으로 조선의 제11대 임금으로 등극한 진성대군(중종)은 궁궐로 입궁해서, 근정전의 용상위에 올랐다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성대군의 부인 신씨는 그 다음날에 궁궐에 입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성대군이 조선의 11대 왕으로 등극하였으니, 자연히 부인 신씨도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박원종과 성희안 등 반정 공신세력들이 중종의 부인 신씨가 왕비가 되는 것을 매우 탐탐치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바로 중종의 부인 신씨가 연산대군의 처남이자 최측근인 신수근의 딸이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신씨가 역적의 딸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미 연산군의 폐위를 극렬하게 반대했던 신수근을 죽였던 박원종은 자신들이 죽인 신수근의 딸 신씨가 왕비에 오르면, 나중에 큰 피의 보복이 일어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박원종 등 반정 공신들은 중종의 부인 신씨가 왕비가 될 수 없다고 그녀의 폐위를 결렬하게 주장했다고 하며, 반정 공신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던 중종은 신씨의 폐위를 반대했지만, 결국 실권이 없었던 중종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었고, 반정공신들의 주장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진성대군(중종)이 조선의 왕이 되었지만, 그 부인 신씨는 왕비가 된 지 7일만에 폐위되었고, 궁궐에서 쫒겨나서 사가로 유폐되고 말았다.
남편은 한나라의 최고의 지존 임금이 되었건만, 왕의 조강지처였던 신씨 부인은 거꾸로 사가로 유폐되는 불운을 맞이했던 것이다.

연려실기술과 야사의 기록에도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젊었을 때부터 두사람은 애정이 두터웠지만, 부인의 아버지를 우리가 죽였으니, 그 딸(신씨)을 왕비로 둔다면, 나중에 우리에게 무슨 우환이 생길지 모른다’고 말한 기록에서 보듯이,
중종반정에 성공한 반정공신들이 신씨 부인으로 인한 후환을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애정이 남달리 두터웠던 중종과 신씨부인은 19살, 20살의 나이에 생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신씨부인은 조선역사상 가장 불행한 왕가의 여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야사에는 부인 신씨가 자신으로 인해 중종이 반정공신들로부터 화를 입을까봐, 반정공신세력들의 폐비조치에 순순히 응해서 궁궐에 나갔다고 한다.

어차피 역적의 딸이 되어버린 신씨는, 진성대군(중종)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고, 왕비의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나서, 사가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처리문제를 놓고 중종이 반정공신세력들과 대립각을 세운다면, 중종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신씨가 스스로 궁궐을 떠났다는 야사의 또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반정세력들의 도움으로 왕이 된 중종은, 반정공신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부인 신씨가 폐위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 한사람 지켜주지 못한 진성대군(중종)의 가슴을 얼마나 사무치게 괴로웠겠는가?
또한 끔찍이 사랑했던 지아비(중종)과 생이별하고, 평생을 유폐되어 살아야했던 폐비 신씨의 마음은 얼마나 처참하게 찢어졌겠는가?

폐비 신씨가 쫒겨나가 살았던 사가(私家)는 인왕산의 정상부근에 있었다고 하며, 이미 신씨의 부모형제들은 역적집안으로 죽임을 당하는 등 풍비박산나서, 신씨는 홀로 외롭게 사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신씨가 폐위되고 난 후, 중종은 부인 신씨를 오랫동안 잊지못하고 무척 그리워했었다고
한다.
야사의 기록에 의하면, 중종은 종종 혼이 나간 사람처럼,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고 하며, 수시로 궁궐마당으로 나가 인왕산쪽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중종이 새롭게 혼인한 장경왕후가 혼인 10년 만에 아들(인종)을 출산했는데, 출산의 후유증을 앓다가 그만 7일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왕비의 자리가 공석이 되고만 것이다. 왕비의 자리가 비게 되자, 담양부사 등 일부대신들은 폐위된 신씨를 왕비의 자리에 다시 복위시켜줄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서슬이 퍼렇던 반정공신세력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서, 중종은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지는 못했다고 한다. 중종은 여전히 반정공신들에게 휘둘리는 연약한 임금이었을 뿐이며,
중종은 폐비 신씨를 복귀시키지 못한 채, 다른 여인과 혼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폐비 신씨를 복위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버린 셈이다.

인왕산은 부인 신씨가 유폐되어있는 사가가 있는 곳이다. 중종은 새로운 왕비와 혼인생활을 하는 중에도, 종종 자신의 조강지처였던 신씨를 잊지못하고, 그녀가 살고있는 인왕산쪽을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폐비 신씨도 또한 지아비인 중종을 하염없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폐비 신씨는 중종의 생일날이 되면, 생일상을 차려놓고 그 앞에 앉아서 중종의 안위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폐비 신씨는 중종이 자신이 있는 인왕산쪽을 자주 바라본다는 소식을 들고 난 후에는, 자신이 즐겨입었던 붉은치마를 인왕산의 큰바위에 걸쳐두었다고 한다.

폐비 신씨는 중종이 인왕산쪽을 자주 바라본다는 말을 듣고, 인왕산의 큰바위에 자신의 치마를 걸어서,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바위가 바로 인왕산의 ‘치마바위’이다. ‘치마바위’는 실제로 사직동 인왕산부근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평생토록 폐비 신씨는 인왕산에 올라서, 궁궐을 내려다보면서, 남편을 한없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1544년, 중중은 57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들어눕게 되었고, 곧 임종이 머지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중종이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에, 한 여승이 중종의 처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여승의 차림으로 중종 앞에 나타난 여인은 바로 폐비 신씨였다고 한다.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했던 중종의 요청으로 폐비 신씨는 여승으로 분장하고서 중종 앞에 나타난 것이다.

폐비 신씨가 궁궐을 나간 지, 무려 39년만에 중종과 신씨는 다시 재회한 것이다. 자신이 왕이 되고도 권력이 약해서, 부인을 지켜주지 못했던 중종은 자신의 임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조강지처인 신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종편’에도 ‘중종은 옥체가 미령해서 여승을 불러서 기도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소문에는 폐비 신씨를 보고싶어서, 여승으로 분장해 입궐케 했다고 한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중종은 자신이 임종하기 직전에 입궐시킨 여승은 폐비 신씨일 것으로 추정되며, 그녀를 남의 눈에 안 띄게 여승으로 분장시켜서 궁으로 불러들였던 것
이다.
자신이 끔찍이 사랑했던 단 하나의 사랑, 조강지처를 헤어진 지 39년 만에 그것도 임종 직전에야 다시 볼 수 있었던 중종과 폐비 신씨는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흘렸겠는가?

폐비 신씨는 우리나라 궁중 역사상 가장 애절하고 슬픈 왕가의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가지 구별한 것이 있는데, 페위된 연산군의 정비도 신씨인데, 연산군 정비 신씨는 중종 부인 신씨의 고모라고 한다.

그러니까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정비가 되었고, 신수근의 딸은 중종의 부인이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명의 신씨 모두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폐위되는 불행을 겪었던 것이다.

폐비 신씨는 1557년 71세의 나이로, 폐위된 지 51년 만에 자신의 사가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남편 중종이 죽은 지 13년 만에 사망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폐비 신씨는 죽은 지 233년이 지난 영조 때에 단경왕후로 복위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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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애틋함은 일제시대에 변질됐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동원체제를 강화하던 일제는 1939년 서울에서 이른바 ‘대일본청년단회의’를 열고 이를 기념한다며 치마바위에 글씨를 새겼다. 사진의 오른쪽 ‘동아청년단결’로부터 시작하는 100여 글자다. 해방 후 글자를 쪼아냈는데 흔적이 너저분하게 남아 있다. /글·사진=최수문기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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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피帖).
나이 열 여섯에 한 살 연하인 정약용에게 시집 온 풍산 홍씨가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어느날 장롱 속에 고이 간직했던 빛 바랜 다홍치마를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다산에게 보냈다.

다산이 나이 40에 귀양을 떠난 지 10여년이 넘었고 언제 해배(解配) 될지
가늠하지 못하는 처지에, 접어든 황혼에 대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신혼 때 입던 그 치마가 장롱 속에서도 빛이 바랬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탓해야 무엇을 하겠는가?

자식 아홉에 여섯을 가슴에 묻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누에와 함께
자식들도 키웠으니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다산의 나이 스물일곱에 과거에 급제를 하였고 13년 뒤에 다시 귀양을 갔다.
빠른 출세도 아니었지만 인생의 황금기에 유배를 가야만 했던 다산으로 인하여
가정 경제는 거의 부인 홍씨의 몫이었다.

38세에 얻은 농장도 세 살이 되던 해에 죽었고,
귀양지에서 그 소식을 들은 다산이나 혼자 그 일을 감당을 했어야 했던 부인 홍씨,
모두 애절하기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다산은 요절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장이와 효순이는 산등성이에다 묻었고,
삼동이와 그 다음 애는 산발치에다 묻었다. 농아도 필시 산발치에 묻었을 거다”라고
적고는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하니 어쩌란 말인가”라고
비통해 했다.

말없이 여섯 폭의 다홍치마가 보내 왔지만 다산은 그 치마를 잘라서 만든 서첩에
“노을 치마”란 뜻인 “하피첩(霞피帖)”이라 표지를 썼다.
찾아 온 황혼에 순응을 하자는 뜻으로 빛바랜 다홍치마를 보낸 것인지,
아니면 현재는 고통스러우나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힘을 내자는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산은 그 치마폭으로 하피첩을 만들었다.

"내가 강진 귀양지에 있을 때,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색 활옷이었다. 붉은빛은 이미 씻겨 나갔고, 노란 빛도 엷어져서 글씨를 쓰기에 마침맞았다. 마침내 가위로 잘라 작은 첩을 만들어, 붓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보낸다. 훗날 이 글을 보면 감회가 일것이고,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하면 틀림없이 뭉클한 느낌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하피첩(霞帔帖)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곧 붉은 치마(홍 군, 紅裙)을 돌려 말한 것이다. 가경 경오년(1810) 초가을 다산(茶山)의 동암(東庵)에서 정약용 쓰다."

아들에게 쓴 시구(詩句)

病妻寄敝裙, 千里托心素, 歲久紅己褪, 悵然念衰暮, 裁成小書帖, 聊寫戒子句, 庶幾念二親, 終身鐫肺腑. 몸져누운 아내가 헤진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의 먼 곳에서 본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빛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는, 아들 경계해주는 글귀나 써보았네. 바라노니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하피첩의 '하피(霞帔)'란 중국 당송(唐宋) 시대 신부가 입은 혼례복을 말하는 데, 조선 시대에는 왕실의 비(妃), 빈(嬪)들이 입던 옷이다. 여기에서 하피란 다산의 부인 풍산 홍 씨가 시집 올 때 입고 온 붉은색 치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제대로 쓰자면 홍군(紅裙), 즉 '붉은 치마'라고 써야 옳지만 이는 해석하기 나름으로는 '기생'이라는 다른 뜻도 있기 때문에 그냥 붉을 하(霞), 즉 노을 하를 써서 '하피(霞帔)'라고
한 것이다.
한편 그로부터 3년 뒤 다산은 시집 간 외동딸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서첩을 만들고 남은 천 조각에 한 해 전에 혼인한 외동딸에게 줄 그림을 그렸다. 꽃이 벙근 매화 가지에 올라탄 멧새 두 마리를 그려넣은 '매조도(梅鳥圖)'(고려대박물관 소장)가 그것이다. 유배 시절 장남 학연이 두어 차례 다녀간 적은 있지만,
아내와 외동딸은 그 긴 세월 동안 얼굴 한번 볼 수가 없었다. 하나 남은 딸의 시집가는 날도 함께 해주지 못했으니 아비 된 자로서 다산의 심경이 오죽했으리요.

 

▲ 매조도 다산이 외동딸에게 그려준 매화와새 그림으로,

그 아래 이를 그린 사연을 적었다 ⓒ 고려대박물관 소장

翩翩飛鳥 息我庭梅
파르르 새가 날아 뜰 앞 매화에 앉네
有烈其芳 惠然其來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 왔네
爰止爰棲 樂爾家室
여기에 둥지 틀어 너의 집 삼으려무나
華之旣榮 有賁其實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

옛 사람들의 절제된 애정 표현, 그러나 그 정신적 교감은 현대 누구도 따르지는 못할 것이다.
다산은 18년의 유배에서 풀려서 집에 온 때가 58세, 그러나 둘은 다시 18년을 같이 살다가 75세에 별세를 하였다.

다음은 다산이 작고 하시기 전 병중이지만 회혼례(결혼 61주년)를 위하여 지은 시.
회혼례 며칠 뒤에 별세를 하셨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칠순 나이에 신혼의 기분을 연상할 수 있는 그들의 정신 세계,
신혼은 더불어 누리는 것이니 부인 홍씨 역시 그에 상응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딸을 시집보내고 불과 몇 달이 지났을까,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만난 소실 정씨에게서 딸을 하나 얻었다.
이때 다산은 이미 해배 명령이 떨어져 곧 여기를 떠나야 할 처지였다. 저 어린 것이 여기 혼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이 어린 딸 홍임을 위해 똑같은 크기의 그림 한 폭을 더 그렸다.
똑같은 매조도(梅鳥圖)인데 여기에선 멧새가 한 마리다. 이 그림은 실제 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古枝衰朽欲成搓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擢出靑梢也放花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웠구나
何處飛來彩翎雀
어디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應留一隻落天涯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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