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대구를 찾았다. 젊은 시절의 아픈 추억들이 아련하다.
대구 중앙공원이 지금은 경상감영공원으로 담장을 벗고 시민들 품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문초를 당하고 바로 서쪽에 붙은 지금의 종로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했던 감옥소에서 옥살이하고 대구 읍성 남문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지금은 천주교 순교성지로 알려진 관덕정이 사형터였다. 그의 동상은 대구 달성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대구 근대로의 여행 제1코스, 경상감영 달성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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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동학의 성지…경상감영서 최제우 순도하던 날
ㅡ영남일보 박진관기자2014-02-14
‘망나니가 水雲의 목을 베는 순간 광풍이 일어…

그의 머리는 사흘간 읍성 밖 장대에 걸렸다’
(경주시 현곡면 용담성지 안에 있는 수운 최제우 동상.)
‘스스로 서지 못하고야 강산의 주인 구실 어찌 하며 스스로 믿지 못하고야 남의 신의 바랄손가. 급급한 세상 사람 선각자를 몰랐어라. 갑자년 3월10일(양력 4월15일) 대구장대에서 순도하신 불멸의 그 얼이여. 한울과 더불어 길이 살아 창생을 제도하니 이 겨레의 자랑이자 나의 영광이 아닌가. 밝음은 바로 그대 마음에 비치도다.’(달성공원 내 최제우 동상 비문 중)
대구달성공원ㅡ최제우동상

혹세무민 죄 뒤집어 써 경상감영 압송되던 날 수많은 신도 울음바다. 100일가량 옥살이 중 혹독한 문초·고문 받아
갑자년 삼월 초열흘날 마지막 묵도 올린 뒤 조용히 목을 내놓아

◆대구에서 순도한 최제우

수운 최제우(1824~64)는 동학을 창시한 후 경주최씨 집성촌인 현곡면 일대부터 포교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여종 2명 중 하나는 며느리로 삼고, 하나는 딸로 삼았다. 가히 혁명적이었다. 포교한 지 3년 만에 동학의 교인수는 3천명을 넘어섰고, 접소는 14개소에 이르렀다. 하지만 보수적인 경상도 일대 서원과 향교에선 만인평등을 외치는 그를 곱게 볼 리 만무했다. 문중에서는 그를 가문을 망치는 원수로 여길 정도였다. 
조정에서는 ‘서양의 사술을 전부 답습해 특별히 명목만 바꿔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킨다. 조기에 처결(處決)하지 않는다면 중국의 황건적이나 백련교 같은 도적떼가 될 것’이라며 관군을 보내 1863년 12월10일(음) 경주 용담정에서 그를 체포한다. 당시 선전관 정운구는 포졸 50여명을 대동해 수운을 포함, 제자 23명도 함께 포박해 서울로 압송하려 했다. 경주~영천~대구를 거쳐 조령을 넘어갈 예정이었지만, 동학교도 수천 명이 조령에 집결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주~화령을 넘어 보은, 청산, 청주를 거쳐 과천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즈음 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과천에서 약 일주일간 머물다 수운은 다시 경상감영으로 이송된다. 이송 중간에 제자와 신도 수백 명이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 이들이 관군에 돈을 바치며 ‘잘 봐 달라’고 애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1864년 1월5일(음) 경상감영 원형옥에 다시 압송된 수운은 100일가량 옥살이를 한다. 옥살이 도중 해월 최시형이 옥졸로 변장해 옥사를 찾아간다. 
수운은 해월에게 “몸은 죽지만 영의 힘으로 대도를 지켜 천명을 따르겠으니 높이 날고 멀리 뛰라”고 했다. 해월은 이후 38년간 잠적하며 교조신원운동을 벌인다.

수운의 심문을 맡은 관리는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서헌순이다. 그는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정사를 다스리는 데 청렴결백하며, 옳고 그름을 잘 판단했다고 한다. 일례로 경상감사를 역임할 때 부인이 사택에서 가지고 온 솥이 경상도 것임을 알고 그 솥을 경상감영으로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수운을 심문할 때 배석한 관리는 상주목사 조영화, 지례현감 정기화 등이었다 수운은 20여차례나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이들은 허황된 사술을 퍼뜨려 민심을 혼란시키는데 초점을 맞춰 주로 몽둥이로 볼기와 넓적다리를 치며 문초를 했다. 혹독한 매질로 수운의 정강이가 부러지기도 했다. 

조정은 서학을 전파하고 재물을 사취한다는 명목으로 수운에게 죄를 덮어씌울 요량이었다. 특히 검무와 검결을 모반의 뜻이 담긴 것으로 해석했다. 서헌순은 ‘수운이 제자들에게 글자를 써주고 돈을 받은 적은 있으나 토색질한 것은 없으며, 동학이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막기 위한 학문이라 한다’면서 문초한 대로 조정에 보고했다. 하지만 조정에선 ‘경상도는 추로지향이어서 음악 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던 고장이었으나, 동학이란 요사스러운 무리가 나타나서 많은 도당을 집결시켰다’며 동학을 서학과 마찬가지로 혹세무민의 사교로 내몬다.

결국 수운은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참형을 언도받고 나머지 12명은 유배 등 엄형을 받는다. 형조판서의 훈령에 따라 수운은 3월10일(양력 4월15일) 관덕당에서 처형됐다.
‘갑자년 삼월 초열흘, 대구장대에는 사람이 백차일 치듯이 모였다. 대구감영 사람들, 사방으로 몰려들어온 동학하는 사람들, 동학 선생이 죽는 것을 볼 양으로 아침 일찍부터 모여들었다.’

이 글은 1923년 천도교가 운영한 개벽지 3월호 춘원 이광수가 쓴 ‘거룩한 이의 죽음’이란 단편소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망나니가 칼춤을 추며 수운의 목을 내리쳤으나 목에 검의 흔적조차 나지 않자 감사와 형졸이 당황했다. 이에 수운이 ‘맑은 물 한 그릇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마지막 묵도를 한 다음 형졸에게 ‘안심하고 베라’하고 조용히 목을 내놓았다. 망나니가 수운의 목을 베는 순간 맑은 날씨가 갑자기 변해 광풍이 일고 폭우가 내렸다고 전해온다. 수운의 머리는 읍성 남문 밖 장대에 사흘간 효수됐다. 이후 아들 세정과 제자들에게 시신이 넘겨진다. 시신을 수습한 일행은 경산 자인에서 사흘간 머물렀다. 시신에 따뜻한 기운이 남아 행여 회생할까 하는 기대감을 가졌다고 한다. 운구일행은 영천~경주 용담에 이르러 용담 서쪽 언덕에 수운의 시신을 안장했다. 그는 1907년 순종황제에 의해 사면됐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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