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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커피그림이야기

광화문 연가, 덕수궁 돌담길을 노래하고 싶다.

by 문촌수기 2020. 12. 30.

눈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길, 덕수궁 돌담길, 정동골목 언덕길. 동생이 고향을 떠나 총각때부터 18년 동안 생활했던 경향신문사를 찾아 올라갔던 그 골목길. 함께 걸었던 추억을 떠올려본다. 떠나온 고향보다 오래 살았던 서울 생활. 동생은 가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디가 내 고향일까?"
하기사 어디에 살던 우리는 모두 나그네. 일산에 살다가 동탄으로 이사 올 적에도 그리울 것 같아 발길을 머뭇거렸던 곳이 이 곳, 광화문 네거리였다. 새해에는 마스크 벗고 같이 노래하며 다시 이 길을 걸어보리라 희망한다.

이문세 노래그림 ~ 광화문연가ㆍ옛사랑

*하모니카 연주> HOHNER 다이아토닉, 마린밴드 Bb key

광화문연가Bb-반주.mp3
1.70MB

노랫말을 따라 그려본다. 오월의 꽃향기 덕수궁과 서울시립미술관, 눈 덮인 정동교회, 이화학당 심슨기념관, 서글픈 아관파천의 흔적, 하물며 지금은 없는 한양도성과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을 인왕산과 연결하였다. 어서 다시 의(義)를 높힐 수 있기를 바라면서....
https://youtu.be/mezYFe9DLRk

<광화문 연가> 노랫말
이제 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던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 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따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 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따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ㅡㅡㅡㅡㅡ
노래따라 그림따라 걷는 추억과 역사의 현장
덕수궁 - 서울시립미술관 - 정동극장 - 정동제일교회 - 중명전 -구 러시아 공사관 터 - 이화학당ㆍ심슨기념관 - 경향신문사 - 돈의문터 - 경교장(강북삼성병원) - 홍난파가옥과 월암공원 - 딜큐사ㆍ테일러 가옥 - 인왕산 한양도성 곡장과 성곽길 정상

개화기 당시 한성부, 덕수궁 주변 - 오른쪽 하단의 황단(皇壇)이 대한제국 선포 뒤 하늘에 제사드리는 환구단이다.


스크랩1>

망국의  덕수궁과 석조전.
서울 중구 정동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이 있습니다. 덕수궁 안에는 최초의 서양식 석조 건물이 있는데요. 최근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는 가상현실(VR) 영상으로 제작한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을 내년 1월까지 홈페이지에 공개한다고 밝혔어요. 석조전은 서울 덕수궁 안에 대한제국 황제와 황후의 생활 공간을 만들어 놓은 서양식 궁전입니다. 비운의 한국 근현대사가 농축된 장소이기도 하죠.
◇한양 한복판에 지은 서양식 건물
1896년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은 1년 만에 돌아옵니다. 일본군이 점령한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을 정궁(정식 궁궐)으로 삼고, 대한제국을 선포해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지요. 이해인 1897년에 설계를 시작한 덕수궁 안의 전각이 석조전이었습니다. 영국인 재정고문 존 맥리비 브라운이 발의해 13년 동안 건물을 짓게 됩니다. 자신이 살 서양식 궁전을 건설했다는 데서 고종의 근대화 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어요.
설계를 맡은 사람은 영국인 건축기사 존 레지널드 하딩이었어요. 하딩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그리스 풍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석조전을 설계했죠. 여기에 유럽의 식민지였던 동남아 지역의 기후에 맞춰 베란다를 설치했죠.
지층을 포함해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의 장대한 규모였죠. 석조전은 조선의 궁궐이 왕의 침소와 업무 공간으로 분리됐던 것과 달리 두 기능을 통합했습니다. 1층엔 접견실과 홀, 2층엔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거실이 있었어요.
◇궁궐 완성 석 달 전 나라는 망하고
1910년 12월 1일 석조전이 완공됐습니다. 그러나 ‘황제와 황후’는 이곳으로 들어와 생활할 수 없었습니다. 석조전이 완공되기 석 달 전인 8월 29일 일본과 강제병합되면서 나라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황후도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대한제국이 건립된 해에 설계를 시작한 궁궐이 그 대한제국이 멸망한 해에 완공된 것입니다.
1907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뒤로 덕수궁을 거처로 삼고 있던 고종은 “서양식으로 생활하려니 영 불편하다”며 입주하지 않았어요. 고종 입장에선 자신의 근대화 노력이 좌절된 상징으로 보였을지도 몰라요.
석조전에는 정식 이름이 붙지 않았어요. 조선 시대 궁궐의 전각 이름에는 깊은 속뜻이 있습니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에 ‘부지런히 정치함’, 덕수궁의 중화전(中和殿)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란 의미가 있죠. 하지만 석조전은 그냥 ‘돌로 지은 건물’이란 뜻입니다.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던 우리 전통 건축물과 다르다는 의미가 그대로 건물 이름으로 굳어진 셈이죠.
◇좌절된 근대화, 망국, 그리고 분단
이후 석조전은 귀빈 접대나 만찬을 여는 건물로 가끔 사용됐고,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잠시 고국에 올 때마다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1922년 5월 11일 이곳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어요. 영친왕과 일본인 왕비 사이에서 난 장남이자 왕실의 후계자였던 이진이 생후 9개월도 되지 않아 이곳에서 갑작스럽게 구토를 하고 열이 오른 끝에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1930년대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석조전 옆에 새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서관(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지어 이왕가미술관을 만들었고, 원래 석조전에는 일본 미술품들을 전시했습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가 석조전에서 열렸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반도 문제 해결을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신탁통치 문제로 의견 대립을 보인 끝에 1947년 결렬됐습니다. 좌절된 근대화와 망국(亡國)의 한을 품은 장소에 이번엔 분단의 아픔이 더해진 셈이죠. 이후 국립박물관과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되던 석조전은 2014년 복원 공사를 마치고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스크랩2> 한국최초의 감리교회 정동제일교회

서울정동 감리교회

1884년 여름, 조선을 방문한 맥클레이(Mcclay,R.S.)는 고종으로부터 선교 윤허를 받았다. 당시 맥클레이는 일본에 체류 당시 친분을 맺었던 김옥균(金玉均), 미국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Foote,L.H.)와 동반하여 고종에게 선교의 뜻을 전하였다. 고종은 병원과 학교를 먼저 개설하고 점차 선교할 것을 권하였다.
한편, 1884년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甲申政變)에서 왕실의 외척 민영익(閔泳翊)이 개화당의 습격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이때 선교사 알렌(Allen,H.N)이 그를 치료하였는데, 이 일로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한 왕실의 신임이 커졌다. 조선 선교를 위하여 선교사 파송을 염두에 두고 있던 감리교와 장로교에서는 각각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보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를 통하여 조선에 첫 발을 디뎠다. 당시 언더우드는 서울에 입성하여 제중원 교사로 활동을 시작한 반면, 아펜젤러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인천에 머물다 1885년 4월 13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6월 20일, 아펜젤러는 다시 한국을 찾았고 인천에 머무르다가 6월 28일 외국인을 위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예배를 인도하였다. 최초로 풍금을 들여와 찬송과 예배를 봉헌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889년 서울에 선교의 터를 구축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곧 인천 선교에 착수하여 청국 조계 내에 초가집 2채를 구입하여 감리교 서점을 열었다. 하지만 청국 조계가 조선인 거류지와 거리가 떨어져 있는 관계로 전도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1년 6월 아펜젤러가 인천 지역 선교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했는데, 주말마다 말을 타고 인천에 와서 전도를 하면서 예배당의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35.6㎡(10.8평)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바닥에 마루를 깔고 외벽에 석회를 발랐으며 두 개의 방을 둔 이 예배당은 비록 작은 규모였지만 기존 건물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위해 새롭게 건축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교인이 점차 증가하면서 1901년 내동에 웨슬리 예배당을 새롭게 건립하였다. 1955년 웨슬리 예배당이 멸실되자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예배당 건립이 진행하었고 화재와 철거 등을 반복하다가 1985년 창립 100주년 기념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2012년에 옛 웨슬리 예배당을 복원하였다.
정민교 기자 jmk2580@incheonnewspaper.com <저작권자 © 인천신문>

스크랩3> 구 러시아공사관 - 치욕의 아관파천 현장

사적 제253호. 지정면적 1,102㎡. 1885년 10월에 정동에 개설한 러시아공사관(당시 영사관)의 정식 건물을 짓기 위하여 1890년 8월 그 자리에 초석을 놓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장소, 즉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피신하여 있던 곳인데, 파천중 친일 김홍집(金弘集)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徐載弼) 주재의 독립협회가 결성되는 등 역사적으로 다난한 시대의 증인이 된 건물이다. 건물은 6·25사변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탑옥부분만 남아 있다. 구조는 벽돌조 2층으로 한쪽에 탑옥이 있으며, 양식은 사면에 무지개모양의 2연창(連窓)과 요소에 박공머리를 두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원형이 대부분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의를 감안하여 1977년 9월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서

구, 러시아 공사관

* 아관파천(俄館播遷): 친러 세력에 의하여 고종 임금이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으로,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함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1895년의 이듬해인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고종 임금이 피신하여 국정을 수행하며 대한제국 건설을 구상하였던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곳이다. 1890년(고종 27)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립되었지만,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탑 부분만 남은 상태다.
이곳에서 고종 임금은 친위 기병대를 설치하는 안건(1896.6.8.)과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1896.8.5.)을 반포하였으며, 민영환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임명(1897.1.11.)하여 영국ㆍ독일ㆍ러시아 등 각국에 외교 사절로 머물게 하는 등 일본을 비롯한 열강으로부터 주권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환구와 사직 등에 지내는 향사(享祀, 제사)를 모두 옛 역서(曆書)의 예대로 거행하도록 조령(1896.7.24.)을 내리는 등 천자의 독립된 나라임을 알리기 위한 준비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 결과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환궁(1897.2.20.)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환구단을 건축하고 환구 의례를 거행한 후 황제로 즉위하여 대한제국을 선포(1897.10.12.)하기에 이르렀다.
* 환구단은 문화재 지정 시 문화재위원회에서 한글 표기는 고종 황제가 제사를 지낸 1897년 10월 12일 자 ‘독립신문’ 기록에 따라 ‘환구단’으로,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전하는 바와 같이 圜丘壇으로 하기로 함

심슨기념관


돈의문과 인왕산

서울 사대문 중에서 지금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만 없다. 정도전은 인의예지를 숭상하여 사대문의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의(義)를 높여야 할 문이 허물어지고 없어서인가 오늘날 곳곳에서 불의가 횡행하고 있다. 그것도 사회의 지도층에서부터.
'견리사의(見利思義)'라 했건만 '견리선취(見利先取)'에 바쁘다.
돈의문을 복원하고 싶은 마음에 그림으로 그렸다.

경교장 ㅡ 경향신문사 길건너에 돈의문터가 있고 골목길 안으로 강북성심병원이 있다. 입구 오른편에 김구선생님이 귀국하셔서 집무하셨던 경교장이 있다.

홍난파가옥

월암공원

테일러 가옥ㆍ딜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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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알린 테일러 가옥 '딜쿠샤' 개관…예약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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