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는 서촌 골목길 인문학 산책, 올해는 특별히 경북의 ○○교육연구회 선생님들을 안내하며 다시 걸었다.
전전날에는 사전답사를 겸하여 아내와 함께 또 걸었다.
경복궁 고궁박물관 고궁뜨락카페에서 출발하여 사직단, 손호연 시인의 집, 구본웅 집터, 이상범 가옥, 천경자 집터, 이상의 집, 대오서점, 박노수 미술관, 이중섭 집터, 윤동주 하숙집, 수성동 계곡, 인왕산자락길,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순으로 진행되었다.
■ 세종마을 (Sejong Village)
서촌을 세종마을이라고 한다.
세종마을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청운동, 효자동과사직동 일부지역을 지칭하는데,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으로는 북부 '준수방, '순화방', '의통방'에 속하였고 '웃대' 라고도 불렀다.
1397년 5월 15일, 이곳 '준수방 장의동 본궁'에서 세종대왕이 태어 나셨기에 이 마을 주민들이 2010년부터 '세종마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영조대왕의 잠저인 '창의궁'이 이곳에 있었고 자수궁, 수성궁, 인경궁 등 왕족들의 터전이 산재해 있는가하면 경화사족의 세거지였고, 위항문학의 산실 또한 이곳 인왕산 자락이었다. 겸재 정선과 송강 정철이 여기서 태어나 불후의 명작을 남겼고, 추사 김정희, 청전 이상범, 이상, 구본웅, 이중섭, 윤동주, 박노수, 노천명, 이광수, 천경자 등이 거주하면서 문화예술의 혼을 이어갔다. 현재 600여 채의 한옥과 옛 골목들이 현대와 공존하는 서울의 명소이다.
■ 사직단(Sajikdan Altar)
이곳은 조선시대에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시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곳이다. 태조는 한양에 천도한 후 경복궁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사직단을 배치하는 원칙에 따라, 태조 4년(1395)에 사직단을 현재 위치에 건립하였다.
현재 사면으로 둘러싸인 두 겹의 담장 안에 사직단이
놓여있다. 낮은 담장의 동서남북 네 곳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는데 이 문(신문)을 통과하면 담을 드나드는 문(유문)이 각각 나있다. 이 문 안에 1m 높이로 쌓은 직사각형의 두 개의 단이 동서로 자리잡고 있다. 동쪽은 사단이며, 서쪽은 직단이다.
사직은 종묘와 함께 국가를 의미하므로 이를 줄여서 종사宗社)라고 한다. 따라서 나라의 형편을 흔히 “사직이 평안하다"라든가 “사직이 위태롭다”라고 하며, 국가의 중요한 인물을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고 하였다.
+ 숫자로 읽는 사직단 이야기 - https://munchon.tistory.com/m/1227
■ 필운대(弼雲臺)
필운대는 배화여고 뒷정원에는 높다란 암벽이 있는데 그 왼쪽면에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를 세로로 새기고, 가운데에는 몇줄의 싯구를 적어 놓았으며, 오른쪽으로는 아홉 사람의 이름을 나열해 놓았다.
필운은 이곳에 살았었던 이항복 선생의 호이다. 선생은 조선 선조 때에 병조판서, 대제학을 지내었으며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 청백리에 뽑히기도 하였다. 가운데의 글은 선생의 후손인 이유원이 이 터에 들른 후 그 느낌을 글로 지어 새긴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명단은 선생의 집을 지을 때 관련되었던 사람들로 추측되고 있다.
이유원의 글은 고종 10년(1889)에 새긴 것으로, ‘필운대’라는 글씨 또한 이항복의 글씨라기보다는 이유원의 글씨로 추측된다. 오른쪽의 명단은 이보다 앞선 순조 13년(1813) 또는 고종 10년(1873)에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시대는 내려가지만 명필이었던 이유원의 서체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항복 선생의 옛 자취를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인왕산=필운산(弼雲山)
인왕산(仁王山)의 다른 이름은 필운산(弼雲山)이다.
1537년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황태자의 탄생 소식을 전하려 한양에 오자, 중종(中宗)이 그를 경복궁 경회루에 초대한 잔치 자리에서 북쪽에 솟은 백악산(북악산)과 서쪽의 인왕산을 가리키면서 새로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손님에게 산이나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는 것은 최고의 대접이라고 하였다.
한양 주산(主山)의 이름의 청을 받은 명나라 사신은 도성을 북쪽에서 떠받치고 있는 백악산을 “공극산(拱極山)”이라 이름 짓고,
경복궁 오른쪽에 있는 인왕산은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지었다.
필운산의 뜻은 “우필운룡(右弼雲龍)”이라 하여 운룡(雲龍-구름위로 나는 용)은 임금의 상징이니 인왕산이 '임금을 우측에서 돕고 보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 초부터 불리어 온 인왕산이나 북악(백악)의 이름 때문에 공용경이 지은 이름들은 지금까지 쓰이지 않았다.
○ 권율의 사위, 필운 이항복과 이항복의 후손, 우당 이회영 6형제
더읽기>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0269.html
+ 오성과 한음의 우정
+ 이항복의 해학
■ 손호연ㆍ이승신 모녀 시인의 집
(孫戶妍. 李承信)
종로구 필운동 90, 'SOHO'는 어머니 손호연 시인과 장녀 이승신 시인이 1958년부터 시를 지어 온 세계 유일의 모녀시인의 공간이다.
손호연 시인은 2005년 한·일 정상회담 때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 단가를 읊어 화제가 됐다. 이 단가의 작가가 바로 손호연이다. 당시 고이즈미는 “손 가인(歌人, 短歌 시인을 이르는 말)이 노래한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없는 나라와 나라 되어라'
ㅡ 손호연
삶에 나라에 어찌 꽃피는 봄날만이 있으랴 . ㅡ 이승신
○ 시인, 손호연 (1923-2003)
한국 유일의 단가(短歌) 시인으로, 31음절 시에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여 일본에서 단가의 대가로 인정받아 왔다. ‘일본 열도를 울린 무궁화 노래’ ‘현해탄에 걸친 단가의 구름다리’ 등으로 불리며, 국경을 뛰어넘는 인류 보편의 사랑과 평화를 일깨워 왔다. 단가의 권위자인 나까니시 스스무 교토예술대 총장은 “일본인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감성으로 지은 손호연의 노래는 어느 언어로 되어 있든지 감동을 준다. 그의 노래는 시대와 동북아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한다”고 평했고 일본 매스컴에서는 “손호연의 한 줄의 시에는 장편 소설이 들어 있다”고 했다.
1998년, 일본 천왕이 지은 단가를 직접 낭송하는 궁중 가회시에 들어주는 배청인 자격으로 초청되었고, 한국과 일본 정부에서 각기 문화상을 받았다.
2005년 청와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수상이 연설 중에 손호연의 단가를 읊고 그의 평화 정신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기타데 아키라에 의해 그의 전기집 《풍설의 가인 - 손호연의 반세기》와 《다툼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가 출간되었고 일본 아오모리현 록까쇼무라에 손호연의 시비가 있다.
63년간 2,000수 이상의 단가를 지었고 일본 출판사 고단샤에서 《호연가집》과 《무궁화》란 제목의 단가집 6권이 출간되었다.
○ 시인 이승신
손호연 시인의 장녀로 손호연 기념사업회와 손호연 단가연구소 대표이며 서울 필운동 시인의 집 한옥 터에 복합예술공간 ‘THE SOHO’를 세웠다.
2002년 《찔레꽃 뾰족한 가시 위에 내리는 눈은 찔리지 않으려고 사뿐히 내리네》를 기획 번역해 한국 독자에게 시인을 처음 알렸다. 2005년 손호연 TV 다큐멘터리 기획 방영, 2006년 《Son Hoyun Poems and Pictures》 시화집을 3국 언어로 출간했으며 ‘손호연 평화의 밤’을 한국, 일본, 미국에 개최해오고 있다. 2008년, 시인의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다양한 예술 형태로 알리는 등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외무성의 일한 문화교류상을 수상했다.
이화여대 영문과, 워싱턴 조지타운 대학원 사회언어학, 뉴욕 시라큐스 대학원 TV 방송학 전공으로 워싱턴 WBN-TV 방송국장과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귀국 후 한국 방송위원회 국제협력위원, 제일기획 고문, 삼성영상사업단 고문을 지냈고 TV 다큐멘터리들을 기획 제작해 왔다.
수필집 《거꾸로 도는 시계》, 번역집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보내는 편지》 《헤밍웨이 서간집》등 다수가 있다. 2008년 11월에 시집 《치유와 깨우침의 여정에서》가 출간된다.
○손호연 단가집, 이승신 번역
☞ 이 책에 담긴 시 한편!
〈러브 레터〉ㅡ 손호연
하늘나라
어느 역에 내려야
그대 계신 곳 찾을 수 있을까
하늘나라 은하수 거리
그대 앞으로 부치려고
써놓은 편지
같이 살 때는 쓰지 않았네
그대 만날 수 없는 이제
써서 부치고 싶은 러브레터
향기로운 계절에
오는 편지는
다 연서와 같아 정겨워지네
감나무 잎사귀 앞뒤로
빼곡히 써내려간
가을마다 오는 그대의 편지
열어보지 않아도
또 써보는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이 제야의 밤 다시 쓰네.
+더읽기
https://www.joongang.co.kr/article/1622412#home
http://www.leesunshine.com/bbs/board.php?bo_table=Media&wr_id=28&page=7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1/02/2014010200153.html
■ 구본웅 가옥
누하동 238-3번지
또는, 時雨식당 맞은편 (구글지도에서)
“처음 우리 가족은 서울 중구 다동 72번지(현재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 옆 건물)에 살다가 1943년인가 44년 무렵, 일제가 소개령을 내려 수원으로 이사를 갔었어요. 수원 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저랑 동생들이 있었고 아버지는 청수동(지금의 원효로 수창동)에 따로 사셨고 작업실은 신갈에 있었어요. 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형(구환모)과 누나(구원모)를 위해 누하동(238-3번지)에 집을 마련했어요. 가족들이 그렇게 흩어져 살았어요.
어쨌든 본가인 수원 집에 아버지의 대작 그림들이 사랑채 마루방에 꽉 차 있었어요. 그림을 켜켜이 쌓아둔 높이가 초등학교 졸업생이던 제 키보다 컸으니까요. 그런데 6·25 때 폭격을 맞아 흔적도 없이 불 타 버렸습니다.” (구상모)
구본웅의 그림 중 친구 이상을 그린 〈우인상〉은 한국 야수파의 대명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그림 속 이상은 파이프를 물고 있다. 파이프와 코 주변이 강렬한 흰색이다. 입술은 피를 흘린 듯 빨갛고 파이프 속 담배도 붉다. 눈가도 붉다. 푸르스름한 모자와 남루한 옷차림은 어두운 채색이다. 그러니 괴팍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붓놀림이 강력하지만 의도적으로 지저분하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청년의 초상과 같다.
삽화가 이승만이 그린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과 구본웅.
“<우인상>은 좀 사연이 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쯤(1952년 12월 무렵) 당신은 서울 인현동(충무로~퇴계로 사이)에 사셨어요. 그때 저는 피란 갔다가 돌아와 전시(戰時) 연합학교인 수원종합학교엘 다녔어요. 할머니(변동숙)랑 도강증을 끊어 서울 인현동 집에 갔는데 그때 아버지는 이미 거동을 못하는 상태셨어요. 누워만 계셨죠.
얼마 후 할아버지(구자혁)가 올라오셨는데 아버지 상태를 보시곤 ‘누하동 집으로 옮겨라’고 하셨어요. 누하동 집은 저희 형제들의 학업을 위해 마련한 집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또 ‘아버지 그림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인현동 집 창고에서 먼지 가득한 그림을 지게로 옮겨 왔는데 그중에 〈우인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953년 2월 2일 영면하셨죠. 아버지는 <우인상>을 좋아하셨나 봐요. 그래서 항상 가지고 다니셨나 봅니다.”
“저 그림에 〈우인상〉이란 이름을 붙인 분은 아버지와 가까우셨던 원로 화가 이마동(李馬銅·1906~1981) 선생이에요. 그분이 그림 속 이상의 얼굴을 알아보시고 ‘우인상이면 어떤가?’ 하셔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거죠. 저는 이상을 생전에 본 적 없으니 그림 속 청년이 누군지 알 수 없었죠. 그러다 이어령 선생이 《문학사상》을 창간하고 〈우인상〉이 알려지면서 그렇게 이름이 굳은 겁니다.”(구순모)
따지고 보면 구본웅은 친구 이상(김해경)을 이모부라고 불러야 한다.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동생이 변동림이고, 변동림이 이상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더읽기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805100036
■ 청전 이상범 가옥
서화미술회강습소에서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서 서화를 배웠다. 1921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상으로 작가활동을 시작한 청전은 1942년부터 1972년 작고할 때까지 이 주택에서 살았다. 청전의 작품활동 완성기가 1946년 부터이니 누하동주택은 온전하게 청전의 삶과함께 한 집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배렴과 박노수 등이 배출되었고, '청전양식'이라 불리는 작품세계도 완성되었다. 이 주택은 'ㄱ'자 안채와 '一'자 행랑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근대 도시한옥의구성을 갖고 있지만, 도시한옥에서는 드물게 부엌에 찬마루를 갖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이상범은 이웃한 청전화숙에서 주로 그림을 그리고, 주택에서는 가족의 생활공간과 사회적 활동공간을 구분하여 자신은 대청 건넌방을 행랑채와 함께 사랑공간으로 사용했다. 행랑채 끝 방을 사용한 청전은 자신의방을 중심으로 대문칸에 면한 방과 대청에 면한 건넌방을 각각 남, 여 손님용 응접실로 사용하였고,이 방에서 이웃한 화실로 직접 드나들었다.
청전 이상범 가옥 안채
■ 천경자 집터
천경자는 누하동에 살던 1959년부터 3년간은 가장 여유로운 감성이 흐르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자리를 잡지 못하다 처음 자신의 집을 가지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기 때문이다. ‘서촌 시대’를 기점으로 그의 그림은 낭만적인 화풍을 띠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ㅡ 동아일보
○ 천경자와 뱀
천경자가 자주 뱀을 그리게 된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본래 그의 집안은 부유했는데, 유학 중 몰락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귀국하게 된다. 좋은 집에서도 밀려나 어머니와 함께 동생들과 외진 곳에서 셋방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에 아침저녁으로 뱀들이 자주 출몰하여 집안 곳곳에 득실거렸다고 한다.
징그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데 새로 집을 구할 여력이 없어 이사를 가지도 못하였다. 천경자는 그런 피할 수 없었던 절절한 가난을 잊을 수 없어 뱀을 그렸다고 한다. 또한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우한 일들을 맞닥뜨리며, 여성으로서 힘들었던 절절한 운명의 정서를 이입해 그렸을 것이다.
○ 천경자의 누하동 집터
'생태'를 발표한 이후 화가로서 성공하자 1954년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새로운 한국화를 모색해 나간다. 점차 경제적으로도 자립이 되어 서울 서촌 지역에 자리 잡고, 작품 세계도 자전적인 삶을 모티브로 한 여인상들을 감성적인 필치로 제작하여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확립해간다.
화가 천경자를 말할 때 미술 애호가들은 보통 '옥인동에 살던 천경자'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만큼 옥인동 지역은 천경자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천경자가 옥인동에 터를 잡고 산 것은 실제 9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터를 잡게 되는 중요한 시기를 주로 서촌의 '옥인동'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천경자'와 '옥인동'이 자주 붙어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천경자가 살았던 집은 옥인동이라기보다는 실제는 '누하동'이다. 여러 집을 옮겨 다녔지만 오래 정착한 곳은 누하동이다. 당시 누하동, 필운동 등 옥인동 지역은 보통 통칭해서 '옥인동'이라 부르기도 하고 간단히 '옥동(玉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주소로는 '누하동 176번지', 이상범이 살던 집 바로 이웃이었다. 그래서 많은 애호가들이 여전히 '옥인동에 살던 천경자'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천경자에게 있어 옥인동은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천경자는 이집에서 1962년부터 1970년까지 9년간 살고 서교동으로 이사 간다.
+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07/01/IJBVEVLAPVHITOCBG36BO6OCOY/
■ 이상 집터
(Site of Yi Sang's House)
통인동 154-10에 천재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1910~1937)이 살던 집이 있는데 문화유산 국민신탁에서 이 집을 매입하여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직동에서 태어난 이상이 큰 아버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가던 세살때부터(1912년) 1933년 까지 초·중·고교를 여기서 다니고, 총독부의 건축과 기사로 근무할 때까지 스물 두해를 살았던 곳이다. 본명은 김해경이다.
이곳에서 1930년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발표하고,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자화상」을 출품해 입선했으며, 1932년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했다. 이때 처음으로 필명 '이상'을사용했다.
1933년 종로에 제비다방을 개업하고 1934년에 이르러 구인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이상의 집은 일제 강점기의 천재 시인이자 화가, 건축가인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이 20년 넘게 살았던 집터의 일부에 만들어진 문화공간이다.
소생이 없던 큰아버지 김연필이 두 돌이 지난 이상을 데려와 20년 넘게 이곳에서 키우고 공부를 시켰다.
300평에 달했던 김연필의 집 통인동 154번지는 이후 여러 필지로 나뉘어 팔리고, 154-10번지에 남은 건물도 헐리게 될 위기에 처했던 것을 지역 사회에서 지켜냈다.
근대문화재로 등록됐다가 취소되는 우여곡절을 거쳐 문화유산국민신탁이 2009년 매입해 이듬해 문화공간으로 문을 열었다.
근대문화재 등록이 취소된 건 이 집이 이상이 사망한 뒤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어서다.
시인이 실제 살았던 집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그 대신 이상의 작품과 자료를 한데 모으고, 작품 속 공간을 형상화한 구조물을 설치해 그의 작품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도록 했다.
오랫동안 내부수리 중으로 닫혀있던 이상의 집이 드디어 열렸다.
+ 오감도, 이상의 집 - https://munchon.tistory.com/m/1219
■ 통의동 한옥마을
(Tongui-dong Hanok Village)
현재 세종마을에는 한옥 600여동이 남아 있으며 그중 통의동 지역의 한옥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특히,아름다움이 묻어 나오는 통의동 뒷 골목은 종로600년미로미로(美路迷路)의 가치와 매력을 느낄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 대오서점 ㅡ 서점앞 안내문
새 책이 귀하던 시절, 대오서점은 참고서나 교과서 등 헌 책을 사고 팔던 곳이었습니다. 조대식 할아버지는 1951년부터 이 자리에서 헌 책과 고물을 사고 팔며 50여년을 지내셨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도 사라지게 되고 책방 운영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점을 정리하려 하였으나 가게 이름에 담긴 추억(할아버지 성함 조대식과 할머니 성함 권오남으로 지어진 책방이름)을 간직하고 싶어하신 할머니의 고집으로 가게의 일부를 지금까지 지켜오게 되었습니다.
현재 대오서점 자리는 전시회, 공연 등 문화 공간과 카페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 사랑으로 지켜오는 대오서점 - https://munchon.tistory.com/m/1221
■ 통인시장
■ 구립 박노수미술관
(Jongno Pak No-soo Art Museum)
한국 화단의 거장 남정 박노수 화백의 기증 작품과소장품을 전시한 종로 최초의 구립 미술관으로 2013년 9월 개관하였다.
박노수 화백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운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 독자적인 新화풍을 구축하여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해 낸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 이다.
미술관은 박노수 화백이 40여년간 거주하였던 곳으로 1937년경 건축가 박길룡에 의해 지어졌다. 한·양 절충식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1층은 온돌과 마루, 2층은 마루방구조이며 3개의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다. 박노수 화백 거주 후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1991년)로 등록되어 잘 보존되어 왔으며, 박화백의 격조 높은 미술작품은 물론, 조형미가 돋보이는 가옥과 다양한 수목, 작가가 직접 도안한 석물, 수집한정원석, 수석 등 다양한 볼거리를 가지고 있다.
[문화유산] 예술가의 옛집 스크랩
◇ 친일파의 문화주택에서,
박노수 미술관으로
남정 박노수(1927∼2013) 화백이 40년 가까이 살던 집이다.
박 화백이 1973년부터 2011년 말까지 거주했고, 말년에 미술관 설립을 위해 종로구에 기증했다.
2013년 2월 박 화백이 타계하고 같은 해 9월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으로 문을 열었다.
고만고만한 빌라와 주택이 대부분인 옥인동에서 이 집은 단연 눈에 띈다.
1층은 벽돌조, 2층은 외벽을 흰색으로 칠한 목조 건물로 붉은 창틀과 서까래가 도드라지고, 박공지붕에는 굴뚝이 여러 개 솟아있다.
건물 입구에는 아치형 포치가, 현관 옆 응접실과 2층 방에는 벽난로가 설치돼 있고, 음식을 만드는 주방과 밥을 먹는 식당이 분리돼 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서구식 주택의 구조와 외관을 따라 지은 이른바 문화주택이다.
온돌방 등 한식과 서구식이 주로 섞였지만, 중국이나 일본풍도 엿보인다.
이 흔치 않은 집을 지은 건 친일파 윤덕영(1873∼1940)이다.
경술국치 당시 조카인 순정효황후 윤씨(순종의 계후)가 치마폭에 감추고 있던 옥새를 빼앗은 인물이다.
일제의 작위를 받은 그는 옥인동 일대의 땅을 사들이고, 인왕산 중턱에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던 서구식 저택 '벽수산장'을 지었다.
그 주변으로 일가들을 위해 여러 채의 집을 지었고 그중 하나가 딸을 위해 지은 이 집이다.
집은 이후 오랜 세월 몇 차례 주인이 바뀌며 풍파를 겪었다.
박 화백은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를 회고하며 "폐허와 같았다"고 했다 한다.
이후 마당에 돌과 나무, 석등과 향로석, 돌확 등을 들여놓고 날마다 하루 두 시간씩 손수 가꾸어 '친일파의 집'을 지우고 '박노수 가옥'으로 만들었다.
집 뒤로는 자귀나무와 대나무, 앵두나무, 산수유나무가 무성한 작은 동산이 있고, 박공지붕 너머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도 설치돼 있다.
■ 윤동주 하숙집
+ 윤동주하숙집과 풀잎소녀 - https://munchon.tistory.com/m/1251
■ 이중섭 집터
1952년 부인과 아이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이중섭은 머물 곳을 찾아 배회하다 친구들의 부름에 서울로 갔다. 서촌 누상동에서 보낸 1954년 한 해는 그에게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는 전시를 열어 성공하면 일본에서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그림을 그렸고, 이즈음 ‘소’ 등을 전람회에 출품하곤 했다.
■ 수성동 계곡
(Suseongdong Valley)
서울시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속 경관을 복원한다는 목표로 수성동 계곡의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2010년 기념물 제31호(돌다리 1기, 수성동 계곡부 및 토지 9필지 10,097㎡)로 지정하여 2012년에 완공하였다.
수성동에 있었던 안평대군의 옛집을 '수성궁'이라고도 했는데, 조선시대소설 <운영전> 또는「
<수성궁 몽유록>의 무대 이기도하다.
"수성궁은안평대군의 옛집으로 장안성 서쪽 인왕산 아래에 있는지라, 산천이 수려하여 용이 서리고 범이 일어나 앉은 듯 하며, 사직이 그 남에 있고 경복궁이 그 동에 있었다. 인왕산의 산맥이 굽이쳐 내려오다가 수성궁에 이르러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고, 비록 험준하지는 아니하나 올라가 내려다보면 아니 뵈는 곳이 없는지라, 사면으로 통한 길과 천문만호가 하늘의 별과 같아서 번화장려함이 이루 형용치 못할 것이요, 동쪽을 바라보면 궁궐이 아득하여 구름 사이에 은영하고 상서의 구름과 맑은 안개가 항상 둘러 있어 아침 저녁으로 고운 자태를 자랑하니 짐짓 이른바 별유천지 승지였다."
-고소설「운영전」중에서
+인왕추색 수성동도 재구성 - https://munchon.tistory.com/m/1233
■ 인왕산 숲길
+ 인왕산 숲길 이야기 - https://munchon.tistory.com/m/1039
■ 윤동주 문학관(Yun Dong-ju Literature Museum)
청운동 시인의 언덕 입구에 민족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金松)의 집에서 하숙하며 인왕산에 올라 시정(詩情)을 다듬었던 인연으로, 종로구는 용도폐기된 청운수도가압장을 리모델링하여 윤동주 문학관을 조성하고 2012년 7월 25일 문을 열었다. 세상사에 지쳐 타협하면서 비겁해지는 우리 영혼에 윤동주의 시는 아름다운 자극을 주고, 영혼의 물길을 정비해 새롭게 흐르도록 만든 윤동주 문학관은 우리 영혼의가압장이다.
윤동주문학관 위에 야외카페, '별뜨락'이 있다. 여기에서 차를 마시며 오늘의 인문학 산책, 뒤풀이 담소를 나누는 중에 때마침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리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짜여진 각본과도 같이, 파라솔 아래에서 다같이 우산을 펼치고 둥글게 하나되어 웃음꽃을 피웠다.
+ 윤동주 문학관 재구성 - https://munchon.tistory.com/m/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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