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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와 청계천

종로를 걷다. 종각 보신각

by 문촌수기 2024. 2. 29.

인사동의 한국미술관 전시, 서예를 감상하러 가는 길이었다. 종로의 종각, 청계천, 탑골공원을 들러서 다녀왔다.

■ 보신각(普信閣)

지정번호: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
시대:1396년(태조5)
소재지:서울 중로구 종로 54 (관철동,보신각)

이곳은 조선시대 도성의 문을 열고 닫는 시간과 화재와 같은 긴급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종을 쳐서 알렸던 터다. 1396년(태조5) 처음 설치한 종루는 옛 서울의 중심부인 지금의 인사동 위치에 있었으나 태종 때 현 위치로 옮겼다. 도성 문을 열 때 치는 종을 파루(罷漏, 또는 바라), 문을 닫을 때 치는 종을 인정(人定 또는 인경)이라 했는데, 파루는 불교의 33천(天)에 따라 33번, 인정은 별자리의 28수(숙, 宿)에 따라 28번을 쳤다. 세종 때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초대형 누각으로 지었으나 전란과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파괴와 재건을 거듭하면서 규모가 작아져 조선 후기에는 단층 전각이 되었다.
이 건물은 종고루, 종각, 인경전 등으로 불리있는데,1895년 고종이 보신각(普信閣)으로 명명하였다. 1979년 세종 때의 규모에 맞춰 새 건물을 지었으며, 현재 걸려있는 종은 1985년에 제작한 보신각 새 종이고 옛 보신각 동종 보물 제2호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 지하철 수준점

보신각 앞 지하철 수준점*
Subway Benchmark
   at Bosingak Pavilion
서울특별시 시도등록문화재

(*수준점(水準點)은 해발고도를 잴 때의 기초가 되는 점)

보신각 앞 지하철 수준점은 수도권 전철의 높이와 깊이의 기준이 되는 원점이다. 이 수준점을 기준으로 지하철 선로의 깊이와 터널의 높이, 역으로 쓰는 건물의 높이를 가늠하였다.
서울지하철 계획의 첫 작업은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기준이 될 수준점을 설정하는 것이었으며, 이 수준점을 기준으로 서울시 내지하철 공사를 위한 모든 측량 작업을 수행하였다.
보신각 울타리 안에 가로세로 25cm, 높이 20m의 화강암 수준점이 설치되어 있으며 수준점의 중앙에는 지름 7cm, 길이 12m의 놋쇠못이 박혀있는데, '수도권 고속전철 수준점. 1970.10.30.'이라는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1970년 10월 30일에 수준점을설치한 후 양택식 시장이 첫 측량에 나섰고, 측량 작업은 그해 11월30일까지 진행되었다.
이후 도로가 확장되면서 보신각이 현 위치로 이전되었고, 그에 따라 수준점도 이전되어 기준점의 역할은 상실되었다. 그러나 수준점은 여전히 보신각 구역 내에 있어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지하철 제1호선 사업의 시발점이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 황성신문사 터
皇城新聞址

종각역 5번출구 앞

 

황성신문은 지난 1898년 9월5일 창간됐으며 신문사 터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 출구 앞에 있다.

황성신문은 당시 국내외 정세를 반영해 외세 침입에 대한 항쟁의 기치와 국민의 지식을 높이자는 취지로 제작됐다.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을 비롯해 그 이후 생겨난 대부분의 신문이 한글로 제작됐던 반면 황성신문은 한자를 주로 사용해 한학 지식층이 많이 구독했다.

◈ 是日也放聲大哭 시일야방성대곡, 그 날을 소리높여 크게 곡하다(직역).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의 주필인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게재한 논설의 제목.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내용이다.

황성신문 원본

<해설>
지난번 伊藤(이등)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鼎足(정족)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 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聖意(성의)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大臣(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000년의 강토와 500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000만 生靈(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 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朴齊純(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參政(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否(부)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金淸陰(김청음)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鄭桐溪(정동계)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000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000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檀箕(단군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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