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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미술

대구 간송미술관, 여세동보

by 문촌수기 2024. 11. 28.

대구에서 개관한 간송미술관,
여세동보전을 감상하고 온다.
중부지방은 첫눈으로 폭설이 내려 설국이 되었지만, 여기는 쨍하니 차갑지만 늦가을 단풍 위로 구름과 하늘색이 아름답다.
‘여세동보(與世同寶)'란, “세상 함께 보배 삼아”라는 뜻이다. 이에 걸맞게 간송 컬렉션을 대표하는 국보와 보물 40건 97점이 총 출동했다. 간송미술관이 개최한 역대 전시 중 최대 규모의 국보와 보물이 출품되었다.
전시실은 4개의 전시실이고 실별로 차별화된 공간으로 꾸며졌다.
https://maps.app.goo.gl/zbZ7tK59BeEANDnK6

대구간송미술관 · 수성구, 대구광역시

www.google.com

(나중, 작품의 제목ㆍ설명 붙일 예정)

대구간송미술관

<간송의 방>

삼불암

스승과 벗
Mentor and Companions
“간송澗松”은 전형필 선생의 호(號)로 깊은 산속에서 흐르는 물 '간' 자와 소나무 '송松'자를 더해 만들었습니다. "간송"은 고미술의 가치를 일깨워 주고 문화보국(文化保國)의 길을 걷도록 가르침을 준 위창 오세창 선생 (葦滄吳世昌,1864-1953)이 지은 것입니다. 간송은 한국 미술사학의 초석을 다진 김원룡,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등과 교유하며 우리 문화 유산을 지키는 일에 힘썼습니다.

아락서실 亞樂書室

■ 아락서실 亞樂書室
간송이 혜곡 최순우藤谷 崔淳雨, 1916-1984의 서재 현액으로 써준 글씨다. 끝에는 '을미년 1955년 가을 나의 친구 혜곡이 꿈속에서 얻은 구절이다. '乙未秋吾友蕙谷夢中得此句. 澗松'이라는 글을 함께 적어, 혜곡이 꿈에서 보았다고 하는 버금 '아' 즐길 '락' 글 '서' 글자를 바탕으로 당호를 써주었다고 전해진다.

골동품 구입 노트북

■ 골동품 구입 노트북
1953년 8월부터 1959년 8월 28일까지 골동품의 구입과 관련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내용으로 구매 날짜, 금액, 이름과 함께 형태까지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노트는 한국 전쟁을 겪으며 여기저기 흩어진 소장품을 간송이 회수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당시 소장품이었던 귀중한 전적들이 불을 때기 위해 쓰이거나, 청계천 주변의 노점 혹은 고물상의 탁자에 놓이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제1전시실>
산수,풍속 등 다양한 장르의 회화와 조선 문예를 대변하는 전적(典籍)

삼정첩, 이정
과로도기, 김홍도

■과로도기 (果老倒騎)
김홍도. 조선18세기 후반
비단에 엷은 색, 134.6×56.6cm
ㅡㅡ
단원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는 신선 등이 등장하는 도석인물화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서는 창덕궁 벽에 붓을 휘몰아쳐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를 그린 일화가 전해질 정도이다. 김홍도가 그린 <과로도기>는 이러한 명성을 짐작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그림이다.
화면에는 나귀를 거꾸로 탄 장과張果가 등장한다. 당대唐代의 인물인 장과는 흰 나귀를 타고 하루에 수만 리를 갈 수 있었는데, 잠시 쉴 때는 나귀를 접어 상자나 호리병에 넣어 두었다고 한다.
이 화면에서 장과는 장생의 비결이 적혔을 법한 서책을 든 채 어느 구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인간미 있는 얼굴은 섬세하게 그린 것에 반해 큰 붓의 속도감이 드러나는 옷자락 표현은 얼굴과 대조를 이루며 그림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안장과 고삐를 갖춘 나귀는 장과가 쉴 때 자신이 들어가야 하는 호리병까지 머리에 멋스럽게 이고 있다. 녹색과 적색의 대비로 안장과 다래, 인물의 복식 을 그린 방식에서 김홍도가 여타의 신선도에 비해 공들인 사실을 알 수 있다. 중 국의 장과 그림이 비인격성을 강조해 기괴하게 표현되는 것과는 달리 김홍도의 작품은 마치 풍속화의 인물들처럼 친근하고 정감 어린 모습이다. 장과나 팔선八仙이 등장하는 도석인물화는 복을 부르고 장수를 축원하는 의미로 19세기까지 유행하였다. 그림 왼쪽에는 강세황姜世晃와 정안복의 화평이 있어 당시의 평가와 반응을 알 수 있다.
- 이랑
표암 강세황 평어

과果라는 늙은이 종이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손에는 한 권 책을 들 었는데, 눈빛이 글줄 사이로 곧게 쏟아진다. 이는 사능士能에게 가장 득의작得意作이라 할 수 있으니 중화에서 그것을 구한다해도 쉽게 얻을 수는 없으리라.
표암이 평한다.
果老倒跨紙驢, 手持一卷書, 目光直射行墨間, 目光直射行墨間、 此最為士能得意作, 求之中華, 亦不可易得, 豹菴評

석초 정안복 제사
손안의 신결神訣은 곧 『명리정종命理正宗(사람의 운명을 기록해 놓은 예언서)』 일터인데, 어떻게 하면 내 말년 신수를 물을 수 있을까.
석초 정안복이 쓰다.
手裏神訣,乃命理正宗,何由叩我暮境契潤、石樵題

• 참고문헌
장진성, [단원 김홍도 :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사회평론아카데미, 2020.
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
한국민족미술연구소, [간송문화] 77호, 2009.

참고) 장과로(張果老)
장과로(張果老)는 당(唐)나라 사람으로 둔갑술에 능하고 흰 노새를 타고 다녔으며 노새를 타지 않을 때는 종이처럼 접어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대나무통 비슷한 어고(魚鼓)나 불사조의 깃털과 불로장생의 복숭아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장과로는 신혼부부에게 아이를 가져다준다고 전하여 신방(新房)에 이러한 장과로의 그림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마상청앵, 김홍도

풍속화는 물론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을 비롯해 산수, 인물, 화조, 불화佛畵 등 여러 화목에 뛰어났던 김홍도는 화원으로서의 유명세로 인하여, 글씨에 능했던 문인 소양의 화가였다는 사실은 덜 알려진 듯하다. 선비를 주인공으로 한 사인土人 풍속화를 대표하는 <마상청앵>은 자연과 교감하는 인물을 서정적으로 담아낸 걸작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나귀 탄 선비는 길을 가던 중 문득 고개를 들어 버드나무 가지에 앉은 노란 꾀꼬리 한 쌍을 바라본다. 노래 잘하는 새로 알려진 꾀꼬리는 암수가 만나는 봄철에 소리가 특히 아름다운데, 상단의 시에는 생황 소리 같은 꾀꼬리가 베틀의 북처럼 오가며 봄비로 된 베를 짠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넓은 여백에 부분적으로 가해진 청록색으로 들뜬 봄의 분위기를 만들고, 여타의 번잡한 요소없이 인물의 생생한 표정과 내면 정서에 집중했다. 이 그림은 문인화가 지닌 함축과 시적 정취, 풍속화의 생생함을 모두 담아낸 김홍도 말년의 최상위 경지를 보여준다.
그림 상단의 시는 동료 화원인 이인문李寅文(1745-1824)이 지은 것이며 글씨는 홍도가 직접 썼다. 평소 김홍도의 작은 행서行書 글씨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 여린 풀에 작은 새 그림 같다."라 했던 홍길주洪吉께의 말처럼 그림과 한 몸인 조화롭다. - 이랑

아리따운 사람이 꽃 밑에서 천가지 소리로 생황을 부는 듯하고,
시인의 술동이 앞에 황금귤 한 쌍이 놓인 듯하다.
어지러운 금북(북은 베짜는 도구)이 버드나무 언덕 누비니,
아지랑이 비 섞어 봄강을 짜낸다.
ㆍㆍㆍ
기성유수고송관도인 이문욱(이인문)이 증하다.
단원이 그리다.
佳人花底簧千舌
韻士樽前柑一雙
歷亂金梭楊柳岸
惹烟和雨織春江

碁聲流水古松館道人
李文郁證,權園寫、

• 참고문헌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문화』97호, 2018.
오주석, '단원 김홍도: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화가, 열화당, 1998.
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

여산초당, 정선

여산초당
여산廬山에 은거하던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의 고사故事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여산은 중국 강서성江西省의 산으로, 주나라 때 광속匡俗이라는 인 물이 왕의 부름을 피해 오두막[을 짓고 은거하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하여 광려산匡廬山 혹은 여산이라고 불렸다. 백거이는 벼슬에서 좌천左遷되자 이곳에 작은 초당을 짓고 지냈다. 그가 남긴「초당기草堂記」에는 대나무와 소나무, 개울과 하얀 돌로 만든 다리, 연못 등 초당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묘사되어 있다.
정선의 <여산초당도>는 초당기 속의 경치를 그대로 그린 듯 경물의 묘사가 매 우 구체적이다. 2칸짜리 작은 초가집과 대숲, 연꽃이 만발한 연못과 그 앞으로 흐 르는 작은 개울, 그리고 그 위의 돌다리 등은 기록에 충실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 것들을 묘사할 때는 진경산수화에서 사용한 개성적인 화법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초당을 들어가는 길목 언덕 위의 소나무와 활엽수는 <청풍계淸風渓>와 같은 진경산수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는 다양한 색과 농담濃淡을 사용하여 한층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그로 인해 초당 주변은 이야기 속의 공간이 아닌 실재하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초당에 앉아 있는 선비와 초당으로 들어가는 동자의 복장도 조선의 것이다.
이 작품은 중국 시인 백거이의 삶을 그린 것이지만 실제 묘사된 풍경과 인물은 조선의 정취와 조선 선비의 삶을 재현하였다. 정선은 고사를 근거로 하되 그림 속 인물은 조선의 문인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종종 사용하였다. 70대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는 <여산초당>은 진경산수화뿐만 아니라 고사화故事畵나 시의도詩意圖등 관념적인 주제도 즐겨 그렸던 정선의 면모와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허용


■이하, <고사인물도>, 김홍도

무이귀도, 무이산에서 노 저어 돌아가다. ㅡ주희의 일화
황정환아(黃庭換鵝), 황정경을 거위와 바꾸다. ㅡ 왕희지 일화
청풍계, 정선

■ 청풍계 淸風溪, 정선
1739년, 비단에 엷은 색, 133.0×58.8cm
인왕산 동쪽 기슭에 있는 청풍계는 병자호란 때 순국한 김상용金容(1561-1637) 이 고조부의 집터에 조성한 별장이다. 이후 장동 김씨 집안이 대대로 거주하는 장 소가 되었고 주변 경관이 빼어나 한양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정선은 단독 작품 또는 장동팔경壯洞八景의 한 장면으로 이곳을 자주 그렸다.
화면 중앙에 수직으로 뻗은 절벽이 청풍대淸風臺이며, 그 아래 김상용의 초상을 모신 사당인 늠연사凜然祠와 띠풀로 지붕을 얹은 태고정太古亭이 있다. 근경에 우뚝 솟은 나무들 사이에는 함벽지涵壁油가 있고 그 오른쪽에 청풍지각楓池閣이 그려 져 있다. 청풍대와 인왕산의 절벽은 먹의 농담 차이를 두고 여러 번 붓질을 겹쳐 서 크고 육중한 모습을 표현했다. '일-'자를 겹쳐서 상록수의 잎과 가지를 표현하 는 정선 특유의 기법도 이 그림에서는 대담하게 구사되었다. 육중한 바위와 크고 오래된 나무,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오래된 건물들은 여백 없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활달하고 시원한 명승지라기보다는 깊숙한 숲속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유적지 같은 느낌을 풍긴다.
청풍계는 김상용의 집안뿐만 아니라 정선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지닌 곳이다. 김상용의 증손자인 김창흡金昌翕(1653-1722)은 정선의 스승이었으며, 두 사람의 고조부는 인왕산 일대에서 이웃하고 지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명문가였던 정선의 집안이 어려워졌을 때도 스승과 그의 집안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집안을 상징하는 장소였던 만큼 정선에게 청풍계는 그저 경치 좋은 곳에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1739년 정선이 64세 되던 해에 그려진 이 작품은 청풍계를 그린 여러 그림 중 에서 크기와 중후함, 노련미에서 단연 압도적인 작품이다. - 허용

풍악내산총람, 정선
경교명승첩, 정선
경교명승첩, 정선
성하직구 盛夏織履

■성하직구 盛夏織履
한여름의 짚신삼기
김득신 | 긍재전신첩
Making Apin (Straw-woven Shoes) on a Summer Day
여름날, 짚신 삼기에 한창인 농촌 풍경이다. 할아버지 등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손자, 혀를 빼고 더위를 식히는 개, 웃통을 벗어젖힌 이들의 모습에서 여름을 나는 서민들의 생활 정서가 생생하다. 치밀한 구도를 통해 인물간 상호연관성을 높여 그림의 완성도를 더하였다.

밀희투전 密戲闘牋

■밀희투전 密戲闘牋
몰래 투전을 즐기다
Secretly Enjoying a Tujeon (Traditional Korean Card Game)
김득신 | 긍재전신첩
투전은 패의 끗수로 승부를 겨루는 노름의 일종이다. 오른편 뒤에 연둣빛 중치막을 입은 사내는 초상화를 보는 느낌이 들 만큼 얼굴 표현이 섬세하다. 안경을 쓴 인물이 패를 내놓자 노름판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술기운에 승부욕이 더해져 이들의 얼굴이 붉어진다.


■ 혜원전신첩 惠團傳神帖
조선 10세기 말 19세기 초
혜원 신윤복은 고령 신씨 화원가문 출신으로 풍속화의 절정기를 장식한 인물이자 조선인의 풍류와 멋을 새로운 시각으로 일깨운 화가이다.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는 한량들의 주막 풍경부터 양반의 풍류놀이와 남녀의 밀회, 여인의 생활풍속 등이 담겨 있다. 작품은 등장인물의 세밀한 표정과 화려한 복식, 인물 간의 상호작용이 어우러져 연극의 한 장면인 듯,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공간 운영과 인물 묘사, 채색 기법이 독창적이며 화려함 속에 절제된 예술성이 돋보인다.

<제2전시실>
신윤복 '미인도" 독방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고미술품, 신윤복의 ‘미인도’가 어두운 독방에 홀로 걸려 있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 쌍꺼풀 없는 눈, 풍성한 치마를 입은 조선의 미인을 운이 좋은 면 ‘그녀의 독방’에서 독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워낙 대기줄이 길어 친견을 포기했다.
이미 친구들과 이 미인의 나이를 가늠하고 또한 어깨선과 어긋나게 선 버선발을 보면서 치마 속의 두 다리가 선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터라      마치 오래 본 듯 친하다.

<제3전시실>
훈민정음 해례본:
소리로 지은 집’
이 곳의 전시는 2025년 5월 25일까지 열린다.

한글의 창제원리와 용례를 담고 있는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위한 자리이다. 1940년 경북 안동의 고택에서 발견된 것을 간송이 구입한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진본이 공개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며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훈민정음』은 오늘날 한글로 불리는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을 비롯해 원리 설명과 사용 예시例를 기록한 책으로, '훈민정음해례본'이라고도 한다. 세종은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1446년에 『훈민정음』을 간행하고 새로운 문자를 세상에 반포하였다. 1940년에 이 책이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자 간송 전형필이 구입하였다.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해례본
만든 때 1446년
재질 목판인쇄
국보

<훈민정음해례본>은 훈민정음을 왜 만들었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명하는 책입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를 해례본에 담았고, 훈민정음을 함께 만든 신하들은 자음과 모음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을 설명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처음 만들어진 한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해례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해례본: 소리로 지은 집>은 훈민정음해례본을 다시 바라보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한 전시입니다. 전시 공간에서 들리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는 한글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해례본을 읽는 소리입니다. 소리를 통해 작품을 만드는 송예술 작가가 이번 전시에 함께했습니다.

♡송예슬
송예슬은 시각 중심 예술에 의문을 제기하며 소리와 같은 비물질, 비시각적 재료에서 예술적 가능성을 찾아온 미디어 작가이다. 인터랙티브 기술로 낯선 감각의 언어를 만들어 관객의 내밀한 호기심과 참여를 유도한다.
현재 미국 뉴욕대학교 티쉬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https://m.youtube.com/watch?v=p9ivplD0wAE

<제4 전시실>
: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걸친 숭고한 아름다움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걸친 불교미술과 도자기, 서예 작품들의 공간이다. 전시실의 초입에는 추사 김정희의 묵란화 네 점과 추사체의 정수를 보여주는 서예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간송의 컬렉션을 대표하는 국보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도 만나 볼 수 있다. ‘청자오리형 연적’ 등 다양한 쓰임을 위해 섬세하게 제작된 각기 다른 형태의 도자들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차호호공 直呼好共

■ 차호호공 直呼好共
조선 19세기 | 추사 김정희
달과 함께 술을 마시고 매화가 핀 산에서 지낸다는 내용의 글씨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과 북송의 문인 임포를 떠올리게 한다. 오른쪽 폭의 작은 글씨는 촉예법으로 썼다는 내용이다. 촉예는 한나라 때 촉 지방의 예서를 의미하는데, 가늘고 일정한 두께의 필획과 굳세고 단정한 느낌이 특징적이다. 김정희는 가로획이나 대각선 획을 길게 빼 촉예의 전형적인 형태에 변화를 주어 개성을 드러냈다.

대팽고회 大烹高會

■ 대팽고회 大烹高會
김정희 | 金正喜 | 1786-1856
1856년 |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56년에 쓴 글씨다. 금박이 뿌려진 고급스러운 종이에 쓴 글씨는 최만년작임에도 불구하고 추사체 특유의 기세가 여전하다. 오래된 서체인 예서를 사용하여 예스러움을 풍기며 기교를 버린 마른 필획은 천진한 자연의 상태로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두부나 오이처럼 흔한 반찬과 가족들이 모여앉은 자리가 최고의 음식이며 최고의 모임이라는 내용은 두 번의 유배를 겪은 뒤 김정희가 터득한 삶의 진리처럼 여겨진다.

<제5 전시실>
조선의 대표 회화작품을 ‘흐름·The Flow’이라는 주제로 실감영상으로 구현한 곳이다. 감상한 작품들을 되새겨 보면 잠시 사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다 보고 나서 도록을 구입했다. 현장에서 다 못한 공부를 두고 두고 읽어보고 싶고, 거금을 들여 우리의 국보급 유산을 수집한 간송에게 조금이나마 값을 갚고 싶은 심정이었다. 날 위해 초대하고 두번째 전시장 걸음까지 해준 초우들과 우정을 기념하여 사진 한 장 찍었다.

대구미술관 좌측에 있는 카페에서 카페라테와 와플을 먹으며 두세 시간 감상으로 떨어진 당을 보충했다.

대구미술관
대구미술관에서 내려보는 간송미술관, 간판이 여기도 있으면 좋겠다.
간송미술관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는 곳에 팔공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