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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들

내일이면 이사를 갑니다.

by 문촌수기 2013. 1. 2.

내일이면 이사를 갑니다.

내일이면 이사를 갑니다.

내일이면 이사를 갑니다. 벌써, 일주일째 짐을 정리합니다. 그동안 살아온 흔적들을 지우고 버려도 끝이 없습니다. '행여 기억하고 싶을 땐 어떡하나, 행여 다시 찾고 싶어질 땐 어떡하나' 그렇게 쌓아 둔 것이 결국 짐이 되고 쓰레기가 되어 버려집니다.

아내는 과감합니다. 최근 3년 동안 입지 않았던 옷, 사용하지 않았던 주방용품 등을 아낌없이 내놓겠다며 꺼냅니다. '언제 우리가 그렇게 잘 살았나'며 말 건네면, '내놓으면 필요한 사람이라도 사용하지 않겠느냐'는 대꾸를 합니다. 하물며, 제방 가득한 책들에게도 공격(?)을 가합니다. 하긴 저도 문제입니다. 읽지도 않으면서 먼저 사놓고 책꽂이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 많습니다. 환경문제까지 들먹이며, '보지도 않는 책을 왜 껴안고 있는지'라며 저의 현학적 취미를 부끄럽게 합니다. 결혼한 지 15년 넘도록 고물 TV와 세탁기를 사용하고 있는 알뜰한 아내가 갑자기 '무소유의 미덕'과 '빔의 충만함'을 깨달았나 봅니다.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신도시의 야경은 그다지 아름답진 않습니다. 입원실마다 불이 켜진 큰 병원 건물이 보이고 그 앞에는 교회의 십자가가 무겁게 등을 밝히고 있어 사색에 잠기게 합니다. 육신을 구원하는 곳과 정신을 구원하는 곳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등이 꺼져 있는 어떤 날이면 당혹스럽습니다.
'저 병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은 모두 어디에 갔나?'
절망처럼 슬퍼집니다. 그럴 때면 기도 해봅니다.

"하느님, 십자가 등은 밝게 비추시고, 병원의 불은 모두 꺼버리소서."

하나씩 버리고 비우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잊으라는 기억은 왜 그다지도 잊혀지지 않는지, 사양함에도 가슴아픈 기억은 다시 떠오릅니다. 5년 전, 고통의 기억에서 도망치듯 이사와 살아온 이 집에서 다시 다른 집으로 옮긴들 가슴에 묻혀있는 이 아픔은 어찌 지워지겠습니까? 비우고 버리고 지우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그 아픔을 가슴에 그대로 담아 내일이면 새 집으로 갑니다. 사랑하는 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슬픈 아이입니다.

2003년 06월 04일 (07:35)
유균 at 05/09/2006 08:39 pm comment

왜 이사를 할까 안 나와요

Hye-jung at 09/28/2004 12:46 am comment

내가 아무리 황보선생님을 이해하려 노력한 들 그 가슴에 담겨 있는 깊고 깊은 마음은 절대로 헤아릴 수 없을 거란 생각은 아이들이 커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껴집니다. 몇 년 전, Cheer up! 이란 말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싶었던 그 마음이 무색해지네요. 그래도 힘내시고,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황보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에 언제나 박수를 보냅니다. 누군지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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