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죽느냐 사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s question)"
셰익스피어의 햄릿 제3막 제1장에 나오는 인구회자(人口膾炙)의 햄릿 독백입니다. 햄릿은 어머니를 통해서 인간의 욕정을 보고는 구토증을 느낍니다. 또한 부왕(父王)의 원수를 갚는다는 어려운 문제를 지닌 채 산다는 것이 고통스러워졌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려 합니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서 고통이 해소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죽음의 세계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세계 아닙니까? 어쩌면 죽음 속에서도 고뇌는 영원히 따르게 될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지도 못하고 단검을 가슴에 겨눈 채 하늘을 보고 절규합니다.
가련한 햄릿.
그러나 햄릿의 삶과 죽음의 선택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냉철히 직시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것이 신의 뜻이든 자연의 이치이든 부모님의 바램이든 他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지 스스로 선택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 어느누구가 스스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아기 예수님과 아기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스스로 뜻 하신바가 있어 태어나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삶은 결코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며 맡겨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맡기신 분을 우리는 神이라고 부릅니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맡겨진 삶을 수임자(受任者)가 마음대로 파기하거나 양도하거나 소홀히 다룬다는 것은 계약의 위반이며 자연의 이치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것처럼 죽음 또한 스스로 결정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삶의 방식에 관한 것 뿐입니다. 자비로우신 신은 우리에게 삶(生)을 맡기셨고 아울러 그 삶을 엮어나갈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의지에 의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맡겨진 삶 자체를 단순히 지속하거나 포기하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절실히 깨달은 자는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을 것입니까?
이제 우리에게 던져진 문제는 오직 이것뿐.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How to be, or how not-to-be, that's ques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