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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이야기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by 문촌수기 2013. 1. 3.

(17)"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이 말은 충무공 이순신이 장렬히 전사하면서 남긴 말씀이란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사람이 죽을 때 남긴 말은 그 분의 삶과 철학의 정수(精髓)를 담고 있으며 각별한 의미로 전해진다. 또한 그 분의 인품을 더욱 고상하고 멋들어지게 미화시키기도 한다. 마지막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이 용서되기도 한다.

오늘은 마침 충무공 이순신 탄신 기념일이다. 장군은 애국심과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에 뛰어난 우리 역사상 으뜸가는 용장이시면서 나아가 우리 역사상 세종대왕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시다. 그러나 이렇게 존경받는 장군의 삶과 죽음은 매우 장중하면서도 매우 비극적이었다. 장군의 탄신 기념일을 계기로 장군의 삶과 죽음을 돌아본다.


<장군의 삶>
장군은 1545년 한성부 건천동(지금의 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덕연군 이정의 사형제 중 셋째아들로 태어나셨다. 공의 모친 초계(草溪) 하씨의 꿈에 시아버지가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 이 아이는 반드시 귀인이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한 괴이한 징조가 있어서 선공이 그대로 명명을 했던 것이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용력과 문인의 재지를 겸비하여 문학을 공부하다가 뜻한 바 있어 22세에 들어서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하여 32세 때 비로소 무과에 등제하셨다. 그래서 그 해 겨울에 일종의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임명되어 함경도에 부임하니 공으로서는 첫 벼슬에 오른 셈이다. 공은 말과 행동이 엄격하고 지혜와 용맹이 특출하였으므로 다른 무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서예에까지도 실력을 겸비하셨다.
소년시절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온 류성룡은 그의 초인적인 능력을 일찍이 알아 왔는데 그때에 전랑(銓郞)(정부의 인사관)이었던 이율곡이 류성룡을 통하여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우리는 종친이라 당연히 만나야 하지만 전랑으로 있을 때만은 만날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니 이는 그의 청렴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1591년 2월 당시 재상이었던 류성룡의 천거로 장군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여수에 초임하니 47세의 2월, 임진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였다. 공은 장차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직감했다. 조정에서의 분당에 의한 의견 대립을 무시하고 자신의 권한과 범위 내에서 전쟁준비에 열중하셨다. 1592년 왜적이 부산을 침략하자 '옥포대첩' 시작으로 '한산대첩, 부산대첩'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해 제해권을 장악,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1597, 정묘년에 또 다시 왜군은 쳐들어왔으며 원균이 패사하면서 충무공 장군은 통제사로 복직, 여병과 전함 12척으로 왜군의 330척을 격파한 이른바 명량해전 대승첩을 거두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니, 이는 세계 해전상 유래 없는 역사적 전승이었다.

<장군의 죽음>
1598년 8월 17일 임진란의 원흉 풍신수길이 죽으매 왜적의 철군이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마지막 달아나는 왜함 500여 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다. 공은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전사하셨다.(1598년 11월 19일)
임종시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상(發喪)하였으니 향년 54세였다. 그 때 하신 말씀이 바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니 이는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시며 죽어서도 조국을 구하고자는 충정(忠情)이었으리라. 이 마지막 격전으로 적은 크게 패하여 500여 척의 전함중 겨우 50척만이 남해로 달아났다한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는 스스로 죽기를 작정하며 이 전투에 임하였다고.
나 같은 문외한은 그 뜻을 알 까닭이 없지만, 장군은죽음으로서 영원히 민족의 얼 속에서 살아 계신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장군은 죽어서 영원히 산 사람이 되셨다.

 

재혁 at 06/02/2007 04:05 pm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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