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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이야기

다카무라 고다로 -〈레몬애가(哀歌)>

by 문촌수기 2013. 1. 4.

다카무라 고다로 -〈레몬애가(哀歌)>

Category: 삶과 죽음에 대하여, Tag: 여가,여가생활
12/02/2007 04:29 pm
애타도록 당신은 레몬을 찾고 있었다.

죽음의 슬프고도 화려한 병상에서

내가 쥐여준 레몬 한 알을

당신의 하이얀 이가 생큼히 깨물었다.

토파즈 빛으로 튀는 향기.

하늘의 것인 듯 몇 방울의 레몬 즙이

당신의 정신을 잠시 맑게 되돌려 놓았다.

푸르고 맑은 눈빛으로 가냘피 웃는 당신.

내 손에 꼬옥 쥔 당신의 싱그러움이여.

당신의 목 깊숙이에서 바람 소리 일지만

생과 사의 어려운 골목에서

그대는 옛날의 그대가 되어

생애의 사랑을 이 순간에 다 쏟는 것인가.

그리고 잠시

그 옛날 산마루에 올라 쉬던 심호흡 하나 쉬고

당신의 모습은 그대로 멈췄다.

벚꽃 그늘이 있는 사진 앞에

토파즈 빛 향기의 레몬은 오늘도 두자.

〈레몬애가(哀歌)/다카무라 고다로/강우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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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순간을 시(詩)로 생생히 기록한 시인이 있었다. 그걸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사람을 사랑할 자격이 없다. 사랑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모두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진 미추(美醜)를 모두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사랑이다.

사진가 최광호는 할머니와 동생이 임종하는 순간을 사진으로 찍고 작품집으로 묶었다. 그걸 누구도 비윤리적이라 비난할 수 없었다. 그 기록이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법이었다.

일본의 시인이자 조각가인 다카무라 고다로(高村光太郞, 1883~1956)는 먼저 죽은 아내를 자신이 죽을 때까지 사랑한 사람이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약속은 십중팔구 사랑의 허언(虛言)이 될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허언을 실천한 사랑은 위대하다. 다카무라 고다로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아내에게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킨 시인이다.

다카무라 고다로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유일한 이해자이며 동반자였던 아내 지에코(長沼智惠子)를 만나 1914년에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진실한 사랑으로 행복했다.

1931년 지에코가 정신분열증으로 투병을 하면서부터 다카무라 고다로는 더욱 아내를 사랑했고, 1938년 아내가 정신분열증에 폐렴까지 겹쳐 사망한 후부터는 더더욱 아내를 사랑했다.

한 여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정신분열증에 걸린 아내를 7년간 헌신적으로 돌보며, 죽은 아내를 그리며 산 42년 동안의 기록인 그의 시집 〈지에코 초(抄)〉는 일본을 울렸고 지금도 일본인이 애송하는 ‘사랑의 바이블’이다.

죽음을 앞둔 아내는 레몬을 원했다. 남편이 건네 준 레몬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잠시 맑은 정신으로 돌아와 푸르고 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내 지에코.

슬프고도 화려한 병실에서 토파즈 빛으로 튀는 레몬의 향기로 죽기 전에 남편에게 마지막 웃음을 보여주던 아내, 생과 사가 교차되는 그 순간에 옛날로 돌아가 사랑했던 시간 시간 모두 환하게 불 밝히고 바로 그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래서 다카무라 고다로에게 토파즈 빛 향기의 레몬은 ‘슬픈 노래’(哀歌)인 것이다. 또한 ‘사랑의 화신’이었던 그녀의 죽음은 그에게 영혼의 형벌이 되었다. 하지만 다카무라 고다로는 그 형벌의 시간을 사랑의 시로 새기며 슬픔과 싸워 이겼으니 그의 사랑시는 사랑으로 슬픈 모든 이에게 레몬 향기 그윽한 선물인 것이다.

그에게 생전의 아내라는 여자는 살아갈수록 점점 예뻐지는 여자였다. ‘여자가 액세서리를 하나씩 버리면/왜 이렇게 예뻐지는 걸까./…/여자가 여자다워짐은/이러한 세월의 수업 때문일까./당신이 고요히 선 모습은/진정 신이 빚으신 것 같구나./때로는 속으로 놀랄 만큼/점점 예뻐지는 당신.’(다카무라 고다로의 시 ‘점점 예뻐지는 당신’ 중에서)

남들이 미쳤다고 수군거리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는 영원한 사랑을 얻었다. 아내의 임종과 주검을 시로 남기며 아내의 죽음까지도 사랑했기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한 사람이다.

▲ 정일근 시인 다카무라 고다로는 아내와의 사랑을 고스란히 담은 그의 시들을 끝까지 세상에 내놓지 않으려 했다. 죽은 아내를 상품화하려고 한다며 울면서 통곡했다. 한 편집자의 오랜 설득 끝에 그의 사랑은 세상으로 나왔고, 20세기는 비로소 아름다운 사랑시를 가질 수 있었다.

벚꽃 그늘이 있는 그녀의 사진을 보고 싶어진다. 그 사랑을 위해 오늘은 토파즈 빛 향기의 레몬을 사고 싶은 날이다.
입력 : 2007.11.30 23:56 / 수정 : 2007.12.01 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