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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과 인문학 산책

2011년 2차 준비 : 왜 북대문은 숙정문인가? - 숙정문과 홍지문

by 문촌수기 2012. 4. 21.

2차 준비 : 왜 북대문은 숙정문인가? - 숙정문과 홍지문

2011년 4월 9일 오후 5:05공개조회수 32 1

2차 예상 탐방로 : 와룡공원 - 숙정문 - 북악산 곡장 - 창의문 - (석파정-세검정-홍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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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에서 본 수선전도(1840년, 한양도성) - 4대문, 4소문, 4궁궐



인의예지 - 북대문은 왜 홍지문이 아니고, 숙청문(숙정문)인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4덕을 따라 서울 도성의 4대문 이름을 지었건만, 북대문 만큼은 변화를 주었다. 조선 건국의 브레인 당대의 석학인 정도전이 4대문의 이름을 지을 때에 북대문의 이름을 소지문(炤智門)으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지만 최종 낙점은 숙청문(肅淸門)이 되었단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숙종 때 지어진 도성의 2차 방어선인 탕춘대성의 홍지문(弘智門)안에 지(智)의 덕목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대문을 홍지문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북대문의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오행의 북쪽 방위에 해당하는 덕은 지(智)이다. 음양오행에서의 북(北)은 겨울과 물과 음기를 상징한다. 그런 의미로 애써 해석하자면, 청(淸)자 속에 삼수변이 들어가니깐 북(北)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智)를 사용하지 않고 청(淸)자를 쓴 것은 경복궁에 외척(外戚)의 발호를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 아닐까? 여란(女亂)를 차단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 정도전이 아니면 누가 이 미스터리를 정확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북대문, 숙정문의 역사]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으며,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숙정문도 많은 사연을 가진 문이었다. 태조 4년(1395)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1413)에 최양선이 주장한 '백악산(북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에 따라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혜화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돋우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그것은 숙청문이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북쪽은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숙정문은 다른 대문들과는 규모 면에 있어 그 크기가 현저히 작다. 항상 닫혀 있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숙정문을 대신하여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76년 대통령의 명으로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함께 복원되었다. 이 일대는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였다.

북악산 도성길 - 저 멀리 보이는 산이 관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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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창의문은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다.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태종 16년(1416)에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문을 닫아 두었다가, 중종 원년(1506)에 다시 열었다고 한다. 인조반정(1623) 때는 세검정에서 모의했던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전한다. 창의문의 서쪽 벽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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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춘대성과 홍지문 - 한국 위키백과

탕춘대성의 [홍지문]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 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우진각 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 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왜란과 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또는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성의 축조와 마찬가지로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석파정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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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원래는 김흥근의 소유였던 것을 고종 즉위 후 대원군이 사용하였다. 한국전쟁 후 고아원·병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개인소유 건물이다.
정자의 앞산이 모두 바위라 대원군이 ‘석파정(石坡亭)’이라 이름지었으며 삼계동 정자라 하기도 한다. 커다란 바위와 바위산에서 흐르는 시냇물, 뜰에 서 있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석파정은 매우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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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 (브리태니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 T자형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록에 의하면 세검정은 1747년(영조 23)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원래의 정자는 1941년에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 명칭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거사 후 이곳의 맑은 물로 칼을 씻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 북악산 남쪽 기슭 백운대에서 이어지는 사천계곡(沙川溪谷)을 중심으로 한 세검정 주변 일대는 경관이 아름다운 풍치지구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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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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