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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8'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1.10.18 혁신의 길과 자세
  2. 2021.10.18 추사 김정희의 유배길과 의문당
  3. 2021.10.18 추사 김정희 제주도 유배 생활

혁신의 길과 자세

카테고리 없음 2021. 10. 18. 14:19 Posted by 문촌수기

혁신이 대세다. 혁신은 무엇이며 혁신의 길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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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유배길과 의문당

카테고리 없음 2021. 10. 18. 13:39 Posted by 문촌수기

제주도에서는 고증에 따라 추사 유배지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세한도의 당우를 모방하여 제주추사관을 건립하였다. 그 안에 세한도사본과 이야기를 비롯하여 대정향교 의문당현판, 기증받은 추사 김정희와 친인척의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정향교는 제주추사관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의문당(疑問堂)’ 당호는 의문을 묻는 집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의문을 많이 품고 도를 연마할 것을 주문한다. 다산은 아들들의 공부방에 서향묵미각(書香墨味閣)’이라는 당호를 지어 주었다. 부지런히 공부하며 책향기를 맡고, 글맛을 보라는 아버지의 바람이 담겨있다. 학교 도서관에도 이런 류의 청고(淸高) 고아(古雅)한 당호를 붙이면 어떨까? 단지 책을 보관하는 집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독서와 사색으로 의문을 품고 진리를 탐구하는 활동의 장으로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의미 있겠다.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아이들에게 꽃이 되는그런 도서관이 되었으면 좋겠다.

제주도 대정향교
추사의 글, 대정향교 의문당 현판

제주도에서는 올레길과 같이 추사의 유배길을 집념의 길, 인연의 길, 사색의 길로 세 개의 코스를 개발하였다. 그 중 집념의 길이라 명명된 1코스는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를 시작하여 송죽사터, 첫 번째 유배지 터, 드레물, 동계 정온 유허비, 한남 의숙 터, 정난주 마리아 묘, 남문지 못, 단산, 세미물, 대정향교, 서귀포 추사 유배지를 순환한다.

제주도에서는 올레길과 같이 추사의 유배길을 집념의 길, 인연의 길, 사색의 길로 세 개의 코스를 개발하였다. 그 중 집념의 길이라 명명된 1코스는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를 시작하여 송죽사터, 첫 번째 유배지 터, 드레물, 동계 정온 유허비, 한남 의숙 터, 정난주 마리아 묘, 남문지 못, 단산, 세미물, 대정향교, 서귀포 추사 유배지를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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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제주도 유배 생활

카테고리 없음 2021. 10. 18. 13:20 Posted by 문촌수기

유배지 제주에서 피어나는 추사의 인문향기

이미 10년 전에 종결된 윤상도의 옥사(獄死)’ 사건이 다시 재론되면서 당시 집권 세력들의 탄핵을 받은 추사는 1840(헌종6)에 제주도까지 유배되어 왔다. 추사의 유배길은 충청도 천안, 전라도 완주, 해남의 대흥사와 일지암을 지나고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들어온 후 유배지인 지금의 서귀포 대정읍으로 들어왔다. 1848(헌종14) 해배될 때까지 8년 남짓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서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였다.

제주도의 유배 생활은 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추사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여러 서체를 익히고, 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추사체를 유배 생활 중에 완성하였다. 추사는 자신의 서예 필법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가슴 속의 맑고 고상하며 예스럽고 우아한 뜻은 가슴 속에 있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아니면, 능히 팔 아래의 손끝으로 발현시킬 수 없다. 또한 이것은 흔히 보는 해서(楷書)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하여 모름지기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고 나서야 예서법의 근본이 되며 예서 쓰는 신통한 비결이 된다(胸中淸古高雅之意又非胸中文字香書卷氣不能現發於腕下指頭.....須於胸中先具文字香書卷氣爲隸法張本이요 爲寫隸神訣이라)”. 한마디로 청고고아한 뜻(淸高古雅之意)과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가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다 하였다. 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문적 교양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추사는 우리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평을 받는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도 이곳에서 그렸다. 추사가 유배 생활 중 남긴 5181수의 시와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많은 서신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추사는 무려 제자가 삼천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교육 활동에도 왕성하였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우선 이상적, 소치 허련 등이 있으며, 제주도 유배 중에도 대정현 훈장 선생인 강사공(姜師孔) 등 지역의 수많은 제자들이 그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 추사의 내종사촌 민규호는 추사가 머물고 있는 제주도를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 그때의 추사 유배지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귀양을 사는 집에 머무르니 멀거나 가까운 데에서 책을 짊어지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장날 같이 몰려들었다. 겨우 몇 달 동안에 인문이 크게 피어나 문채 나는 아름다움은 서울풍이 있게 되었다. 곧 탐라의 거친 풍속을 깨우친 것은 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유배지에서 피어나는 추사의 인문향기

이미 10년 전에 종결된 윤상도의 옥사(獄死)’ 사건이 다시 재론되면서 당시 집권 세력들의 탄핵을 받은 추사는 1840(헌종6)에 제주도까지 유배되어 왔다. 추사의 유배길은 충청도 천안, 전라도 완주, 해남의 대흥사와 일지암을 지나고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들어온 후 유배지인 지금의 서귀포 대정읍으로 들어왔다. 1848(헌종14) 해배될 때까지 8년 남짓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서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였다.

제주도의 유배 생활은 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추사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여러 서체를 익히고, 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추사체를 유배 생활 중에 완성하였다. 추사는 자신의 서예 필법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가슴 속의 맑고 고상하며 예스럽고 우아한 뜻은 가슴 속에 있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아니면, 능히 팔 아래의 손끝으로 발현시킬 수 없다. 또한 이것은 흔히 보는 해서(楷書)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하여 모름지기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고 나서야 예서법의 근본이 되며 예서 쓰는 신통한 비결이 된다(胸中淸古高雅之意又非胸中文字香書卷氣不能現發於腕下指頭.....須於胸中先具文字香書卷氣爲隸法張本이요 爲寫隸神訣이라)”. 한마디로 청고고아한 뜻(淸高古雅之意)과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가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다 하였다. 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문적 교양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추사는 우리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평을 받는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도 이곳에서 그렸다. 추사가 유배 생활 중 남긴 5181수의 시와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많은 서신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추사는 무려 제자가 삼천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교육 활동에도 왕성하였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우선 이상적, 소치 허련 등이 있으며, 제주도 유배 중에도 대정현 훈장 선생인 강사공(姜師孔) 등 지역의 수많은 제자들이 그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 추사의 내종사촌 민규호는 추사가 머물고 있는 제주도를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 그때의 추사 유배지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귀양을 사는 집에 머무르니 멀거나 가까운 데에서 책을 짊어지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장날 같이 몰려들었다. 겨우 몇 달 동안에 인문이 크게 피어나 문채 나는 아름다움은 서울풍이 있게 되었다. 곧 탐라의 거친 풍속을 깨우친 것은 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미 10년 전에 종결된 윤상도의 옥사(獄死)’ 사건이 다시 재론되면서 당시 집권 세력들의 탄핵을 받은 추사는 1840(헌종6)에 제주도까지 유배되어 왔다. 추사의 유배길은 충청도 천안, 전라도 완주, 해남의 대흥사와 일지암을 지나고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들어온 후 유배지인 지금의 서귀포 대정읍으로 들어왔다. 1848(헌종14) 해배될 때까지 8년 남짓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서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였다.

제주도의 유배 생활은 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추사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여러 서체를 익히고, 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추사체를 유배 생활 중에 완성하였다. 추사는 자신의 서예 필법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가슴 속의 맑고 고상하며 예스럽고 우아한 뜻은 가슴 속에 있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아니면, 능히 팔 아래의 손끝으로 발현시킬 수 없다. 또한 이것은 흔히 보는 해서(楷書)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하여 모름지기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고 나서야 예서법의 근본이 되며 예서 쓰는 신통한 비결이 된다(胸中淸古高雅之意又非胸中文字香書卷氣不能現發於腕下指頭.....須於胸中先具文字香書卷氣爲隸法張本이요 爲寫隸神訣이라)”. 한마디로 청고고아한 뜻(淸高古雅之意)과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가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다 하였다. 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문적 교양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추사는 우리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평을 받는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도 이곳에서 그렸다. 추사가 유배 생활 중 남긴 5181수의 시와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많은 서신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추사는 무려 제자가 삼천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교육 활동에도 왕성하였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우선 이상적, 소치 허련 등이 있으며, 제주도 유배 중에도 대정현 훈장 선생인 강사공(姜師孔) 등 지역의 수많은 제자들이 그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 추사의 내종사촌 민규호는 추사가 머물고 있는 제주도를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 그때의 추사 유배지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귀양을 사는 집에 머무르니 멀거나 가까운 데에서 책을 짊어지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장날 같이 몰려들었다. 겨우 몇 달 동안에 인문이 크게 피어나 문채 나는 아름다움은 서울풍이 있게 되었다. 곧 탐라의 거친 풍속을 깨우친 것은 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제주도 대정읍 추사유배지
세한도 당우를 모방한 추사기념관
추사기념관 내부로 들어가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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