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사형 선고를 받은 옥중의 아들에게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를 보면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요, 그 아들에 그 어머니를 알 수 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네가 만일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선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께 드린 유서>

어머니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안중근 의거 후 모친 조 마리아 여사는 자부 김아려, 손자 분도와 준생 그리고 두 아들 정근과 공근 등 일가를 거느리고 연해주에 망명하였으며, 안중근 일가를 조국독립운동의 명문으로 이끌었다.

 

191039, 10일 두 아우인 정근과 공근 그리고 홍석구(프랑스 신부)가 마지막으로 안의사를 면회하였다. 그 자리에서 안의사는 두 동생들에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니 두려움이 없다. 나는 천주님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너희들은 오히려 기뻐해다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고.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라고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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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 2. 그의 정의로운 전쟁

안중근과 윤동주 2015. 10. 5. 16:49 Posted by 문촌수기

2. 그의 정의로운 전쟁

1909(31) 32일 안중근은 김기용, 강기순, 백남규 등 11인과 동의단지(同義斷指)동맹을 결성하였다. 35일에는 총기를 휴대한 약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수청 방면으로부터 합십마 부근으로 이동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다 이튿날 일진회 회원 박모를 응징하였다. 그해 410일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병탄안을 찬성하였으며 710일에는 일본 정부 각의에서 의결되고 일본 국왕은 그날로 재가하였다.

그해 109일 이토는 일본 국왕을 만나 3, 4주간 예정으로 만주를 여행한다는 계획을 알리고 18일 중국 다렌에 도착한다.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던 안중근은 이 소식을 듣고 우덕순을 만나 이치권의 집으로 함께 돌아와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합의한다. 1022일 안중근, 우덕순, 류동하는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때 이토는 아침 뤼순을 출발하였다.

드디어 역사적인 날. 1026일 아침 630분경, 안중근은 새 양복과 모자를 쓰고 묶고 있던 집을 나선다. 7시경에 하얼빈에 도착하여 이토가 오기를 기다린다. 9시경 이토를 실은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약 15분간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환담하였다. 915분에 이토 히로부미는 하차하였다.

 

 

 

930분경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일본인 환영단으로 향하던 이토에게 당당하게 다가가 저자가 필시 이토일 것이다. 생각하고 권총 세발을 발사하여 명중시켰다. 이후 곧장 그를 수행하던 사람들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안의사는 죄 없는 수행원들까지 부상을 입힌 것에는 비통한 일이라고 재판장에서 말하였다. 그러나 이토의 얼굴을 확실히 알지 못하여 혹시라도 잘못 쏘았다면 일이 낭패가 되기에 그 주변인들이 이토라 여겨서 총을 발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냉혈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그는 정의로운 선비였다.

러시아 헌병이 안중근을 덮치자 그는 쓰러지면서 권총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만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레를 외친 다음, 하늘을 향해 대한 만세를 목이 터져라 세 번 외쳤다. 10시에 이토는 하얼빈 역에서 절명하였다. 그는 뜻을 이루었다.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완성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 하였는데, 하늘의 뜻도 안의사와 함께 하였던 것이다. 본시 이 글은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사마의의 군대를 화공(火攻)으로 물리치려 했으나 소나기가 내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탄식하며 했던 말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자기의 의거는 하늘의 뜻이었음을 밝히고 정당성을 부여하며 뤼순 옥중에서 먹을 갈아 이 글을 썼다.

러시아 당국은 안중근을 일제에 인도하기로 결정하였다. 1155분에 거사를 함께 했던 우덕순 조도선도 피체되었다. 111일 뤼순으로 압송되고 113일 오전 10시에 연루 혐의자 9명과 함께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1027일부터 14일까지 중국 여순(뤼순)의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에서 안중근 의거에 대한 여섯 차례 공판이 열렸다. 271회 공판장에서 안중근은 “3년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을 포살코자 했으며, 이 의거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29일 오전 950분 제 3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여기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재판장에 의하여 중지 당하였다.

 

1. 대한제국 민황후를 시해한 죄

2. 대한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을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대한인들을 학살한 죄

5.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 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8.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한국인들 교육을 방해한 죄

10. 대한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대한국인이 스스로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트린 죄

13.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대한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210일 오전 940분 제4회 공판에서 검찰관으로부터 각자에 대한 형량이 구형되는데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과 조도선은 징역 3, 유동하는 징역 16개월이 구형되었다. 212일 오전 930분 제 5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두 일본인 관선 변호사의 변론이 행해졌다. 변론이 끝난 후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에서 안중근은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이토를 척결했다고 당당하게 진술하였다.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 원한으로 남을 죽인 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직무로 전쟁을 수행하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지방재판소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일인 즉, 만국 형법과 국제 공법으로서 재판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일제 법정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상된 일임을 안의사는 알고 있었다. 1910214일 오전 10시 중국 여순의 관동도독부 일제의 고등법원 제6회 법정. 안의사에 대한 최종 판결일이다.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우덕순 징역 3, 유동하와 조도선에게는 징역 16개월이 판결되었다. 그리고 항소기간을 5일 내로 정하였다. 선고를 받고도 안중근은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튿날부터 그는 동양평화론을 설파하며 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한권을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집행일을 한 달 남짓 늦추어 줄 수 있겠는가라고 부탁하였다. 법원장이 어찌 한 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하므로 19일에는 사형선고에 대한 항소 포기를 한다. 그 진짜 이유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아서 때문인지,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고 행한 정당한 의거임을 증명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구차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그 분명한 뜻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군자이며 지대지강(至大至剛)한 대장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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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안중근 의사의 삶과 논어의 교훈

 

1절 의사 안중근의 삶

 

1. 그의 탄생과 군자로서의 삶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서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 사이에서 3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안인수는 일찍이 진해 현감을 지내며, 자선가로서 도내에 명성이 자자했으며, 부친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8, 9세에 사서삼경에 통달하였고, 13, 4세에 과거공부를 하고 사륙병려체를 익혀 선동(仙童)이라 불리며 널리 명성이 자자했으며, 18세에 과거에 올라 진사가 되고 조씨와 혼인하였다. 그해 187992일에 장남 중근이 태어났으니, 중근은 명문 선비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중근은 태어날 때에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과 같이 일곱 개의 점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중근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고 하여 응칠(應七)이라는 아명을 지어 불렀다.

부친 안태훈은 박영효 등의 개화파 정변(갑신정변)으로 선진문명탐방 해외 유학생 70명에 선발되었으나, 개화파 정권이 삼일 만에 무너지는 바람에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안태훈도 숨어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신천군 청계동 산중으로 이사하였다. 이때의 중근은 6, 7세로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팔구년간 한문과 보통학문을 익혔다. 중근은 어려서부터 줄곧 사냥을 즐기며, 학문보다는 장부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뜻을 품었다. 하도 학문에 힘을 쓰지 않자 부모와 교사들이 크게 꾸짖기도 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 친구들이 타일렀을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 말이 옳다. 그러나 내 말도 좀 들어보아라. 옛날 초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자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라고 했는데 만고 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너희들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너희들은 다시 더 나를 설득하지 말라.”

 

그는 장부의 기상과 의리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학문을 등한시하고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랬었다면 어찌 학교를 설립하고 옥중에 그 많은 유묵(遺墨)을 남길 수 있었겠으며, 안응칠 역사<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수 있었겠는가? 중근이야말로 학덕과 무예를 연마하여 문무를 겸비한 군자 중의 군자요. 장부 중에 대장부임을 알 수 있다.

 

189416세에 김아려와 혼인하여 이후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사이비 동학당, 훗날 일제의 앞잡이인 일진회(一進會)의 전신에 맞서 부친 안태훈이 의병을 일으킬 때, 부친을 따라 출전하여 선봉 겸 정탐독립대가 되어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후 큰 병에 걸렸으나 두서 달 만에 소생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 무렵에 부친의 초청으로 청계동에 온 백범 김구와 상면하게 된다.

17, 8세 때에 그는 하도 바른 말을 잘한다 하여 번개 입[電口]’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그때의 중근 자신의 모습을 안응칠 역사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내 나이 17, 8세의 젊은 나이로 기골이 장대하여 무슨 일이든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특성으로 평생 즐겨하든 일이 네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친구와 의를 맺는 것이요(親交結義)

둘째는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요(飮酒歌舞)

셋째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요(銃砲狩獵)

넷째는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騎馳駿馬)”

 

 

요새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놈팡이들 짓이라 비난하겠지만, 중근은 시대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자신이 할 일을 대비한 듯하다.

189510월 안중근(17)은 을미사변이 발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때부터 중근은 나라를 구할 방도를 찾기 시작하며 항일 운동의지를 키워나갔다.

1897(19)에 중근은 프랑스 선교사 홍요셉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도마[多默Thomas]라는 세례명을 얻는다. 홍신부를 도와 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전도하고 군중들 앞에서 연설도 하였다. 24세에 장녀, 25세에 장남을 얻는다.

1905(27) 러일전쟁이 가속되면서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였다. 부친과 상의하여 독립기지 건설을 위해 산둥지역을 두루 살펴보고, 상하이의 민영익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려 여러 차례 찾아갔으나 만나주지 않아 크게 욕을 퍼부으며 꾸짖고 돌아섰다. 대신 상하이에서 만난 프랑스인 곽신부의 이천만 동포와 함께 본국에서 활동하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으니,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 네가 할 일을 하도록 하라는 권고를 받고 돌아왔다. 그때 받은 네 가지 권고는 첫째 교육의 장려요. 둘째 경제를 일으키고, 셋째 민심의 단합이요. 넷째 실력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해 1116일 결국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12월에 부친 안태훈이 사망하자 중근은 독립이 될 때까지 술을 끊기로 맹세하였다. 1225일에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통감에 임명되었다.

 1906년 중근은 가족과 함께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에 이사를 하고 살집을 지어 집안을 안정시킨 후에 남은 재산을 출연하여 두 곳에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웠다.

1907(29) 중근은 재정마련을 위해 평양에서 석탄광산 사업을 시작하고 미곡상을 운영하였으나 일본인의 방해로 모두 실패하였다. 서울에 체류하면서 안창호 등과 교류하면서 향후 계획을 도모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하였다. 7월에는 국채보상회 가담하여 나라 빚을 갚는 일에 앞장섰다. 그 해 7월에 일제는 강제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급기야 정미 7조약으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대한제국의 내정군마저 박탈하였다. 이에 2천만 국민들이 격분하여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9월 중에 간도에서 고통 받는 동포들의 실상을 보고 의병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10월 말경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였다.

1908(30) 중근은 동의회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회장 이위종, 부회장 엄인섭에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6월에는 홍범도를 만났다. 중근은 연합의병부대의 운영장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이끌었으나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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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

 

1910214일 오전 10시 중국 여순의 관동도독부 일제의 고등법원 제6회 법정. 안의사에 대한 최종 판결일이다.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우덕순 징역 3, 유동하와 조도선에게는 징역 16개월이 판결되었다. 선고를 받고도 안중근은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튿날부터 그는 동양평화론을 설파하며 그의 뜻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9일에는 사형 선고에 대한 항소를 포기한다. 그 이유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아서 때문인지,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고 행한 정당한 의거임을 증명하기 위함인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군자이며 지대지강(至大至剛)한 대장부의 모습이다.

 

아래에 사형 선고를 받은 옥중의 아들에게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를 보면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며, 그 아들에 그 어머니'를 알 수 있다.

 

네가 만일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선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동영상보기>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마지막 편지
> tv조선 > 2014.4.4>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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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트리 - 우리들의 영원한 영웅, 안중근

1879.09.02부터 1910.03.26까지

10개의 타임로그

 

 

1> 영웅의 탄생 , 아명(兒名) 안응칠의 비밀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의 아명이 왜 안응칠이었는지?"

영웅,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같은 7개의 점을 가지고 태어나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슴과 배에 마치 북두칠성과 같은 점 7개가 있었다. 할아버지 안인수와 아버지 안태훈은 안중근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고 하여 아명(兒名)을 응칠이라 지었다.

▶ 용맹한 영웅의 어린시절
안응칠은 할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우는 한편, 틈이 나는 대로 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청계동의 수려한 산세를 무대로 전쟁놀이를 즐겼다. 또한, 집안에서 고용한 포스들을 따라 사냥과 활쏘기, 말타기 등을 배워 15, 6세 무렵에는 발군의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출처
내용/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URL : http://ahnjunggeun.or.kr/?page_id=1334

 

2>1897.01.11  안중근 의사의 호, '도마'의 뜻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의 호 '도마'의 뜻"

1897년 받은 세례명 '토마스'의 음역인 '도마'를 사용하다

1897년 1월 11일, 안중근 의사는 빌렘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토마스(Thomas,도마)라는 영세명을 받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마'라는 호는 세례명 '토마스'의 음역이다.

▶안중근 의사의 신앙 활동
안중근 의사는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수년간 천주교를 전파하며 계몽운동을 펼친다. 또한 전도활동 중 민족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 설립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출처
내용 : 책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인 10』 (서경덕과 한국사 분야별 전문가 지음 / 엔트리)
사진 : 안중근평화신문

 

 3>  1908.06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 승리하다​.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가 의병부대 장군이었다는 사실"

영웅, 의병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에 맞서 승리하다

1908년 6월, 안중근 의병부대는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하였다. 이 전투에서 안중근 부대는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고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일본군을 완전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 안중근의 평화사상, '포로를 죽이지 마라'
한 달 후, 두 번째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다수의 일본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여기서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따라 사로잡힌 적병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원칙 아래 부대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출처
내용/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URL : http://ahnjunggeun.or.kr/?page_id=1356

 

 

4>1909.03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다.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가 왜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었는지"

대한독립의 의지를 드러내려 단지 혈맹을 하다

의병활동으로 펼친 일본군과의 교전은 승리를 거듭했으나, 안중근 의사는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였던 일본군을 풀어주게 되면서 일본군의 역추격을 받아 패퇴한다. 한 달여의 긴 사투 끝에 연해주에 귀환해 지금은 러시아 땅인 연추(현 크라스키노)에서 안중근을 비롯한 12인의 '동의단지회'는 왼속 약지 첫 관절을 끊고, 그 선혈로 태극기의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외쳤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 붙잡힌 후 옥고를 치르는 동안 동인단지회의 11인의 명단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내용 : 책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인 10』 (서경덕과 한국사 분야별 전문가 지음 / 엔트리)
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http://ahnjunggeun.or.kr/?page_id=1334

 

 

5> 190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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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저격, 그를 사살한 이유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

민황후의 시해 죄부터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까지

▶안중근 의사가 재판장에서 밝힌 이토히로부미의 14가지 죄목
일제는 재외조선인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자신들이 갖고 있다며 안중근을 일본의 관할구역인 다롄 시 뤼순 감옥으로 이송해 재판을 열었다. 해당 재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이유를 묻자, 안중근은 이렇게 답했다.

  • 첫째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
  • 둘째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 셋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 넷째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 다섯째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 여섯째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빼앗은 죄
  • 일곱째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 여덟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 아홉째 교육을 방해한 죄
  • 열째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 열한째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 열두째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 열셋째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 열넷째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 열다섯째 일본의 태황제를 죽인 죄

출처
내용/사진 : 책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인 10』 (서경덕과 한국사 분야별 전문가 지음 / 엔트리)

 

 

6> 1910.02.14  2월 14일, 사형을 선고 받다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2월 14일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어떤 날인지"

발렌타인데이보다 더 기억해야 할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죄목으로 이미 공판에 들어가기 2개월 전인 1909년 12월 2일에 뤼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에게 사형을 지시했다. 사형은 죄인에게 내려지는 최고형으로, 이를 선고받았다는 것은 안중근 의사의 모든 독립운동 행위를 부정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의도된 판결로 진행된 부당한 재판임을 간파한 안중근 의사는 공소권을 포기하는데, 이는 일제에게 죽음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었으며, 조국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리고자 함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의거일 이후, 1910년 2월 12일까지 총 다섯 차례의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안중근 의사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고등법원장에게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자신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1910년 2월 14일에 열린 마지막 공판에서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출처
내용 : 책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인 10』 (서경덕과 한국사 분야별 전문가 지음 / 엔트리)
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http://ahnjunggeun.or.kr/?page_id=1334

 

 

7> 1910.02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를 있게 한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의 내용을"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사형을 선고 받은 안중근은 어머니를 두고 사형 집행을 받게 된 것을 불효라고 생각해 고민하고 있을 때 어머니의 편지를 받게 된다. (이 편지의 소재는 전언이 알려진 것으로 편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 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것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 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출처
내용 : MBC 「무한도전」 역사특집 편
사진 : MBC 「무한도전」 역사특집 편

 

8> 1910.03.15  옥중 '안응칠 역사'발간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옥중에서 완성한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

1910년 옥중에서 『안응칠역사』를 발간하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2월 13일 옥중에서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 3월 15일 발고한 자서전이다. 안중근의 탄생부터 순국 전까지 삶의 여정,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투쟁한 사실을 진솔하게 기술하고 있다. 32년의 짧은 인생을 오직 겨레와 나라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 육필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안타깝게도 의거 100주년(2009), 순국 100주년(2010)을 맞이한 오늘날까지도 친필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등사본·번역본만 알려져 있다. 당시, 친필 원본은 일본에 의하여 공개되지 못하고 그들의 한국지배정책의 자료로만 사용되어 왔다. 비밀은 오래가지 않아 한자로 된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한 번역본과 원본을 등사한 등사본이 안 의사가 순국한 지 60년이 지난 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출처
내용/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URL : http://ahnjunggeun.or.kr/?page_id=1460

 

9> 1910.03.25  여섯 통의 유서와 마지막 유언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천국에 가서도 대한 독립을 위해 힘쓰겠다던 영웅의 마지막 유언

사형을 하루 앞둔 뤼순감옥으로 면회를 온 두 형제와 홍신부에게 안중근은 여섯 통의 유서를 건낸다. 그것은 어머니와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일부, 그리고 지인이었던 홍신부와 민주교에게 당부를 남기는 옥중 유서였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출처
내용: 책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인 10』 (서경덕과 한국사 분야별 전문가 지음 / 엔트리)

 

10> 1910.03.26  영웅의 마지막 순간, 11분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영웅의 마지막 순간"

32해의 빛나는 일생, 그러나 순국까지 걸린 시간 단 11분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순간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의 사형은 뤼순 감옥에서 행해졌다. 안중근 의사는 전날 밤 고향에서 보내온 옷을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와 교수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갔다.
관헌은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는 마음껏 최후의 기도를 하도록 허락했다. 안중근 의사는 전옥의 말에 따라 수분간 묵도를 했고 기도가 끝나자 수명의 간수에 둘러싸여 교수대로 향했다.
드디어 안중근 의사가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옥리 한 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으니 바닥이 ‘꽈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10시 15분 안중근 의사는 완전히 절명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다.

이미지

오로지 독립을 위해 힘써온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마음을 SNS에 널리 공유해 주세요!

출처
내용/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URL : http://ahnjunggeun.or.kr/?page_id=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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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특별수업 이미지2

안중근과 윤동주 2015. 9. 19. 22:36 Posted by 문촌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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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특별수업

안중근과 윤동주 2015. 9. 19. 22:34 Posted by 문촌수기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이토 척결의거 기념 특별수업 ppt이미지

첨부드림 > PPT 

안중근의 생애와 동양평화론.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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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영웅 - 안중근

안중근과 윤동주 2015. 9. 19. 20:30 Posted by 문촌수기

뮤지컬 '영웅' 하이라이트  - 유투브

 

영웅 2012  하이라이트 1부 14:37 >  https://www.youtube.com/watch?v=FKoAnxD4zcc

영웅 2012  하이라이트 2부 08:35 >https://www.youtube.com/watch?v=9lUDQwkf_mM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기] 뮤지컬 영웅 > https://www.youtube.com/watch?v=QusdLtI-NT0

게시일: 2015. 3. 22.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입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
올해는 안중근 의사 서거 105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번주는 안중근 의사 순국 추모기간으로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네요!
안중근 의사 순국일도 함께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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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블로그에서 안중근

안중근과 윤동주 2015. 9. 19. 19:44 Posted by 문촌수기

나의 블로그에서 안중근

 

- 중국 뤼순 감옥소에서의 안중근  http://munchon.tistory.com/428

 

 

 

-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http://munchon.tistory.com/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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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웅 안중근

안중근과 윤동주 2015. 9. 19. 19:37 Posted by 문촌수기

도마 안중근

Doma Ahn Joong Keun, 2004
83분 2004.09.10 개봉
감독 > 서세원
출연 > 유오성(안중근)
등급 > 전체 관람가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1&aid=0002206166

[단독]권상우 ‘의사 안중근’ 된다…장이머우 감독과 손잡아


세계적인 거장인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영화로 제작하기로 확정하며 한국 배우 권상우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한·중 합작으로 제작되는 이 영화의 제목은 ‘지비 지비(擊斃 擊斃)’다. 이는 안중근이 거사를 치른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 붙어 있는 현판에 쓰인 ‘안중근격폐이등박문사건발생지(安重根擊斃伊藤博文事件發生地)’에서 발췌한 제목이다. ‘사살하다’, ‘총살하다’ 등의 사전적 의미를 지닌 단어다. 안중근의 의거를 중국이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는 단어라 할 수 있다.

‘지비 지비’의 총감독은 영화 ‘붉은 수수밭’과 ‘국두’, ‘영웅’ 등으로 유명한 장이머우 감독이 맡고 메가폰은 ‘사조영웅전’과 ‘대한천자’ 등 중국 유명 영화를 연출한 판슈밍(范秀明) 감독이 잡을 예정이다.

중국 현지 관계자는 “장이머우 감독이 제작에 참여할 뜻을 밝히며 안중근 의사의 일대를 다룬 영화의 제작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장이머우 감독이 직접 연출을 맡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총제작을 맡는다는 것만으로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장이머우 감독은 고민 끝에 한류스타인 권상우를 안중근 역을 소화할 적임자로 판단하고 러브콜을 보냈다. 권상우는 단순히 한국 드라마뿐만 아니라 중국 배우 청룽(成龍), 장바이즈(張柏芝) 등과 각각 영화 ‘차이니즈 조디악’과 ‘그림자 애인’에 출연해 중국 내에서 지명도가 높은 배우다.

지난주 공식적으로 출연 제안을 받은 권상우는 이미 이 영화에 참여할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권상우 측 관계자는 29일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중국 측에 이미 출연의향서를 보냈다. 국가적인 영웅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감히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지만 의미 있는 작품에 함께하고 싶었다. 장이머우 감독이라는 거장과 함께 일할 기회를 얻게 된 것도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며 “조만간 세부적인 사안 등 계약을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권상우 외에 장자후이(張家輝)와 장위치(張雨綺) 등 중국의 유명 배우 등도 참여할 예정이다. ‘도성’, ‘흑사회’ 등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장자후이는 이 영화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하는 이토 히토부미(伊藤博文) 역을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영화는 중국 유명 동영상사이트인 LETV의 자회사인 러스잉예에서 제작한다. 2013년 5월 장이머우와 총감독직 계약을 체결한 러스잉예는 이 영화는 한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배급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안중근 의사 서거 104주년을 맞아 제작되는 이 영화는 온풍이 불고 있는 한국과 중국, 양국 간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 전망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역사공조’가 대중문화 차원에서 이뤄진 셈이다.

안진용 기자 real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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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억원 얼굴보험 가입한 ‘판빙빙’, 영화 ‘안중근’에 출연하나?

 중국 배우 판빙빙, 안젤라베이비, 탕이엔 등이 영화 영웅 안중근' 에 출연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10일, ‘영웅 안중근’ 제작사 측은  “판빙빙과 안젤라 베이비, 탕이엔 등과 출연 일정을 놓고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5월에는 중국 화인TV와 중국인 출연자 오디션을 준비 중에 있다"고 밝혔다.

중국 톱스타 판빙빙은 1981년에 칭다오에서 태어나 귀여운 외모와 몸매,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중화권 바비인형’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1997년 드라마 '황제의 딸'에서 금쇄 역을 맞으며 한국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한편 ‘영웅 안중근’은 지난 3월 말부터 공개 오디션을 통해 200명을 확정했다. 기성과 신인을 구분하지 않고 진행된 이번 오디션에 500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김경호 기자 stilllcut@segye.com

사진=한윤종 기자 hyj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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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권혁기 기자 = 영화 ‘영웅 안중근’이 중국스타 판빙빙과 안젤라 베이비에 러브콜을 보냈다. 

광복 70주년과 안중근의사 순국 105주년을 맞아 국내의 문화예술계에서도 안의사의 추모열기는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영웅 안중근’도 최근 조, 단역 배우 모집 중이다. 

제작사인 ‘즐거운 상상’은 지난 3월말 5000여명의 지원자가 몰린 가운데 주경중 감독과 관계자들의 공개오디션을 통해 우선 200명을 출연 확정하고 크랭크인에 시동을 걸었다. 기성과 신인을 구분하지 않고 진행된 이번 공개오디션에 5000여 명의 지원자가 몰린 것은 최근의 안중근 의사 추모열기와 무관치 않다. 

일반적 영화의 조,단연 모집에 많아야 2000~3000명의 연기자가 지원하는 것을 감안하면, ‘영웅 안중근’ 오디션 열기는 이례적인 것. 

안중근 의사는 올해 초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독립운동가 하면 떠오르는 사람’ 1위를 차지했다. 이는 김구45%, 유관순37% 보다 많은 47%를 차지한 것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의 절반 정도는 독립운동가 하면 그저 안중근의사를 떠올린다는 이야기다. 그런 만큼 ‘영웅 안중근’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높고 출연배우에 대한 관심도 클 수 밖에 없다.

‘영웅 안중근’ 제작사는 충무로 탑 배우들과 물밑 교섭 중이다. 다만 한류를 지향하는 탑 배우들에게 ‘영웅 안중근’의 출연은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인식하는 극우 일본팬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떤 톱스타가 일본시장을 포기하고 중국을 선택할 지가 영화계 핫이슈가 될 전망이다. 

어떤 스타도 ‘영웅 안중근’으로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다만 거시적인 안목으로 크게 마음을 비운다면 일본을 넘어 아시아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또 한명의 안중근의사로서 연기자 이상의 큰 성공과 관심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의사의 인기는 중국에서도 대단하다. 안의사의 거사직후 중국의 지도자 쑨원은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라고 추앙했으며, 저우언라이(주은래) 전 총리와 젊은시절 연극 활동중 덩잉차오(등영초) 여사와 안중근 역할을 번갈아 하다가 결혼에 성공했다. 등여사는 남장을 하고 안중근을 연기했다. 안중근은 한중 양국의 영웅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의사 거사 당시, 안중근 신드롬은 대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안중근의 전기는 몽골, 베트남등 동남아 전역에서 번역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아직도 안 의사의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당시 일본 헌병상사) 후손들은 안의사를 가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안의사를 존경하는 일본의 지식인들은 아직도 매년 추모제를 올린다. 

‘영웅 안중근’은 안중근의 인기에 기세를 모아 동남아 시장과 함께 거대한 중국시장을 노리고 있다. 영화에서 안중근의 거사를 돕는 여주인공은 중국 인기 배우로 물색 중이다. 현재 제작사는 판빙빙과 안젤라베이비, 탕이엔 등과 출연 일정을 놓고 협의 중이며 5월에는 중국전역에 2억명의 접속자를 가진 인터넷 방송사 화인TV와 중국인 출연자 오디션을 준비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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