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어와 놀기

위령공1502 君子固窮, 궁할 때에 사람 됨을 안다.

by 문촌수기 2021. 9. 19.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It is not what enters one's mouth that defiles that person; but what comes out of the mouth is what defiles one.- 마태오복음 15,11)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음식이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이다. 무엇을 먹고, 어디에 사느냐는 의식주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보고 사람 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부유할 때의 처신을 보면 사람 됨을 알 수 있다. 위기에 빠지거나 궁한 처지가 되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군자는 그럴 때일수록 심지는 굳어지고, 처신은 더욱 의연해진다.

15 02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재진절량, 종자병, 막능흥.
자로온현왈: “군자역유궁호?”
자왈: “군자고궁, 소인궁사람의.”)

(공자가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계시면서 양식이 떨어지니 따르는 자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자로가 성난 얼굴로 공자를 뵙고는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궁하며 더욱 단단해지고, 소인은 궁하면 넘친다.(비열하고 방종하여 못하는 짓이 없다.)"

When he was in Chan, their provisions were ex- hausted, and his followers became so ill that they were unable to rise
Tsze-lu, with evident dissatisfaction, said, ‘Has the su- perior man likewise to endure in this way?’
The Master said, ‘The superior man may indeed have to endure want, but the mean man, when he is in want, gives way to un- bridled license.’

군자고궁

+ <공자성적도>~재진절양(在陳絶糧) 자세히
공자가 수난당한 이야기의 절정은 <재진절양(在陳絶糧):진나라에서 식량이 떨어지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초(楚)나라 소왕(昭王)의 초빙을 받고 가는 중이었다. 초나라를 가려면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를 지나가야만 했다. 진나라와 채나라는 공자가 초나라에 입국하는 것을 막으려했다. 공자가 초나라에 등용되어 강국이 되면 인접한 두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사를 보내 공자 일행을 포위했다. 시간이 흐르자 식량이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제자들 중에 병에 걸린 환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공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한 모습으로 시를 읊고 거문고를 연주했다. <재진절양>은 그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제자들에 둘러싸인 공자가 땅바닥에 앉아 있다. 공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에게 수업을 하고 있다. 공자가 시를 읊자 제자들이 진지한 자세로 듣는다. 그들을 포위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저 한가롭게 소풍 나온 사람들의 야유회 장면을 그린 것 같다. <재진절양>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운명을 향해 고개 숙이는 일이 없는 철학자의 평정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 공자를 제자라고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위기에 처해서도 한가롭기만 한 스승을 보고 화가 난 자로(子路)가 공자께 툴툴거렸다.
“군자도 곤궁해질 때가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곤궁함을 굳게 버티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아무 짓이나 한다.”

『논어』「위평공」편에 나오는 얘기다. 이 상황에 대해 『여씨춘추』에는 좀 더 자세히 묘사돼 있다. 자로와 자공(子貢)이 곤궁함에 대해 불평하자 공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곤궁함은 ‘쌀밥이 떨어지고 명아주 국을 끓일 쌀가루가 없는 것’이 아니라 ‘군자가 도에 궁색해진 것을 일컫는 말’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지금 공자가 ‘인의(仁義)의 도를 껴안음으로써 안으로는 자신을 살펴봐서 도에 꺼림칙한 것이 없고 어려운 일을 당해 덕을 잃지 않았으니’ 지금의 상황은 결코 곤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자공은 지금까지 ‘하늘이 얼마나 높은 지도 몰랐고, 땅이 얼마나 깊은지도 몰랐다’는 얘기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결국 이 때의 수난은 자공이 초나라에 알림으로써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일연의 사건들은 공자가 69세 때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14년 동안 계속 됐다. 그러나 공자는 천하에 도가 행해지고 봉건적인 예악질서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신념을 결코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의 이상과 목적은 이상적인 봉건질서의 주창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라 여겼다.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공자는 끊임없이 성군(聖君)을 찾아다녔고 정치적 출구를 모색했다. 공자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이것은 공자가 유랑 중에 견뎌야만 했던 또 다른 환난이었다.

*이 글은 '주간조선 2284호에서 가져왔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8&nNewsNumb=002284100025

군자와 소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재진절양

weekly.chosun.com


+ <세한도에서 읽는 군자고궁>

추사의 歲寒圖를 보면, 군자고궁을 읽을 수 있다. 歲寒의 궁핍한 상황 속에서도 지조와 의리를 잃지 않는 松柏의 固窮을 그렸다. 송백은 자신의 모습이요. 제자 우선(이상적)의 모습이다. '세한송백' 은 <논어>0927에서 가져왔다.

김정희, 세한도 일부

https://munchon.tistory.com/m/1543

0927 歲寒孤節의 아름다운 이야기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사연이다. "우선이, 이것 보시게. 완당이.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 측백나무는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송백은 사철을 통

munchon.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