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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미술

한국근현대미술전 2-배운성/이쾌대/변월룡/황용엽

by 문촌수기 2023. 8. 29.

2. 디아스포라 민족사의 여백
배운성/이쾌대/변월룡/황용엽

민족분단 70년. 이 시간과 공간은 비단 이데올로기의 분단, 국토의 분단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든 분단이라 해야옳다. 미술의 남북 분단도 장장 70년이 이어지고 있다. 분단의 미술사!동족상잔의 6· 25 전쟁을 거치면서 미술계의 인적 구조는 대대적인 변혁을 겪었다. 이른바 '월남 작가'와 '월북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뼈아픈 이산의 미술사가 탄생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분단 고착화와 높은 단절의 벽
이번 전시는 이 분단의 미술사를 조명하는 섹션을 꾸몄다. 자칫 전설로 사라질 뻔했던 월북작가의 유산이극적으로 부활해 우리와 다시 만난다. 또 '제3의 한국' 해외 한인 작가의 작품도 소개한다. 통일의 미술사, 민족 미술사를 염원하는 자리다.

배운성은 유럽 유학생 1호. 베를린과 파리를 무대로 유럽 화단의 중심에서 활약한 글로벌 아티스트 배운성의 작품은 파리에서 극적으로 한국으로 귀환했다. 이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다. 이번 전시에선 베를린에서 그린 대작 <가족도>가 소개된다.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거봉 이쾌대는 이번 전시에 해방 공간의 대표작 <해방고지>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으로 격동의 대서사를 보여준다. 월남 화가 황용엽은 실향의 가열한 체험을 극한 상황의 인간 형상으로 그려낸다. 이번 전시의 유일한 생존 작가다. 카레이스키(러시아의 고려인)로 레핀미술학교 교수를 지낸 변월룡이 1950년대 북한 체류 때 그린 평양 풍경과 인물도 눈길을 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면모는 동판화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배운성

모자를 쓴 자화성, 자화상(아틀리에)
가족도

변월룡
평양의 누각 그림에는 6.25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림 속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 겨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평양대동문, 평양의 누각(1954)
6.25 전쟁의 비극
분노하는 인민

이쾌대

드로잉(가족)
드로잉 확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이쾌대가 평화로운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당당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다. 배경에는 논과 밭이 펼쳐진 마을 길을 물동이를 머리에 인 아낙네들이 걸어가고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화면 전면에 크게 그려진 이쾌대는 파란 원색의 두루마기에 서양식 페도라를 쓰고 있으며, 왼손에는 서양의 팔레트를, 오른손으로는 동양의 모필 붓을 들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배경과 소품에서 한국적인 것을 강조하면서도 서양적인 것을 한화면에 함께 그려냄으로써 한국인이자 서양화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입을 꾹 다물고 진지한 눈빛으로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예술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라고 역설하며 해방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많은 걸작을 남긴 이쾌대의 소명의식과 책임감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해방공간에서의 드로잉
군상1. 해방고지

아래> 해방고지 일부 확대
1948년 제2회 조선미술문화협회 전람회에 출품됐던 <군상 1_해방고지>는 네 점의 <군상> 연작시리즈 중 하나이다. 2m가 넘는 화면에 30명에가까운 사람들이 짜임새 있게 교차되어 긴박하고역동적인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화면 왼쪽에는해방을 알린다는 제목 그대로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려오고있는 두 여인이 보인다. 그러나 이미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과 그들을 안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 싸움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군중 사이에서 이들을 똑바로 맞이하는 인물은 얼마 되지않는다. 절망과 희망, 환희와 비극이 공존하고 있는 <군상 1_해방고지>는 해방의 기쁨과 다가오는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는 보기 드문 대작에 유례없던 누드 군상으로, 그동안 다뤄지지 않았던 새로운 민족적 소재를 사실적인 인물 묘사로표현해 냈다. 한국 근대 리얼리즘 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황용엽
황용엽은 1931년 평양시 신양리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말기 미군의 폭격을피해 강서로 이사를 한 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당시 북한 유일의 미술학교였던 평양미술대학에 2기로 입학했다. 황용엽은 어린시절 유모 남편의 형이 운영하던 책방에서『미즈에』, 『아틀리에』,『예술신조』와 같은 일본의 미술 잡지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국제 미술을 접할 수있었다. 그러나 황용엽이 입학한 당시 평양미술대학의 교육은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한 '프로레탈리아 미술' 육성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잡지를 통해접한 해외 동시대 미술의 자유로운 표현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 1950년 6·25 동란 가운데 서울로 내려온 황용엽은 국군에 투입되었으나 이듬해4월 총상을 입고 제대하였고, 미군정기엔 초상화 등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1953년 황용엽은 비로소 홍익대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며 다시 미술공부를 재개하고, 1957년 졸업한다.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하고, 북한과 남한 두 사회의 모순을 몸소 겪은 황용엽이 늘 화두로 삼은 주제는 바로'인간'이다. 인간의 존재와 작가 자신의 경험, 그리고 시대의 비극을 표현하는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나갔다.

인간, 1974
인간, 1974
인간, 1977
인간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