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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미술

한국근현대미술전4 - 천경자, 최욱경

by 문촌수기 2023. 9. 7.

1) 천경자(千鏡子, 1925-2015)
천경자는 개성 넘치는 화풍과 예술성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큰 족적을남겼으며 대중적 인지도에서도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작가다. 1941년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쿄여자 미술전문학교에서 일본화를 공부하게 된다. 이때 인물화가인 고바야가와 기요시(小早川清,1899-1948)를 사사하여 인물화를 집중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귀국 후에는 1943년, 1944년 연달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모교에서 미술교사로 지내던 중 1949년 서울에서의 개인전으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천경자의 초기 화풍은 일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세밀하고 사실적인 채색화의 경향을 띠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백양회(白陽會),모던아트협회 등 그룹 활동에 참여하면서 과감하고 개성적인 화풍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천경자의 현대적 채색화는 당시 동양화단에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천경자는 동양화 안료에  테라핀유를 혼합하거나 종이를 구겨 질감을 살리는 기법 등 실험적인 시도로 동양화라는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동시에 자신의 삶을 녹여낸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구즈코(Cuzco). 1979, 24x27c24x27cm 종이에 채색, 개인소장

1960년대 후반부터 천경자의 작품 창작을 추동한 건 여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국의 정취를 체험하고 이를 자신만의 감수성으로 승화하여 수많은 습작과 작품을 남겼다. <구즈코>(1979)는 천경자가 중남미 여행 후 그린 작품이다. 구즈코 고원의 자연과 잉카 유적의 폐허를 마주하며 느낀 벅찬 감동과 감상이 담긴 이 작품은 화면을 휘감는 땅의 곡선, 페루인 의상과 꽃을 처리한 원색에서 생동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른쪽 아래 위치한 바위에 있는 뱀의 형상이다. 뱀은 천경자에게 각별한 모티브였는데 엉겨 붙은 수십 마리 독사를 그린 초기 대표작 <생태>(1951)부터 뱀은 삶의 고통과 극복의 상징적 소재였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도 페루 바위에 조각된 뱀의 형상을 주목했던 천경자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여인. 1986, 26x23.3cm,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여행지에서 만난 여인들은 천경자 작품에 주요 모티브로 자주 등장했다. 태국 여인을 그린 <여인>(1986)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화려하고도 이국적인 그 나라 고유의 미는 천경자에게 매료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창백한 피부 화장과 눈을 강조한 여러 겹의 색조 화장, 이의 대비가 되는 붉은 의상과 머리의 꽃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천경자가 제작한 수많은 여인상은 사실적인 묘사로 그려지지 않았고, 인종을 초월해 모두 비슷한 인상을 준다. 텅 빈 듯하면서 번득이는 눈동자는 천경자 여인상의 특징이자 작가의 페르소나로 해석되기도 한다. <여인>도 마찬가지로 화려한 장식에 둘러싸였음에도 섬뜩한 듯 또는 신비로운 듯한 여인의 눈동자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초원 II, 1978, 105.5x130cm, 종이에 채색, 서울미술관

<초원 II>(1978)는 1970년대 중반 천경자가 아프리카 여행 후 제작한 그림이다. 코끼리 등에 누운 알몸의 여인은 이 작품에 설화적이고 신비로운 인상을 더하고 있다. 당시 여성 혼자 아프리카를 여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작가는 당시 아프리카 여행을 강행한 자신의 결정을 '광기'로 표현할 정도였다. 그만큼 아프리카에 강하게 이끌렸다. 이것은 바로 '살고 싶은 집념'이었으며, 화가로서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욕망의 분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원초적 자연에 크게 자극을 받은 천경자는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천경자의 작업 방식은 여행지에서 즉흥적으로 느낀 감흥을 스케치에 담고 이를 다시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도 높은 채색화로 그리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프리카의 이국적인 풍경과 강렬한 색상, 소재는 천경자의 감수성과 독특한 표현으로 더욱환상적인 화면으로 탄생한다.

꽃과 나비, 1973, 71.5x89.5cm,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꽃과 나비는 천경자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특히 천경자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늘 꽃과 함께 그려지곤 했는데 <꽃과 나비>(1973)의 경우 꽃과 나비가 장식이 아닌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화면 중앙에 커다란 팬지꽃, 히비스커스를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채로운 꽃들과 한데 어울린 나비는 선명한 색상과 반투명한 채색으로 중첩되어 아련하고 몽환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언젠가 그 날, 1969, 195×135 cm, 종이에 채색

2) 최욱경(崔郁卿, 1940-1985)
최욱경은 1940년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최욱경의 부모님은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인 최욱경에게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0년 김기창과 박래현 부부가 운영하는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후 서울예고에 진학한 최욱경은 당시 교사로 재직하던 김창열, 문학진, 정창섭과 같은 한국 미술계 주요 중진 작가들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195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한 최욱경은 대학교 3학년 때 《제2회 한국미술가협회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같은 해 국전과 이듬해 국전에도 입선, 1962년 제1회 신인예술상을 수상하는 등 신진작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1963년미국 크랜부룩 미술아카데미(Cranbrook Academy of Art)로 유학을 떠난 최욱경은 당시 미국 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받게 된다. 강렬한 색채와 거침없는 필선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가던 최욱경은1971년 일시 귀국을 계기로 한국적인 색채 탐구에 몰두하기도 하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lt;화난 여인&gt;(1966), 137x174cm, 캔버스에 유채, 리움미술관

<화난 여인>(1966)은 최욱경의 미국 활동 초기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받은 화풍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세로 137cm, 가로 174cm의 대형 화면은 대담한 구성과 색상을 더욱 강렬하게 와닿게한다. 검정과 회색조의 커다란 면 분할은 그 위에 배치된 노랑, 빨강, 파랑의 선명한 원색을 안정적으로 받쳐주고, 색채를 더욱 강조한다. 또한 거침없는 붓질과 나이프를 활용해 넓게 펴 바른 면은 화면에 역동성과 긴장성을 더하고 있다. 특히 흑백과 화려한 색상을 적절히 대비한 색상 실험은 미국에서의 초기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특징이다.

줄타기, 1977, 225x195cm, 캔버스에 아크릴, 리움미술관

1960년대 최욱경의 작품이 자유롭고 대담한 색채 효과를 통한 비정형적 화면 구성을 주로 보였다면, 1970년대 후반 제작한 작품에는 비교적 배경과 형상이 분리되는 경향을 보인다. <줄타기>(1977)는 붉은색 바탕 위에 붉은 원형을 다시 그리고 가는 흰색 수직선을 중심으로 유연한 곡선의 추상적인 형상을 그려 넣은 작품이다. 각각의 형상들은 유기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고, 꽃이나 생물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더욱 또렷하고 선명한 윤곽선을 보이며, 1960년대의 표현적인 회화보다 구성적이고 정돈된 화면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최욱경의 강점인 원색과 검정의 적절한 대비를 통한 색채 효과 역시 이 작품에서도 돋보인다.

환희, 1977. 227x456cm, 캔버스에 아크릴, 국립현대미술관

<환희>(1977)는 세로 227cm, 가로 456cm의 대작이다. 최욱경은 라스웰 재단의 입주 작가 지원에 선정되어 1976년 10월부터 1977년 8월까지 10개월간 뉴멕시코에 있는 라스웰에서 생활했다. 최욱경은 후에 이 시기에 대해 “이때 내 생활의 24시간은 내가 바랐던 바로 그런 분위기”([여고시대], 1972.2.)였다고 회고했다. 그 곳의 맑은 자연을 만끽하며 현실을 떠나 예술에 탐닉할 수 있는분위기였다는 말처럼 이 시기 최욱경은 밝은 분위기의 작품을 다수 남긴다. 최욱경이 느낀 환희에 찬 내면 세계를 표현하듯 이 시기 제작한 <환희>는 밝은 파스텔톤의 노랑 빛 바탕색 위에 경쾌하고부드러운 색채의 형태들이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형태들은 마치 화면 위를 부유하는 듯 자유롭게 충돌하고 혼합되면서 리듬감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