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의 수연산방을 찾기 전에는 박태원이 누군지 몰랐다. 구인회(九人會, 1933-1936) 회원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학창시절 배운 기억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이제 수연산방의 주인인 이태준을 듣고, 시인 이상과 정지용을 알고부터 박태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영화감독 봉준호의 외할아버지라는 사실만으로 관심이 크게 끌렸다.
월북작가였기에 우리 문단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던 것이다.
박태원은 일제강점기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홍길동전', '천변풍경'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다. 1909년에 태어나 1986년에 사망했다. 청소년기부터 시와 콩트를 발표하며 문학소년의 길을 걷다가 일본에 잠시 유학했고 1930년부터 소설가로 활동했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九人會)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워 ‘기교파’ 또는 ‘예술파’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월북하여 조선문학가동맹, 조선문학건설본부 임원을 역임했고, 문우였던 이태준·안회남과 함께 한국전쟁에도 참여했다. 1956년 남로당계 숙청으로 작품활동을 중단했다가 이후 작가로 복귀했다.
⊙ 구인회(九人會)의 한사람
⊙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1946년 월북)을 따라 6.25전쟁 중(1950년 09월)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
⊙ 북한에서 최고의 대하 역사소설가로 알려짐
⊙ 그의 5남매 중 맏딸 설영(雪英)은 북한에 생존, 평양기계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 둘째딸 소영(小英)의 남편은 국내 디자인 1세대 봉상균이며, 그들 슬하의 2남 2녀 중 막내는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최고상’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감독 봉준호.
곧 박태원의 외손자
⊙ 1988년 7월 19일 월북작가 해금조치
성북동의 박태원 집터
소설가 구보(仇甫) 박태원(1909~1986)은 1948년부터 1950년 월북할 때까지 이곳 성북동 230번지에 살았다. 1947년 <약산과 의열단>을 백양당에서 출판한 그는, 이듬해 인세 대신 이곳의 싸리 울타리두른 초가집 한 채를 받아 이사하였다. 약산(若山)은 독립운동가였던 김원봉의 호이다.
백양당 주인 배정국의 별장 승설암(현, 국화정원 한정식당)과 절친했던 소설가 이태준의 집(현, 수연산방 전통찻집)이 길 건너편에 있다.
박태원의 둘째 아들, 재영씨가 들려주는 유년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태원은 1940년 돈암동 487-2번지에 집터를 마련하고 손수 기와집을 짓고 가족들과 화목한 가정을 일구고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비가오면 지붕이 새서 방안에 빗물받이 양동이를 갖다 놓고 흘러넘친 빗물을 연방 훔치기 바빴고, 박태원은 물이 안 떨어지는 한쪽 구석에 앉아 《조광》에 연재하는 <수호전>을 쓰고있었다. 겨울이면 난방이 제대로 안 되고 외풍도 심했다. 심지어 도둑까지 들어 결국 돈암동에서 성북동 230번지로 이사를 온 것이다.
성북동 집은 초가(草家)였다. 재영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마루 뒷문을 열면 뒷동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주 시원했다. 집 뒤에는 작은 폭포가 있고, 매미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마당에는 앵두나무·복숭아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 복숭아와 앵두를 따서 손님들에게 대접하기도 했다...가끔 식구들이 둘러앉아 직접 딴 과일을 먹을 때면 어머니는 아버지 원고를 읽어 주시고 누나나 형은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곤 했어요. 어떤 때는 막 재미있어 지려는데 그날 연재분이 끝나 누나들이 아버지에게 ‘주인공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야 나도 모르지. 내일이 되어야 알 수 있는 거란다’고 하시며 웃으셨어요.”
빅태원은 1947년 9월 백양당 출판사에서 나온 《약산과 의렬단》이란 책을 썼다. 독립투사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배정국 사장의 부탁으로, 아버지가 직접 김원봉을 만나 인터뷰하고 역사자료를 모두 조사해 쓴 작품인데 인세로, 성북동 집을 배 사장이 주었던 것이다. 박태원은 운치 있는 집을 만들려고 싸리 울타리를 치고, 대문도 싸리문으로 만들었다. 당시 성북동에 ‘싸리로 울타리를 친 집’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집이었다.
그렇게 온 가족이 오손도손 재밌게 살 것 같았지만 조국은 이념으로 갈라지고 급기야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지고만다. 그리고 전쟁의 광풍은 박태원의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흔들어 놓는다. 가장인 박태원은 가족들을 두고 문우들과 함께 월북하였고, 후에 박태원의 동생 문원이 태원의 장녀 설영을 데리고 월북하였다.
아내 김정애는 남편의 사진을 본 지 3주 후 사망
“어머니가 그 사진을 보시고 3주 뒤인 1980년 4월 21일 돌아가셨어요. 나이 예순여덟이셨어요. 어머니는 늘 아버지 소식을 기다렸어요. 답답한 마음에 점을 보면 ‘당신은 반드시 죽기 전에 남편을 만난다’는 점괘가 나왔어요. 미신이지만 그게 어머니에게 희망이었지 않았을까요? 결국 형이 찾아온 아버지 사진을 보시고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사진으로나마 두 분이 상봉하신 게 아닐까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머니는 6·25 당시 여맹위원회에 나와 일하라는 강압을 거역할 수 없어 부역을 하셨던 이유로 9·28 수복 직후 사형언도까지 받고 복역했어요. 재심 청구로 사형은 면하고 5년이나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그때는 그런 부역이 자의냐 타의냐 하는 것을 입증할 자료도 없었고, 그러한 입증에 끼어들 사람도 없었어요. 많은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그러니까 1955년 봄인가 어머니는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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