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 김환기와 향안 변동림이 노시산방 옛 주인이었던 김용준을 배웅하고 있다. 노시산방의 새 주인은 수향산방으로 현판하였다. 늙은 나무의 감은 다 익어가고 날은 차다.
■ 김용준의 노시산방(老枾山房, 기거 1934-1944)
1948년 <근원수필>이 출판된 당대에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 수필은 김용준”이라는 말을 들을만큼 문사철에 뛰어난 화가, 김용준(近園 金瑢俊· 1904∼1967)이 성북동으로 이사를 한 것은 1934년이었다. 그때만해도 그 곳은 집 뒤로 꿩은 물론 늑대도 가끔 내려올 만큼 산골이다. 하지만 김용준은 '뜰 앞에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라 할 정도로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 집으로 왔다.
한 해전 먼저, 성북동 수연산방에 자리잡은 이태준(1904-1978, 호는 尙虛)이 그 감나무의 늙음을 기려 '노시사(老柹舍)'라 하였고, 근원이 이를 받아 자신의 성북동 집을 '노시산방(老柹山房)'이라 이름지었다. 이 때가 1936년, 동갑내기 상허와 근원이 서른 셋이었을 때이다.
어느 해 가뭄이 길어 샘과 개울물이 마르고 화초목들이 죽어 나가던 때에도, 근원은 '노시산방의 진짜 주인공'인 감나무 만큼은 살리기 위해 매일같이 십 전짜리 물을 서너 지게씩 사다가 주기도 했다. 근원이 그려서 수화에게 준 <수향산방 전경> 그림에도 감나무는 주인공 같이 등장한다.
그러던 그 집을 근원이 1944년에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에게 팔고 양주로 이사했고, 1946년 서울대 미술학부 동양화과 초대교수로 부임하면서 경운동에 세들어 살았다. 1948년경 서울대를 사직한 이후 다시 의정부로 이사해 '반야초당'이라 이름짓고 살았다.
노시산방을 판 뒤의 이야기는 <근원수필>, 육장후기(
鬻莊後記, 집판 뒤의 기록)에 기록되어 있다.
'좋은 친구 수화에게 노시산방을 맡긴 나는 그에게 화초들을 잘 가꾸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의정부에 새로 마련한 삼간두옥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한 채 있던 집마저 팔아먹고 이렇다는 직업도 없이 훨훨 날 것처럼 자유스로운 마음으로 천석고황이 되어서 자고 먹고 하다 보니 기껏해야 고인의 글이나 뒤적거리는 것이 나의 일과일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올라온 뒤, 근원은 노시산방의 새 주인 수화를 만났다. 수화의 말이 '노시산방을 사만 원에 팔라는 작자가 생기고 보니 근원에게 대해 대단히 미안한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근원의 집을 산 후에 집 값이 많이 올라서, 좋아라하는 마음보다 근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수화는 근원에게 가끔 돈도 주고 그가 사랑하는 골동품도 갖다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만치 수화는 인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근원도 인정을 갚기 위해서였던가? 아홉살이나 어린 수화에게 수하소노인이라며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老'자를 좋아한 근원이 서른 다섯 살의 수화를 가리켜 '어린 노인(少老人)'이라고 명명한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수화는 집 값이 올랐으나 그 집을 팔지도 않았다면 수중에 여윳돈도 없었을 것인데, 빚을 갚는 양 근원에게 가끔 돈을 건냈다는 것이다. 수화의 처 향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녀의 기록을 봐도 그 집도 형편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 김환기의 수향산방(樹鄕山房, 기거 1944-1948)
김환기는 1943년 봄, 백석의 친구인 노리다케 가츠오의 소개로 변동림(구본웅의 이모이자, 시인 이상의 처)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수화는 변동림과 재혼하면서 근원에게서 인수한 '노시산방'을 '수향산방(樹鄕山房)'이라고 고쳐서 이름지었다.
자신의 호, 수화(樹話)와 처의 필명, 향안(鄕岸)의 첫글자에서 따왔다. 향안이라는 필명도 김환기가 가진 호였는데, 변동림이 달라고 해서 준 것이다. 집안의 결혼 반대를 뿌리치며 새로운 인생을 살 모양새로 성과 이름을 다 바꿔서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신혼살림은 비참했다. 김향안(1916-2004)의 글을 읽어보자.
"마지막으로 앞마당 반이나마 차지하는 고목이 된 감나무를 베었다. 아주 죽진 않았으니까 조금이라도 감이 열릴텐데 하고 아이들이 섭섭해 하는 것을 나는 눈 딱 감고 서툰 톱질을 하고 도끼질을 해서 패놓으니, 한 이틀 땔나무로 풍족했다. 이것이 떨어질 때까지는 나무를 들여 줄테지 믿었으나 역시 허사였다. 이제는 아무리 앞뒤 마당을 둘러보아도 패어 땔 만한 나뭇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노모가 안 계시고 어린 것들이 없다면 이토록 생활에 무능한 남편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그대로 냉방을 체험시켜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아이들은 둘째치고도 노래(老來)에 (전라도 신안섬에서 서울로 올라온)타향살이 고생 막심한 노모를 위로할 길이 없다."
- 김향안, 1947년12월 <월하의 마음>
아무튼 수화도 그 집의 늙은 감나무를 근원만큼이나 끔찍히 사랑했는데, 가난에 찌던 향안이 그 감나무를 눈 딱 감고 패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형편이 있지만 '생활에 무능한 남편'에 대한 원망도 컸으리라.
김향안의 글을 좀더 읽어보자.
"노시산방이 지금쯤은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도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오늘도 나무는 안 들어온다. 옥동(玉洞)같이 추운 날씨다. 곧 학교 간 아이들이 손을 호호 불고 돌아올 테지. 골방 가득히 찬 그림틀들을 부수면 한 주일 나무는 넉넉하리라."
그러나 향안은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끝끝내 참아내며 수화의 그림들을 지켜 내었다. 성북동의 노시산방과 감나무는 사라졌지만, 오늘날의 김환기(1913~1974)의 명성을 크게 이루어내었다.
1992년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개관하였으며, 환기미술관 안에 '수향산방'도 뒀다.
그때 그 시절의 노시산방, 수향산방을 찾아갔지만 그 흔적은 존재하지 않고 터만 남아있다. 상허 이태준의 옛집, 수연산방에서 만해의 심우장을 찾아 걷다보면 한정식 국화정원 식당이 나온다. 그 길따라 5분 만 더 올라가면 수월암이 보인다. 그 아래 청기와집이 성북구 성북로 168(성북동 274-1), 노시산방터로 추정된다.
김향안의 말,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처럼 그때 그 시절의 주인공과 무대는 사라져도 그들이 남긴 이야기와 예술은 영원히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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