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더블리너스(The Dubliners)는 1962년에 조직된 아일랜드의 포크 음악 그룹이다. 그룹명은 처음에 '로니 드루 발라드 그룹(Ronnie Drew Ballad Group)'이었으나 루크 켈리가 들고 있던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의 이름에서 따 와서 '더 더블리너스'로 바꿨다고 한다.
○ https://youtu.be/bSEmFvuUXWk?si=jrIr4QEfP68AX8NK
한참 세월이 지나 노인이 다 된 '더 더블리너스'의 '리버풀을 떠나며(The Leaving of Liverpool)'를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포크송과 컨추리풍이라서 금새 친해졌다. 가락는 신나고 힘차고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 속에 슬픔이 깔려있다. '떠난다'는 말 속에서는 서글픈 사연이 스려있다. 마치 붉은 악마와 윤도현 밴드가 부르던 '아리랑 응원가'와 같아 그 사연이 더 궁금해졌다.
<가사>
-(1절)
Farewell to Princess landing stage, River Mersey, fare-thee-well
I am bound for California
A place I know right well
(후렴)
So fare-thee-well,
my own true love
When I return,
united we will be
It's not the leaving of
Liverpool that grieves me
But my darling,
when I think of thee
-(2절)
I am bound for California
By way of stormy Cape Horn
I will write to thee a letter, love
When I am homeward-bound
(후렴)
-(3절)
I have shipped on a Yankee clipper ship
Davy Crockett is her name
And Burgess is the captain of her
And they say that she's a floating hell
(후렴)
-(4절)
I have sailed with Burgess once before
I think I know him well
If a man's a sailor, he will get along
If not, then he's sure in hell
(후렴)
(5절)
Farewell to Lower Frederick Street
Anson Terrace and Park Lane
I am bound away for to leave you
And I'll never see you again
(후렴 )×2
* landing stage 승선 부잔교(浮棧橋) 또누 승선용 발판
* River Mersey> 머지강, 맨체스트에서 리버풀로 흐르는 강
* Cape Horn> 남미대륙(칠레) 최남단의 곶.
* Yankee clipper> 3개 돛단배
* Davy Crockett> 돛단배이름
1853년 미국 코네티컷에서 제작한 중형 쾌속선.
* John A. Burgess> 1860년부터 1874년까지 Davy Crockett호의 선장.
1874년 4월 20일, 승무원이 반란을 일으키고 출발이 5일 동안 지연되었을 때 화물 밀을 가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풀로 항해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다.
1874년 6월 25일, Burgess 선장은 뉴욕에서 리버풀로 가는 항해 중 강풍에 실종되어 익사했다. 동료 존 앤더슨(John Anderson)이 배의 지휘를 맡았다.
1874년 8월 10일, 107일 만에
Davy Crockett은 리버풀에 도착했다.
이 당시, 파나마 운하가 개통(1914년 8월 15일)이전이라서 뉴욕에서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SF)로 또한 SF에서 태평양 남단의
남미의 케이프 혼을 거쳐서
대서양을 항해하여 영국의 리버풀로 갈 수 있었다.
*Lower Frederick Street>
펜실베이니아주 몽고메리 카운티
1940년대 초 Frederick Street의 이 사진에는 미국산 자동차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노래의 유래?
쾌속선 David Crockett은 1853년 코네티컷 주 미스틱에 있는 Greenman조선소에서 진수되었다.
그 배는 돛 세 개를 짊어지고 뉴욕
과 샌프란시스코 사이를 꾸준히 빠르게 달리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John A. Burgess 선장이 배를 지휘했던 1863년에서 1874년 사이의 어느 시점 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바다 노래 "The Leaving of Liverpool"의 주제이다 . Burgess는 터프한 선장으로 알려졌다. 그는 1874년 배 밖으로 실종되었다
그러나, 가사가 다른 여러 버전의 노래가 있어서 더 궁금했다.
"더블리너스, 더블린의 사람들? 더블린은 아일랜드 수도잖아? 그런데 이들이 왜 리버풀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로 가는거지? 리버풀은 잉글랜드 도시인데. ..
이 두나라는 한일관계 처럼 앙숙이라던데, 무슨 까닭이 있을까?"
그렇게 궁금한 꼬리를 밟으며 뒤지다가 아래 영상의 글을 읽었다.
나의 결론을 먼저 정리하자면,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은 대기근시대(1845-1852)에 살아남으려고 난민이 되어 영국의 리버풀로 왔다가, 다시 신대륙의 캘리포니아로 자의든 타의든 희망을 찾아 떠나는 슬픈 역사를 담고있는 노래였다.
디아스포라(Diaspora)의 고통을 겪어본 민족이기에 이 노래의 슬픈 정서가 그렇게 쉽게 다가왔나보다.
먼저, 하모니카로 즐겼다. 마치 오래전부터 번안되어 우리가 즐겨 불렀던 노래같아서 어렵지는 않았다.
■다이아토닉, HOHNER 마린밴드Bb+밥딜런시그니처C
https://youtu.be/vTzSymiC10E?si=J0mWbZEenC0GruW6
(1절)
Fare thee well to you
My own true love
I am sailing far far away
I am bound for California
But I know that I'11 return some day
(후렴)
So fare thee well
My own true love
When I return united we will be
It's not the leaving of Liverpool
That grieves me
But me darling
When I think of thee
(2절)
I have sailed on a
Yankee sailing ship
The Davey Crockett is her name
And Burgess is the captain of her
And they say she's a floating hell
(3절)
Oh the sun is in the harbour love
And I wish that I could remain
For I know 'twill be a
Long long time'Til I see you again
The Irish connection with Liverpool is centuries old.
A high percentage of the population have Irish heritage.
At the time of An Gorta Mór(The Great Hunger) many thousands of Irish fled to the city.
The great champion for the rights of the working man and renowned Trade Union leader, 'Big Jim Larkin' was born in Liverpool.
Throughout the dreadful years of the Great Hunger, hundreds of thousands of Irish refugees arrivedin Liverpool.
With little or no help from thegovernment, many Liverpool citizens, often themselves livingin dire poverty, gave generously to help the sick, the starving and the dying Irish migrants.
Hundreds of thousands would eventually sail on to America Canada, Australia and New Zealand, while many would remain to make Liverpool their new home.
Liverpool Famine Memorial. Site of St. Luke's Church, corner of Berry Street and Leece Street.
ㅡ www.seanbradysinger.com
아일랜드와 리버풀의 관계는 수세기 동안 이어졌다. 리버풀 인구의 많은 비율이 아일랜드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
대기근(An Gorta Mór) 시대에 수천 명의 아일랜드인들이 이 도시로 도망쳐 들어왔다.
노동자 권리의 위대한 옹호자이자 유명한 노동조합 지도자인 '빅 짐 라킨(Big Jim Larkin)'은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대기근의 무서운 세월 동안, 수십만 명의 아일랜드 난민들이 리버풀에 도착했다. 정부의 도움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많은 리버풀 시민들은 극도의 가난 속에 살며, 아프고, 굶주리고, 죽어가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 많은 사람들이 리버풀을 그들의 새로운 고향으로 만들기 위해 남아 있는 반면, 수십만 명의 시민들은 결국 아메리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향했다.
■ 아일랜드 '대기근' 역사
아일랜드 대기근(Great Famine, 아일랜드어: An Gorta Mór, An Drochshaol)은 1845년에서 1852년까지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백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다수가 해외로 집단이주한 사건을 말한다. 아일랜드 감자 기근이라고도 한다.
1840년대의 아일랜드 인구는 대략 850만명이었는데, 대기근 기간 중에 발생한 사망 또는 이주로 인해 전체인구 중 약 20%~25% 정도가 줄어들어 기근 후 약 600만명 정도가 되었다. 기근의 주된 원인은 감자 역병 때문이었으나 그 외에도 당시 아일랜드를 식민통치하고 있던 영국의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차별정책이 사태가 심각해지도록 만든 또 다른 원인이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역사적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인들의 영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으며 독립의 열망이 증가하였다.
대기근의 시작
기근은 서부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서서히 퍼져간 기근은 매우 끔찍했다. 동부지방에서 감자가 아직 어느 정도 수확이 되고 있었을 때 서부지방은 그야말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길거리에는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있고 사람들은 마치 살아있는 시체와 같았다.
영국의 외면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 당시 아일랜드섬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대기근이 아일랜드 민중들의 생존권을 존중하지 않는 영국인 지주들의 지나친 착취 때문인데도 하느님의 뜻이라느니, 아일랜드인들을 더 풍유롭게 할 디딤돌이라느니 하면서 외면하였다. 심지어는 '멍청하고 게으른' 아일랜드 사람들의 탓으로까지 돌렸다. 게다가 1848년에는 곡물법을 폐지시키고 밀 수입을 자유화하였다. 그리곤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아일랜드에서 생산한 밀을 본국으로 보냈다. 영국인 대지주들은 아일랜드인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자 그들을 강제로 내쫓았고 쫓겨난 그들은 벨파스트에 있는 빈민구제기관까지 걸어가야했다. 전 국토에서 빈민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대부분 길거리에서 아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인해 죽었다.
일부 인도주의 지식인들
인도주의적인 영국인 지식인과 의사들이 아일랜드 빈민들을 보살피기 위해 영국 정부에 식량 원조를 요청하여 약간의 식량을 받아냈다. 그러나 아일랜드 민중들을 돌보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고, 원조받은 식량의 양 또한 적었다. 이 영국인들은 아일랜드 민중들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한 영국 언론인은 당시 아일랜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의 글에는 영국의 착취, 외면, 억압으로 인한 아일랜드 민중들의 고통이 자세히 표현되고 있다.
"이 세상에 식민지와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고 있는 나라는 수도 없이 많다. 또한 가난한 나라도 많다. 그 나라에는 거지들이 득실거린다. 그러나 한명도 빠짐없이 전 국민이 거지들인 나라는 아일랜드밖에 없을 것이다. (중략)
이들의 모습은 인간의 살이 어떻게 뼈와 분리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밤마다 공포에 떨었다. 쥐들이 그들의 살을 파먹었고 다음날 아침이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살점이 떨어져 나간 채로 죽어있었다. (중략)
어린이들의 배는 (영양실조로)곧 터질듯이 부풀어져 있었고, 전염병으로 인해 그들이 몸은 성한 곳이 없이 터져있었고, (영양부족으로 몸이 허약해져서)피가 흘러내렸다. 길거리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고 마을은 황폐화되었다. 그들은 영국인 대지주의 집 앞에 모여들어 식량을 요구했으나 곧 영국군이 그들을 쫓아냈다. (중략) 이곳은 지옥과 같았다."
오스만의 원조
1845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뒬메지트 1세가 아일랜드 농부들을 위해 10,000파운드를 보내겠다고 선언하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술탄에게 1,000파운드만을 보내라고 요청한다. 여왕 자신은 2,000파운드만을 보냈던 것이다. 술탄은 1,000파운드만을 보내는 대신 식량을 실은 배 세 척을 아일랜드로 보냈다. 일설에 의하면 영국 관리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식량선은 항구에 비밀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기근으로 인한 비극
아일랜드와 유럽의 인구변화
이 대기근으로 당시 800만이었던 아일랜드 인구중에서 1/4인 200여 만 명이 굶어 죽거나 이민선에 몸을 실었다. 먹을 것이 없던 아일랜드인들은 나무껍질 등을 먹으며 버텼으나 역부족이었다.
강제된 이민
생존자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외국으로 가는 배는 영국에서 건조된 배들로서 매우 허술하게 만들어졌다. 영국인들은 일부러 배를 부실하게 건조하였고, 내부를 불결하게 방치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배삯을 구한 이들로서 그나마 운이 좋았었다.
이 배들은 현재 일명 관선(棺船, Coffin Ship)이라 불린다. 외국으로 약 100여 만 명이 이주하였는데 그 중 60%가 육지에 발도 못 디뎌보고 배 안에서 역병으로 죽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는 무려 25,000명이 함께 매장된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은 캐나다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의 무덤이다. 캐나다에 발을 디딘 아일랜드인들은 배에서 감염된 역병으로 순식간에 죽어나갔던 것이다.
가사가 좀 다르다.
호주의 포크팝 그룹, The Seekers의 노래가 좋다.
이들도 어쩌면 아일랜드 후손이 아닐까싶다.
https://youtu.be/qouz6tSX_p4?si=a1MbQTZqpvTCb3bN
가사
Fare well to you,
my own true love
I am going far away
I am bound for California
And I know that
I'll return some day
(후렴)
So fare thee well,
my own true love
And when I return,
united we will be
It's not the leaving
of Liverpool that grieves me
But my darling,
when I think of thee.
(2절)
Oh, the sun is on the harbor love
And I wish I could remain
But I know it will be some
long time
Before I see you again
+더하기
1847년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이 발생하며 수백만의 이민자들이 뉴욕으로 이주해왔고 그 결과 1860년에는 뉴욕 인구 네 명중 한 명이 아일랜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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