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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와 청계천

삼일절에 찾는 탑골공원

by 문촌수기 2024. 2. 29.

오랜만에 찾았다. 아내는 이곳이 처음이란다. 삼일절에 즈음하여 찾으니 감회가 더욱 크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서인지 공원이 한산하다. 탑골공원 밖에서 안으로 이어진 줄은 점심식사 줄서기였다.

탑골공원 삼일문
탑골공원 조감도, 삼일문으로 들어갔다가 서문(낙원상가방향)으로 나왔다
탑골공원 팔각정, 독립선언서 낭독장소

탑골공원팔각정 塔谷公园八角亭
タプコル公園八角亭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 / 시대 : 1902년(광무 6)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38-1번지 탑골공원
팔각정은 1902년(광무 6)에 탑골공원 안에 지은 팔각형 정자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팔각정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 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었다. 전통과 근대의 건축기술을 두루 사용했던 건축가 심의석(沈宜碩: 1854~1924)이 주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탑골공원은 서울에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이 공원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져 있다. 이 공원은 고종 대 총세무사로 활약한 브라운(JohnMcleavy Brown, 柏卓安)이 건의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되었다.

삼일운동기념탑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 대원각사비(大圆觉寺碑)

대원각사비(大圆觉寺碑)
보물 제3호 / 시대  1471년(성종 2)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38-3번지
대원각사비는 1471년 (성종 2)에 세조(世祖)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分身)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흥복사(興福寺)터 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7년(세조 13)에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였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 위에 연잎을 새겨 비석 몸돌을 세울 자리를 만들었다. 몸돌은 머릿돌인 이수(螭首)와 한 돌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494cm이며 거북은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당대 문장과 글씨로 이름난 사람들이 비문을 맡았다. 김수온(金守溫)이 앞면의 글을 짓고,성임(成任)이 그 끝을 썼으며,서거정(徐居正)이 뒷면의글을 짓고,정난종(鄭蘭宗)이 그 글을 썼다. 연산군 대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하면서 원각사는 반 절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는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이 비석만 남아 원각사의 옛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 원각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십층석탑
Ten-Story Stone Pagoda of Wongaksa Temple Site
圆觉寺十层石塔
지정번호 : 국보 제2호 / 시대 : 1467년(세조 13)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38-2번지

이 탑은 세조(世祖)가 세운 원각사(圓覺寺) 터에 남아 있는 높이 12m의 십층 석탑이다.
원각사는 1465년(세조 11)에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흥복사(興福寺)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인데, 이 탑은 2년 뒤인 1467년(세조 13)에 완성했다.세조는 사리분신(舍利分身)하는 경이로운 일을 겪은 뒤 원각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공사 도중에도 사리분신하고 서기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지금 견해로는 십층 석탑이지만 사료에는 13층의 탑[窣覩婆]을 세워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亞자 모양의 기단은 세 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 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삼장법사(三藏法師)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을 구해 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 장면을새긴 탑의 몸체에는 현판, 웅을 휘감은 기둥, 목조구조,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건물 같다. 탑을 만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십층석탑 (국보제86호)과 여러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 삼일정신 찬양비

삼일정신 찬양비

■ 삼일운동기념 부조들

1919년 3월 2일 함경도 함흥고을 민중들은 역사높은 만세교 위를 달리며 독립만세를 불렸다. 왜경의 총칼이 번득일수록 만세소리는 더높았고 그중에서도 조영신이라는 소년의 입을찢었을 적에 더욱더 거센 만세소리는 천지를 흔들었다.
탑골공원 조성 전 모습. 원각사지 십층석탑(왼쪽)과 대원각사비(오른쪽) 바로 앞까지 민가가 들어서 있다.

원래는 사찰이 있었던 자리였다. 고려왕조 때에는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이, 조선왕조 때에는 세조가 건립한 원각사(圓覺寺)가 있던 자리였다. 그런데 조선 10대 임금이자 폭군이었던 연산군이 원각사를 없앴고, 11대 임금인 중종 때 건물을 철거했다. 한동안은 원각사지 십층석탑 만 빼고 공터로 남았고 주변에는 민가가 들어섰다.

팔각정과 원각사지 십층석탑

삼일대로, 삼일교, 삼일빌딩, 탑골공원 옆과 낙원상가를 지나는 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