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우스개소리)

Category: 이런 저런 이야기, Tag: 여가,여가생활
04/28/2005 10:02 am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RE: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오늘은 우스게 소리 하나 할께요. 이해하는 자만이 웃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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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답>
서쪽으로 가겠다는 잠재의식의 왜곡된 표현이다. (프로이트 - '잠재의식')
절대 선을 향해 갔을 것이다. (플라톤 - '절대 선인 이데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마르크스 - '변증법적 역사관')
과연 달마는 동쪽으로 갔을까? 이것부터 회의해 보자. (데카르트 - '방법적 회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끌려갔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 - '보이지 않는 손')
달마는 '동쪽에 이르는 병'에 걸렸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 '죽음에 이르는 병')
달마가 동쪽으로 갔다는 진위를 밝힐 수 없으므로 이 논쟁은 무가치하다.(논리실증주의자 - 명제의 분석)
달마가 동쪽으로 간 게 아니라 지구가 서에서 동으로 자전한 것이다.(갈릴레이 - '그래도 지구는 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동쪽으로 계속 가면 서방정토에 갈 수 있었다.(콜럼버스 - 신대륙발견)
동쪽 방향으로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뉴턴 - '뉴턴의 법칙')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왜 나만 갖고 그래? (전두환)
기억나지 않습니다. (노태우)
달마가 누가 타던 말이더라?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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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는가? 달마가 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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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lgurwn33 2018.08.22 1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06.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비디오를 보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불교를 전하러 오셨겠지만
    인도에서 깨달은 달마대사가
    와서 또 면벽을 구년을 하고
    “마음의 달이 물 밑에서 차오르면
    참 너는 어디로 가겠느냐?”고
    “네 화두는 바닥이 보이느냐?”고
    이것이 묻는 화두였습니다
    깨달음은 마음의 법칙이고 영의 질서인 것을
    마음의 달이 물밑에서 차오르면
    참 나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겸손해지면
    채워지는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마음이 깨끗하여지면
    왜 마음의 밑바닥이 들여다보이지 않겠습니까?

  2. chlgurwn33 2019.02.01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16.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③”
    (2016. 8. 15. 성모 승천 대축일)

    나는 요즈음 인터넷 네이버 블로그에서 ‘청봉스님 장군죽비’ 글을 읽다가 그전에는 더러 눈에 띠곤 하였지만 댓글 다는 곳이 없어 관심 없이 그냥 지나치곤 하였는데 ‘청봉스님 장군죽비’ 카페에 가입한 회원들이 질문과 답변하는 내용임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약 3000가지의 질문과 답변을 살펴보면서 입안에 혓바늘이 돋을 정도로 밤낮으로 화두가 되어 살펴보았는데 불법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이 척척 대답을 잘하는 것을 보고 물론 몰록 깨달아서 그 깨달음이 성성적적해서 이제는 더 이상 닦고 깨달을 것이 없다고 하니【‘412. 도(道)가 무엇이며 어떤 사람이 도(道)인 인가요? 에.’ 편에
    장군죽비 : 道란 일체의 근본의 실상이며 그로 하여 작용하고 나투어진 일체의 진리(일체종지)를 이르는 것이며 道人이란 할 일 없는 사람이올시다.
    무슨 할 일이 없는 것인가 하면 더 닦고 깨달을 것이 없는 이를 이르는 것이니 이를 覺人이라 하고 부처님이라 존칭하는 것이니 따라서 배고푸면 밥먹고 곤하면 잠자는 그것을 일러 한가한 도인이라 하는 것이니 잘못 아셔서는 안 될 것이올시다.() 참조】몰록 깨달아서 그 깨달음이 성성적적 한 것이야 이해가 되었지만 몰록 깨달아서 그 깨달음이 성성적적 한 스님께서 가톨릭에 대해서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깨달은(루가 2장 51절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 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참조) 성서의 예수님을 당신이 깨달은 불법과는 다르게 2271번에서 ‘예수님은 인도에 오셔서 불법을 닦아 깨친 각인이니 성인의 무리에 들어간 분이올시다. 그러나 기독교 성직자들이란 분들이 자기종교의 차별화를 위해서 이를 숨기고 하나님이라는 성인의 아래존재인 神을 성인이신 예수님 위에 설정하여 놓고 우매한 중생들을 오도(誤導)하고 있소이다.’ 51번에서 ‘실은 예수님은 6년간 인도에 가셔서 불법을 공부한 불제자올시다.’하였듯이
    …………………………(393페이지 참조)………………………
    2271. 질문 올리옵니다. 에.

    1. 聖人과 각인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장군죽비 : 각인을 이명(異名)으로 칭하는 것이 성인(聖人) 이올시다. 그러나 현인(賢人)은 그 깨침이 성인에 미치지 못하는 경계임도 아셔야 하리다.

    2. 예수는 성인이옵니까? 각인이옵니까?()
    장군죽비 : 역시 위에서 일러 드린바 처럼【예수님은 인도에 오셔서 불법을 닦아 깨친 각인이니 성인의 무리에 들어간 분이올시다. 그러나 기독교 성직자들이란 분들이 자기종교의 차별화를 위해서 이를 숨기고 하나님이라는 성인의 아래존재인 神을 성인이신 예수님 위에 설정하여 놓고 우매한 중생들을 오도(誤導)하고 있소이다.】

    2130. 안녕하세요. 천도재와 49재에 대하여 에.

    또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 불교에선 동물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요? 기독교에선 동물은 영혼이 없다는 식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데....
    장군죽비 : 기독교에서 ‘동물은 영혼이 없다’ 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도 죽으면 그만이라는 등식과 같은 논리인즉 사람이 정식(情識)이 있기에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동물인들 어찌 정식이 없는 그 육신만으로 어찌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으리오? 죽은 시체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생각하고 움직이지 못함에는 동일하듯이 일체 유정물(有情物)에게는 모두가 그 영혼(靈魂)이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임을 아셔야 하리다.

    1956. 안녕하세요.... (창조주) 에.

    저는 절에 오래 동안 다녔었는데요.... 근데 궁금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60억 인구 중에 천주교 개신교 합쳐서 20억 정도 이슬람교는 13억 정도라고 하는데 불교는 한국 중국 일본 태국 등 동남아시아 쪽에 4억 정도라고 합니다....【제가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불교는 인격적인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잔아요? 어쨋거나 창조주가 있다고 하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 전세계적으로 기독교 이슬람교 30억이 넘는데.... 이 창조주인 주님은 자신을 알려고 하면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답니다.... 스님께서는 인격적인 창조주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실려고 노력을 해보셨나요? 인격적인 창조주가 없다는 결론을 어떻게 내릴수 있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장군죽비 : 불교보다 타 종교가 그 신도 수가 많은 것은 불교는 인연법을 따르는지라. 강권하여 믿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이 주요인이라 하리다. 그리고 인격적인 창조주가 있다는 것은 진실을 왜곡한 헛소리라 하리다. 왜냐? 하면 참으로 우주만유를 창조한 인격적인 창조주가 존재한다면 그 인격적인 창조주라고 고집하는 인격은 상이 있다는 주장인즉 그렇다면 그 인격적인 창조주는 누가? 무엇이 만든 것일까요? 형상있는 일체는 모두가 형상없는 것으로부터 나툰 것인 즉 형상이 있는 인격적인 창조주를 만든 형상없는 그 근본이 곧 있을터이라 그것이 곧 참 근본이 되어야 理치에 맞을 것이올시다.따라서 온우주 만유의 창조주는 형상없는 그 무엇인 것이오. 이것을 이름하여 眞空妙有한 法性(佛性, 自性, 부처, 佛, 마음, 참나인 眞我)이라 하는 것이올시다.()】

  3. chlgurwn33 2019.02.01 1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709. 요한계시록 에.

    안녕하십니까? 청봉선사님 감사합니다.()()() 삼보귀의 하옵고.... 요한계시록에서 “여자와 붉은 용”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하늘에서 큰 이적을 보이니 해를 입은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썻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짓더라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을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질문1 : 혹시 여자가 낳은 남자가 예수님이신가요?
    질문2 : 이일은 이미 일어났나요? 아니면 미래의 예언 인가요?
    질문3 : 위에서 말한 여자가 무엇인가요? 감사합니다.
    【장군죽비 :
    질문1 : 혹시 여자가 낳은 남자가 예수님이신가요? 예 그렇게 묘사한 것이라 하리다.
    질문2 : 이일은 이미 일어났나요? 아니면 미래의 예언 인가요? 예수탄생을 그린 것이니 옛일이지오.
    질문3 : 위에서 말한 여자가 무엇인가요? 성모마리아를 그렇게 묘사한 것이지오.
    문제는 위에 그린 일들이 사실인가? 의심이 가지 않으시는지오? 이러한 묘사는 신앙적 차원으로 그린 신비를 감안한 神學的 허구라 할 것이올시다.()】

    1706. 성경책 내용 (예수님의 세례) 에.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청봉선사님께 도움을 청한 학생입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성경책을 읽는 중에 궁금증이 생겨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여기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성령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이것은
    1. 눈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비유한 것 인가요?
    2.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무엇인가요?
    3.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들은 것 인가요? 감사합니다.
    장군죽비 :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았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한 성경구절을 살피건데 현상으로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이 환희심이 날 때에는 평범한 일체사가 모두 환희로움으로 보이는 법이지오.
    【실은 기적이나 우연은 절대로 없다는 것부터 아셔야 하리다.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이 진리인 것이거늘 신앙심에 의한 마음작용으로 기적 같은 감회를 받으며 평범한 일을 뛰어넘은 것으로 비췰 때는 기적이라 오인하는 것이라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하늘이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을 칭한다 할 것이오.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 말하는 하나님은 형상이 있어야 할 것인즉 형상있는 예수님께서 들으셨다는 말씀은 분명 들을 것이 있는 소리가 있어야 할 것이며 소리없는 말씀을 들으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 것이오.
    이러한 것들은 신앙심을 공고히 하기 위한 성경결집의 潤文(글을 신비롭게 보이게 지어만듬)이라 할 것이오.()】

    806. 불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영과 혼에 관해 여쭙니다. 에.

    큰스님께 삼배 올립니다.()()() 참고로 신약성경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3일 만에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났는데 제자들이 의심을 하자 다가와서 나를 만져보라 하셨고 실제로 피부가 있는 육체였다라고 제자들이 기록하여 현재 많은 기독교인들이 육적인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만.... 저의 짧은 견해로는 현생에서 자아가 아주 강했던 인격체의 에스트랄체(영체)는 피부감촉을 느낄 수 있는 형체로까지 갖출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유한한 것이구요. 위에 말씀 드렸던 내용에 대한 선사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더불어 반야의 지혜가 드러나는 진아와 영과 혼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혹자는 혼에 의식이 깃든 것이 영이라고도 합니다만 선사님의 견해는 어떠하신지요. 귀한 가르침에 늘 감사함을 느끼며 제 자신을 깨우는데 밑거름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포리즘 합장()()()

  4. chlgurwn33 2019.02.01 1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군죽비 :〔참고로 신약성경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3일 만에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났는데 제자들이 의심을 하자 다가와서 나를 만져보라 하셨고 실제로 피부가 있는 육체였다라고 제자들이 기록하여 현재 많은 기독교인들이 육적인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만.... 저의 짧은 견해로는 현생에서 자아가 아주 강했던 인격체의 에스트랄체(영체)는 피부감촉을 느낄 수 있는 형체로까지 갖출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유한한 것이구요.〕
    법이란 진리이며 진리는 정한 바도 없으며 고쳐지는 것도 아니올시다. 따라서 이치가 바르지 않으면 진리가 아닌 것임을 먼저 아셔야 할 것이로소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육신을 벗는 것이며 육신을 벗게 되면 그 육신은 와석과 같이 식(識)이 없는 무기물이라 하여야 할 것이올시다. 따라서 누가 ‘영체가 죽은 몸을 통하여 감촉을 느낀다.’고 말하였는지는 모르나 옳지 못한 소견인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올시다.
    다만 여기서 한번 집고 넘어 간다면【성경에 이르기를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라 하였으니 법을 만든 사람이 법을 어긴다면 그것은 무법 탈법 위법이 될 것이니 옳은 것이라 하지 못 할 것이로소이다. 따라서 비단 예수님만 죽어서도 육신으로 나타나고 육신으로 하나님이 데려갔다 하니 그 데려간 육신은 어디에 있을 것이며 이러한 주장이 이치에 맞는 옳은 것이겠소이까?
    예수님은 불교를 공부하고 그 깨달음을 얻은 분이로소이다. 그러한 분이 스스로 그렇다고 주장 하셨겠소이까? 아니올시다. 무릇 종교란 신앙심을 돋구는 방편이 필요한즉 후대에 성경을 결집 할 때 증거와 신비를 가입 한 것으로 살펴봄이 옳을 것이라 하겠소이다.】혹 잠시 죽었다가 되살아난 경우는 현금에도 가끔 있는 일이니 모르겠소이다만....^^
    〔더불어 반야의 지혜가 드러나는 진아와 영과 혼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혹자는 혼에 의식이 깃든 것이 영이라고도 합니다만 선사님의 견해는 어떠하신지요.〕
    진아와 혼(영)이 서로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올시다. 다만 영이니 혼이니 하는 것은 개체로서 이르는 것이라 할 것이로소이다.()

    51. 부처님과 예수님에 대해. 에.

    ()()() 질문이 한 가지 더 있어 다시 올립니다.
    얼마 전 예수님도 인도에서 불법을 공부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그러한가요? 그렇다면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인가요?
    그런데 왜 기독교인들은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종교를 더 수승하다 여기는지요? 정말 그러한지 부처님과 예수님의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청봉 : 예. 답변해 드리겠소이다.【실은 예수님은 6년간 인도에 가셔서 불법을 공부한 불제자올시다. 그분이 깨달으신바가 어찌 부처님의 그것과 다른 것이였으리오. 이 산승이 살피 건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의 뜻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라 할 것이로소이다. 다만, 예수교라는 별도의 종교를 창시한 무리들의 아집과 왜곡으로 예수님을 신성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그 뜻이 변질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예수교를 신봉하는 성직자들의 왜곡된 해설로써 마치 불교와 예수교가 다른 것으로 굴절되었을 뿐이라 할 것이로소이다. 불교는 올곧이 오늘에 이르러 스스로 절대적인 대우주의 주인임을 자각하여 부처님으로써의 영원한 열반락을 누릴 것을 지시(指示)한 것이요,
    예수교는 하나님과 중생을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믿고 복종하여 따르므로써 기꺼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나님의 상대적인 영원한 종 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갈래가 지어지게 된 것이올시다.】상으로써 살펴 우리불교의 우월성을 찾지 마시고, 불법의 오묘한 이치를 살피신다면 불자로써의 자부심을 마땅히 가지셔도 그르지 않을 것이오. 당당한 자부심을 가지시고, 밝게 닦아 증득하시어 절대적인 깨친 부처님으로써의 열반의 낙을 누리실 것을 당부하며 이 산승 그리되실 것을 기원하리다.()

  5. chlgurwn33 2019.02.01 1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어쩌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에는 시대적으로도 가톨릭의 계시(啓示)진리와 만날 수도 없었고 또 지금 시대에는 만난다고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크게 깨달은 사람도 없었고 적게 견성(見性)한 스님들이야 어떤 기준으로 하신 말씀인지 즉 불교 전체의 주장인지 개인적인 주장인지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응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불법을 몰록 깨달아서 그 깨달음이 성성적적 한 청봉스님이 계시니 즉 412번에서 ‘도(道)인’에 대해서 ‘더 닦고 깨달을 것이 없는 이를 이르는 것이니 이를 覺人이라 하고 부처님이라 존칭하는 것이니’ 하고 말씀하신 청봉스님께서 계시니 물론 그렇지만 몰록 깨달아서 그 깨달음이 성성적적하다고 해도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그렇게 똑같이 크게 견성(見性)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런 불법(진리)을 깨달은 입장에서 가톨릭의 계시(啓示)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을 솔직하게 즉 기적이나 예수님의 부활 승천 등 자연 법칙을 초월한 것이나 예외를 두는 것은 진리의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진리일 수 없다고 神學的 허구라고까지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오히려 불교의 부분적으로 깨달은 견성(見性)이나 자연 법칙의 진리로는 즉 성령의 감도를 받은 구약, 신약의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구약 시대의 부분적인 계시(啓示)가 계시(啓示)의 완성이라고 할 수 없듯이 즉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도 구약시대로서 수많은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가 있었지만【계시(啓示)의 완성자이신】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시듯이 즉 완성된 계시(啓示)라고 하더라도 지금도 계시(啓示)의 내용 전체를 점진적으로 깨달아 가는 것이듯이(영성시집 ‘206. 자연종교와 계시종교의 차이점’ 편 참조) 즉 진리를 아무리 깨달았다고 해도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과 본래 자연 법칙을 초월한 진리이신 예수님이 다르듯이 즉 성서의 계시(啓示)진리는 즉 초자연적인 법칙을 자연적인 법칙으로 살피면 자연적인 법칙이야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성서의 기적이나 계시(啓示)진리는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즉 성서의 기록부터가 神學的 허구라면 神學的 허구를 일삼아 온 그런 종교가 지금까지 계시(啓示)진리를 꾸준히 증거하고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고 베드로사도 및 사도들과 일치하여 한마음 한 목소리로 신앙을 고백하니 세상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또 성경결집의 潤文이라면 이런 지어 만든 성경결집이 인간의 지식으로 그렇게 지어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이만 했으면 청봉스님께서는 계시(啓示)진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실토한 샘이니 즉 자연종교로서 불법(진리)을 깨달은 것은 인정하지만 계시(啓示)종교에 대해서는 즉 성서를 통달한 예언자들이나 신학자들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되는데 이런 청봉스님과 같은 허구야 말로 계시(啓示)종교의 검증을 거친 성서를 통달한 신학자들에 비해 이제부터 청봉스님도 ‘神學的 허구’라고 ‘성경결집의 潤文’이라고 ‘성직자들의 왜곡된 해설’이라고 한 말에 대해서 신학자들의 검증을 거쳐야 할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모르고 한 말에 대해서는 이쯤 밝혀두고.... 오히려 예수님은 본래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신 전능하신 진리시므로 깨달은 체험도 있을 수 없으신 분이라는 진실이 밝혀져 즉 요한 14장 6-7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라고 모든 역사를 통털어 유일하게 말씀하신 전능하신 분으로써 의미하신 말씀과(영성시집 ‘192. “나는 전능한 신(하느님)이다”’ 편 참조) 석가모니 부처님은 6년 동안 道를 닦아 깨달은 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 하신 말씀의 뜻이 밝혀져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청봉스님은 깨달은 성인으로 볼 수 있지만 즉 가톨릭에서도 깨달으면 성인이라고 하고 하느님(주님)과 주객합일을 이룬 사람이라고 하듯이 불교에서도 깨달으면 성인이라고 하고 불(佛)과 주객합일을 이룬 사람이라고 볼 수 있듯이 물론 불성(佛性)과 신성(神聖)의 한문의 뜻은 다르지만 불성(佛性)은 우주 전체의 성품을 뜻하는 같은 말로써 예수님은 하느님을 깨달은 성인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이 밝혀져 즉 반야심경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보니까 불지견(佛知見), 중생지견 하면서 중생지견으로 마음이라고 하고 불지견으로 참마음이라고 하듯이 우리 가톨릭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하나로 보면서 또한 전능하신 창조주와 불완전한 피조물을 둘로 보니까 내 마음이라고 하고 하느님의 뜻(마음)이라고 하는데 즉 마태 1장 22-23절에서「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듯이....

  6. chlgurwn33 2019.02.01 1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즉 1956번에서 청봉스님께서【참으로 우주만유를 창조한 인격적인 창조주가 존재한다면 그 인격적인 창조주라고 고집하는 인격은 상이 있다는 주장인즉 그렇다면 그 인격적인 창조주는 누가? 무엇이 만든 것일까요? 형상있는 일체는 모두가 형상없는 것으로부터 나툰 것인 즉 형상이 있는 인격적인 창조주를 만든 형상없는 그 근본이 곧 있을터이라 그것이 곧 참 근본이 되어야 理치에 맞을 것이올시다. 따라서 온우주 만유의 창조주는 형상없는 그 무엇인 것이오. 이것을 이름하여 眞空妙有한 法性(佛性, 自性, 부처, 佛, 마음, 참나인 眞我)이라 하는 것이올시다.()】하였듯이 형상없는 그 무엇인 眞空妙有가 바로 불성(佛性)의 자리, 신성(神聖)의 자리 즉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리라는 것이 밝혀져 즉 온우주 만유의 창조주는 형상없는 그 무엇인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이 밝혀져 즉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모상)이심이 밝혀져 즉 성직자들이 성인의 아래존재인 神을 성인이신 예수님 위에 설정하여 놓은 하느님이 아니라 형상없는 전능하신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당신을 완전하게 계시(啓示)하신 분이심이 밝혀져 즉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신성과 인성을 갖추신 신인(神人)이신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이심이 밝혀져 즉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탈출 3장 6, 15절. 4장 5절. 마태 22장 32절. 마르 12장 26절. 루카 20장 37절. 사도 7장 32절)이심이 밝혀져 즉 창세기 11장「22절 스룩은 삼십 세 되었을 때, 나호르를 낳았다. 24절 나호르는 이십구 세 되었을 때, 테라를 낳았다. 26절 테라는 칠십 세 되었을 때, 아브람과 나호르와 하란을 낳았다.」, 31장「24절 그날 밤 꿈에 하느님께서 아람 사람 라반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야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29절 “나는 자네들을 해칠 수도 있지만, 어젯밤 자네들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야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셨네. 30절 그런데 자네는 아버지의 집이 그토록 그리워 떠났다고는 하지만, 내 신들은 어째서 훔쳤나?” 49절 그곳은 또 미츠파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그가 이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볼 수 없는 동안 주님께서 우리를 살피시기를 바라네. 50절 자네가 내 딸들을 구박하거나 내 딸들을 두고 다른 아내들을 맞아들일 경우, 우리 곁에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와 자네 사이의 증인이심을 명심하게.” 53절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호르의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의 심판자가 되어 주시기를 바라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아버지 이사악의 두려우신 분을 두고 맹세하였다.」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호르의 하느님이 다른 하느님이심이 밝혀져 즉 여호수아 24장「2절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나호르의 아버지인 테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15절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16절 그러자 백성이 대답하였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23절 “그러면 이제 너희 가운데에 있는 낯선 신들을 치워 버리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마음을 기울여라.” 하자, 24절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25절 그날 여호수아는 스켐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웠다.」의 주님이신 하느님과 “다른 신들”이라고 말하는 즉 인간의 사상에서 비롯된 우상이라고 말하는 신들과는 구분된 즉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계약을 맺은 절대 진리인 전능한 신인 계시(啓示)진리의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심이 밝혀져 즉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인도의 수많은 신들이라고 말하는 우상과는 구분된 즉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게 계시(啓示)된 하느님이 바로 우상과는 다른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이 밝혀져 즉 청정(淸淨)한 전능한 실체(實體)인 그 무엇이 절대 진리인 전능한 신인《루이사 피카레타「천상의 책」제19권 7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열매를 맺을 사업’ 편에서「14 우리 (성삼위) 사업들의」,「16 우리의 영광이 완전하기 위해서」,「25 한편 나의 뜻은 우리 (성삼위)의 한 비유거나 그림자가 아니라」,「28 우리 (성삼위)의 뜻이 알려지고」,「29 우리가 창조한 다른 모든 것은」등 즉 ‘우리’ ‘우리의’ ‘우리가’ 라는 글을 계속 읽으면서 문득 깨달아지는 것은 여기서 말씀하신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신 우리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영성시집 ‘214.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②”’ 편 참조)》즉 ‘우리’ ‘우리의’ ‘우리가’ 라고 말씀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심이 밝혀져(신앙수기 ‘101. 선생님(스승)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편 참조) 즉 불교에서는 반야심경의 공(空)과 색(色)을 불이(不二)로 보니까 즉 둘이 아니라고 보니까 자력적 구원이라는 이론이 성립되고 八正道와 청정(淸淨)을 중요시하고 청정(淸淨)한 실체(實體)를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고 이것도 역시 공(空)과 색(色)을 불이(不二)로 보니까 즉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의 몸으로 와서 6년 동안 道를 닦아 깨달아서 부처님이 되어도 깨닫기 전과 후가 다를 뿐 삶과 죽음을 초월한 진리를 깨달아도 역시 인간의 몸이니까 깨달아도 공(空)과 색(色)이 둘이 아니라고 불이(不二)로 보니까 귀신 신(神)자를 쓰지 않고 몸신(身)자를 쓰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7. chlgurwn33 2019.02.01 1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즉 불교 방식으로 해석하자면 파도는 바다이지만 가톨릭 방식으로 해석하자면 물고기는 바다라고 하지 않듯이 불교에서는 바다와 물고기를 하나라고만 말하지만 가톨릭에서는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라고 말하듯이.... 즉 심우도(尋牛圖)의 요약【〔요약〕불교의 선종(禪宗)에서,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禪畫).】을 보면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 하였듯이 또 내용을 보면 ‘견성(見性)에 이르는 과정을 10단계로 간명하게 묘사한 그림’이라고 하였듯이【① 심우(尋牛)는 본성(불성)이 무엇인가를 찾고 ② 견적(見跡)은 본성(불성)의 자취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고 ③ 견우(見牛)는 본성(불성)을 보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상징하고 ④ 득우(得牛)는 동자가 소(본성)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도 하는데, 마치 땅속에서 아직 제련되지 않은 금돌을 막 찾아낸 것과 같은 상태라고 많이 표현된다. 실제로 이때의 소(본성)는 검은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아직 삼독(三毒: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에 물들어 있는 거친 본성(불성)이라는 뜻에서 검은색을 소(본성)의 빛깔로 표현한 것이다. ⑤ 목우(牧牛)는 거친 소(본성)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더라도 저절로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게끔 길들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삼독의 때를 지우는 보임(保任: 깨달은 것을 더욱 갈고 닦음)의 단계로, 선에서는 이 목우의 과정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한번 유순하게 길들이기 전에 달아나 버리면 그 소(본성)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를 준 것이다. 이때의 소(본성)는 길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차츰 검은색이 흰색으로 바뀌어 가게 묘사된다. ⑥ 기우귀가(騎牛歸家)는 동자가 소(본성)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때의 소(본성)는 완전한 흰색으로서 특별히 지시를 하지 않아도 동자와 일체가 되어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며, 그때의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가히 육안으로 살필 수 없는 본성(불성)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상징하게 된다. ⑦ 망우존인(忘牛存人)은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본성)는 온데간데없고 자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소(본성)는 마지막 종착지인 심원(心源)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이제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방편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뗏목을 타고 피안에 도달했으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교종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⑧ 인우구망(人牛俱忘)은 소(본성)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텅빈 원상만을 그리게 된다. 객관이었던 소(본성)를 잊었으면 주관인 동자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게 된다. ⑨ 반본환원(返本還源)은 이제 주객이 텅 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즉 ⑧번에서 ‘소(본성)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텅빈 원상만을 그리게 된다.’는 ⑨번에서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즉 ‘주객이 텅 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으로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라고 하였듯이 즉 불교 방식으로 해석하자면 물론 비유하였다고는 하지만 주관은 동자이고 소(본성)는 객관이듯이 즉 우리 가톨릭 방식으로 해석하자면 깨달음이란 반야심경의 공(空)인 즉 하느님이신 진리의 길인 道를 깨달았다는 또는 그 경지에 이르렀다는 또는 그 상태를 체험했다는 뜻으로 즉 주객이 텅빈 주객 합일을 이룬 공(空)한 상태라면 탈혼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아무튼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즉 道의 경지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지키고 10계명을 지키고 7덕(신덕, 망덕, 애덕, 지덕, 의덕, 용덕, 절덕)을 지켜서 자유, 해탈, 열반, 깨달음, 완덕, 구원, 행복, 만족한 행복이 무엇인지 이제는 몸으로 살고 항구하게 느껴지는 것이 道의 경지이고 깨달음의 경지이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경지이듯 나아가 완전한 깨달음은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인 주객 합일이듯이 즉 여기서 견성(見性)과 성불(成佛)이란 다른 말을 그냥 구분 없이 남용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8. chlgurwn33 2019.02.01 1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즉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점차로 깨닫든 성성적적으로 영적으로 몰록 깨닫든 즉 견성(見性)을 하고 성불을 하든 계시(啓示)를 보고 성인이 되든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는 체험이나 성소(聖召)가 각각 다 다른 것이며 즉 부처님을 만나야 주객 합일을 이룰 수가 있고 또 하느님(주님)을 만나야 주객 합일을 이룰 수가 있듯이 즉 한 번의 주객 합일 체험이 영원한 주객 합일을 이룬 것은 아니듯이 즉 주객 합일 체험을 무슨 만사형통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며 주객 합일이란 불경의 가르침을 성경의 가르침을 즉 성인이 되는 계율과 八正道 즉 10계명과 완덕인 7덕을 꾸준히 지킬 수 있는 습관 된 경지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즉 그러니까 득우(得牛)는 견성(見性) 이전의 불성(佛性) 즉 이미 존재했던 진리의 실체(實體)를 본다는 또는 나아가서 합일을 이룬다는 뜻으로 우리 가톨릭에서는 성서의 계시(啓示)를 본다는 것은 이미 존재했던 삼위일체의 진리의 실체(實體)를 본다는 또는 나아가서 합일을 이룬다는 뜻으로 즉 초자연적인 전능한 실체(實體)인 빛이나 소리를 아브라함이나 모세성인이나 예언자들처럼 직접 보고 듣는 체험으로써《《《황데레사 저,「데레사의 지난 일들」책 묵시 그림 30번 1946. 9. 28.【영세한지 3일 되던 날 한 번도 뵈옵지 못했던 어른들이 보였다. 앞벽에 고상이 걸린 방안에서 만과를 하던 중 앞벽이 탁 터지더니 구름길이 확 트여 공중으로 뻗쳤는데 양편에 똑같은 어른들이 보였다. 그때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양편에 똑같은 예수님이 계시니 의아했다. 복판의 뽀얀 지구덩이 위에는 흰 비둘기가 있는데 거기서 빛이 착착 나고 십자가에서도 빛이 났다. 만과하다 말고 정신없이 바라보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표현을 못해 대모한테 이야기할 줄도 몰랐다.】설명과 묵시 그림 31번 1946. 11. 28.【영세한지 두 달 만에 친할머니와 같이 자다가 탈혼이 되어 묵시가 생생하게 보였다. 영세한지 3일 만에 벽이 터져서 보이던 구름길이 다시 보이고 천신 넷이 와서 같이 가자고 하여 폭삭폭삭한 구름길을 밟으며 따라가는데, 구름이 연한 오색빛 찬란한 장미꽃 형상으로 몽실몽실하게 피어서 쫙 깔린 구름길에 빛이 났다. 너무 폭삭폭삭해서 내 발에 묻은 때가 구름길에 묻을까봐 가다가 자꾸만 내 발을 닦았다. 어디쯤을 올라가자니 중앙청같이 둥근 데서 빛이 쏟아져 내리는데, 그 빛이 쏟아져 내리니 더 못 가겠고 벌벌 떨렸다. 떨다가 쳐다보니 영세한지 3일 만에 보였던 예수님이 양편에 똑같이 계셨다.】설명 참조》》》즉 견성(見性)은 가톨릭 방식으로 성서에서 선조들이 수없이 본 또 데레사 어머님께서 본 초자연적인 계시(啓示)를 즉 똑같은 방법은 아니더라도 불교 방식으로 본다는 이야기인데 초자연적인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를 보면 전능을 느끼지만 불교는 불이(不二)로 보니까 즉 둘이 아니라고 보니까 즉【眞空妙有한 法性(佛性, 自性, 부처, 佛, 마음, 참나인 眞我)】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겠지만 즉【眞空妙有한 法性(佛性, 自性, 부처, 佛, 마음, 참나인 眞我)】는《인터넷 다음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진여(眞如)」참조》닦을 것이 없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겠지만 즉 우리의 중생지견의 마음이나 나는 항상 닦을 것이 있지만 불지견(佛知見)의 마음(佛性)인 참나인 참마음은 닦을 것이 없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듯이 즉 한마디로 불지견(佛知見)인 불성의 자리, 신성(神聖)의 자리 즉 견성(見性)의 자리 계시(啓示)의 자리 즉 불성의 자리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리인 예수님의 자리에서는 닦을 것이 없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듯이(성삼 가족수도회 기도서 122-123페이지「예수성심 호칭기도」참조)
    즉 그러니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화두의 종교라고 볼 수 있듯이 불교에서는 화두를 붙들고 하안거든 동안거든 2-3개월을 죽기 살기로 정진을 하듯이 가톨릭에서는 특별히 화두랄 것도 없지만 완덕 생활에서 하계 피정이든 동계 피정이든 5-6일을 자신을 돌아보는 정도의 피정을 하듯이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를 보고 선맥을 전할 수는 있고 예언자가 될 수는 있겠지만 즉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는 부처님이나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견성(見性)을 하고 계시(啓示)를 보고 즉 모두가 다 선맥을 전하고 예언자가 될 수는 없듯이 즉 한마디로 모두가 다 견성(見性)을 하고 계시(啓示)를 보아도 즉 모두가 다 주객 합일을 이룰 수는 없듯이 즉 주객 합일을 이루어 선맥을 전하는 스승과 제자 외에는 견성(見性)을 하고 계시(啓示)를 보고 예언을 하여도 이 견성(見性)을 한 자가 저 견성(見性)을 한 자를 이 화두를 깨달은 자가 저 화두를 깨달은 자를 이 계시(啓示)를 본 자가 저 계시(啓示)를 본 자를 또 이 예언자가 예언한 것을 저 예언자가 다 아는 것도 아니듯이 즉 예언자들도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 외에는 자기의 앞일도 아는 자가 없듯이 즉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시키는 일을 하는 종일 뿐 즉 종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지 시키지 않은 주인의 일까지 어떻게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화두를 깨닫고 견성(見性)을 하고 계시(啓示)를 보는 것은 나 개인을 위한 사적인 견성(見性)이고 계시(啓示)라면 나 개인의 정성과 인연에 따라 깨닫게 되는 것이겠지만

  9. chlgurwn33 2019.02.01 1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즉 이 시대에 공적계시(啓示)를 이루기 위한 사적 공적 계시(啓示)라면 즉 공적계시(啓示)에서 예언했던 묵시록이 이루어지는 계시(啓示)라면 시대적인 인연에 따라 하느님께서 크게 깨우쳐주시는 견성(見性)이고 계시(啓示)라는 점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견성(見性)을 하고 계시(啓示)를 보는 것은 하느님께서 시대적인 인연에 따라 크게 깨우쳐주시는 것이지만 견성(見性)을 하고 성불을 하든 계시(啓示)를 보고 성인이 되든 즉 성인이 되는 계율과 八正道 즉 10계명과 완덕인 7덕은 모두가 다 닦아야 하는 것으로써 즉 견성(見性)을 하고 계시(啓示)를 보고 부처님의 성품인 하느님의 성품인 불성(佛性)을 신성(神聖)을 닦으라는 것이 아니라 즉 원죄(原罪)는 예수님께서 대신 보속해 주셨으니까 즉 천국의 문 구원의 문은 열렸으니까 즉 누구도 먼저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들어가셨으므로 즉 마태 3장 1-2절「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 하고 선포하였다.」라고 하였듯이 즉 하늘 나라의 기준은【계시(啓示)의 완성자이신】진리이신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부활 승천하심으로 전능하신 천주성부 오른 편에 앉으심으로 즉 하늘 나라의 주인이 되셨으므로 천국의 문 구원의 문은 열렸으니까《영성시집 ‘207. 문득 구원의 화두(경지)를 깨달았습니다’ 편 ‘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 상권「64 󰃅 예수 죽으신 후에 그 영혼은 어디로 가시뇨? 󰂼 그 영혼은 림보로 가사 그때까지 천당에 들어가지 못한 성인들을 위로하시니라.」해설 소개부분과「67 󰃅 예수 부활하신 후 제40일에 무엇을 하시뇨? 󰂼 예수 부활하신 후 제40일에 당신 전능으로 하늘에 오르시니 이는 예수 승천이니라.」해설 소개부분 참조》즉 견성(見性)을 하고 계시(啓示)를 보고 부처님의 성품인 하느님의 성품인 불성(佛性)을 신성(神聖)을 닦으라는 것이 아니라 즉 석가모니 부처님을 믿고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즉 예수님을 믿고 중생심이고 피조물인 나의 본죄(本罪)를 닦아서 부처님이나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라는 것으로써 즉 성인이 되는 계율과 八正道 즉 10계명과 7덕을 잘 지켜서 구원, 자유, 행복, 만족한 행복의 경지를 이루라는 것으로써 즉 불교에는 교(敎)를 중시하는 교종(敎宗)과 선(禪)을 중시하는 선종(禪宗)이 있듯이 즉 선(禪)을 더 중시 한다고 해도 교(敎)도 당연히 중시 해야지 교(敎)를 등한시 하고 견성(見性)이나 선(禪)을 더 중시 한다면 이미 선(禪)도 제대로 된 선(禪)이 아니듯이 불경이나 성경을 잘 못 해석하면 외도가 될 수 있고 이단이 될 수 있듯이 즉 견성(見性)이나 선(禪)을 한다는 것은 교(敎)를 잘 지키기 위한 목적이 되어야지 무엇을 위한 견성(見性) 이고 무엇을 위한 선(禪) 이겠습니까? 그러니까 물론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를 받은 사람은 선맥을 전하거나 예언 성소처럼 부처님이나 하느님의 안배가 함께 있겠지만 즉 계율이나 八正道 즉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지키고 10계명을 지키고 완덕인 7덕을 지키기 위한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가 아니라면 그런 견성(見性)과 계시(啓示)는 외도나 이단으로써 선의 천사로 과장한 악천사의 견성(見性)과 계시(啓示)일 것이며 그러니까 견성(見性)과 계시(啓示)를 보았다고 해도 죄를 지으면 아무리 큰스님이라고 해도 아무리 두 증인 두 예언자라고 해도(영성시집 ‘147. 두 증인 두 예언자①’ 편 참조) 반드시 불교에서 말하는 참회나(108배 참회문 참조) 가톨릭에서 말하는 회개나 고해 성사를 보아야지 자유, 해탈, 열반, 깨달음, 완덕, 구원, 행복, 만족한 행복의 경지가 회복되거나 느껴지고 나아가 완전한 깨달음의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인 주객 합일의 경지가 느껴지고 깨달아지는 것이 분명하고 확실한 교리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고해 성사를 좀 더 짚고 넘어가자면 흔히 타종교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죄를 고백하고 고해 성사를 보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7성사(세례, 견진, 성체, 고해, 혼인, 신품, 병자) 중의 하나로써 타종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타종교에서는 이런 문제를 논할 필요도 없겠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당연히 가능한 일이며(신앙수기 ‘80. 요리강령이 복음서의 키를 잡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편 참조) 고해 성사가 있어도 모고해(冒告解)를 하는 등 진정한 회개의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또 물론 7성사 교리이기 때문에 교리 때마다 고해 성사 교리도 하는데《‘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 하권 236-262 󰃅󰂼 해설 참조》고해 성사가 구약시대처럼(세례, 성체, 신품 성사도) 아예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만 구약시대보다 더 진정한 회개의 효과를 이 신약시대에 와서도 과연 얼마나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즉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신 우리와 피조물인 우리를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로 보니까 즉 창세기의 천지 창조를 믿을 수 있고 창조주와 피조물을 둘로 보니까 타력적 구원이라는 이론이 성립되고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지키고 10계명을 지키고 완덕인 7덕을 지켜서 창조주와 합일하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즉 정결, 청빈, 순명은 절덕에 포함되는 덕으로써 성직자, 수도자들이 완전한 애덕을 추구할 목적으로 서원까지 하며 지키는 덕으로써 즉 ‘반야’를 진리를 깨달은 ‘지혜’로 번역하듯이 반야심경의 참된 해석은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는 것이 참된 해석이라는 것이 밝혀져 즉 예수님의 재림 때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종교가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는 천년왕국인 세계 평화, 교회 평화, 죄인 회개, 외교인 귀화, 성직자․수도자 성화, 이북 이남의 평화통일과 산아제한 죄 보속인(황 데레사 저,「데레사의 지난 일들」책 그림 63번, 235번 설명 참조) 즉 요한 계시(묵시)록의 천년왕국을 이루시려고 재림하시는 성삼은혜가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때에 불자들도 임마누엘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계시(啓示)진리를 받아들여 종교통일이 이루어지는데 이바지하는 때가 오리라는 생각입니다.

  10. chlgurwn33 2019.02.01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 상권
    「22 󰃅 천주 몇이 계시뇨?
    󰂼 천주 다만 하나 계시니라.
    23 󰃅 하나이신 천주 몇 위(位)를 포함하여 계시뇨?
    󰂼 하나이신 천주 세 위를 포함하여 계시니 곧 성부(聖 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이시니라.
    하느님이 하나인 동시에 셋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 체(體)는 하나인데 거기 위(位)가 셋 있다는 뜻이다. 비유를 든다면 전기는 하나이지만 거기에는 빛, 열, 움직임이 있고 또 이것들은 서로 구별된다. 전광(電光), 전열(電熱), 전동(電動)이라고 하는 만큼 전기의 그 무엇이지만 전기가 셋이란 뜻은 아니다.
    사람은 식물처럼 생명이 있고 동물처럼 감각하고 또 신들처럼 지능을 가졌지만 혼은 셋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하나뿐이다. 영혼의 한 면인 지성의 경우에도 인식, 의욕, 기억, 이 셋이 서로 다른 것이지만 지성이 셋이란 뜻은 아니다.
    여기 삼각자가 하나 있다. 서로 다른 각이 셋이지만 삼각형은 하나뿐이다. 각각 셋이라는 말은 삼각형이 셋 있다는 뜻은 아니다.
    “위(位)” : 알아듣기 어려운 문제이다. 인간 세상에 있어 위(位 persona)는 “지능을 가진 완전한 개체의 최고 자주성이다.” 이를 좀더 설명해 보겠다.
    지능을 가진 : 그러니까 동물, 식물, 광물 등에는 위가 없다. 그것들은 무엇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행동이나 작용을 하므로 권리나 책임 같은 문제가 따르지 않는다.
    완전한 개체 : 동물의 각혼(覺魂) 같은 것은 독립하여 있지 못하고 다른 것(肉)에 의거해서만 존재하고 행동하므로 완전한 실체가 아니다. 사람의 손이나 발도 이런 의미에서 완전한 실체는 아니다. 자기가 행동하거나 자기를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주성이 없다. 따라서 위(位)는 아니다.
    개체(Substantia singularis) : 개념적 실체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기 있는, 그리고 다른 어떤 것과든지 구별되는 실체란 말이다. 예를 들면 ‘이 사람’, ‘아무개’의 아버지….
    최고(ultimo) : 영과 육이 결합하면서 한 사람을 이루어 간다. 이처럼 이루어 가다가 최고 최후로 한 사람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위(位)다. 이 사람에게는 이 완전성보다 더 높은 것도 없고, 더 있어야 할 것도 다시 없다.
    자주성(sui iuris) : 한 개체의 완전한 주권의 소재를 뜻한다. 한 개체의 능동 수동의 총집결점이다. 내 다라가 걸어간다고 하지 않고 내가 걸어간다고 말한다. 걸어가는 동작을 나라는 위에 귀결시킨다. 누가 내 가슴을 때렸으면 내 가슴이 맞았다고 아니하고 내가 맞았다고 말한다. 맞는다는 수동도 나라는 위로 귀결시킨다.
    실체, 성, 위(實體, 性, 位) : 사람은 완전한 실체(Substantia)이다. 빛깔이나 맛이나 형상처럼 타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여 존재한다는 점으로 보아 ‘실체’라 한다. 이 실체가 행동이나 수동에 사역되는(Principium quod) 점으로 보아서는 ‘성 또는 본성(Natura)’이라 한다. 인성(人性)은 영혼과 육신이다. 그러니까 위(Principium quod)가 성으로 행동하거나 수동한다. 내(位)가 육신(性)으로 음식을 먹고 정신(性)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악평이나 호평을 듣는다. 이처럼 위는 그 개체의 전권과 전책임을 지니고 있고, 또 이것은 다른 누구에게든지 다른 무엇에게든지 상통되지 않는다(incommunicabilis).
    이상 말한 것이 사람들에게 있는 위의 설명이다. 하느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위가 있는데 사람의 위와 꼭 같지는 않다.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꼭 같은 것은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예를 들면 하느님께 지능이 있고 사람에게도 지능이 있지만 이 두 지능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위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사람에게는 각각 한 인성에 한 위가 있지만 하느님께는 한 천주성(天主性)에 위는 셋이 있다. 그래서 삼위일체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는 천주성과 완전한 인성이 있지만 인위(人位)는 없고, 그 인성이 하느님의 제2위에 직결되어 있다.…………
    24 󰃅 세 위 서로 관계가 어떠하시뇨?
    󰂼 세 위 서로 관계가 실로 오묘하니,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는 성부께 낳으심을 받으시고, 성신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느니라.
    25 󰃅 세 위 서로 높고 낮음과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신 분 별이 있느뇨?
    󰂼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어 도 무지 온전히 같으사 한가지로 다만 한 천주시니라.
    55 󰃅 예수 그리스도께 몇 가지 성(性)과 위(位)가 있느뇨?
    󰂼 예수 그리스도께 성으로는 천주성과 인성(人性) 두 가지가 있고, 위로는 다만 천주 성자위 하나뿐이니 라.」참조.

  11. chlgurwn33 2019.02.01 1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 하권
    「236 󰃅 고해 성사는 무엇이뇨?
    󰂼 고해 성사는 영세한 후에 범한 모든 죄를 사하는 성사니라.
    “성사(聖事)” : 고해(告解)에는 성사의 세 가지 요소가 다 구비되어 있다. 즉 첫째, 예수께서 친히 제정하셨고, 둘째, 사람이 자기 죄를 통회하며 고백하면 신부는 사죄경을 염하는 감각할 만한 표지가 있고, 셋째, 사죄경의 뜻대로 죄가 사하여지면서 의화(義化) 은총이 주어진다.
    트리덴티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언명하셨다. “누가 만일 가톨릭 교회내 고해는 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 영세 후 죄에 떨어질 때마다 신자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참으로 그리고 본 의미로서 성사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파문을 받으리라”(Sess. XIV, can. 1).
    “영세 후에 범한 모든 죄” : 위의 트리덴티노 공의회의 말씀과 같이 영세 후의 지은 죄가 고해 성사의 대상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비 교우에 의하여 (살인이) 되었으면 성세로써 씻겨질 것이요, 영세자에 의하여 되었으면 고해와 화해로 치료될 것이다”(Deconiug, adult. lib. Ⅱ, c. 16). 그러니까 영세 전의 죄는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영세 때 아무런 고백도 없이 완전히 사하여졌다. 그러므로 영세 후 그것이 생각나면 통회는 하는 것이 좋지만, 고해 때 고백할 것은 아니다. 고해의 대상이 못되기 때문이다.
    죄는 영혼의 병이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장 12-13절). 사람이 성세 성사로 교회 내에 출생하고, 견진 성사로 군인의 자격을 얻고, 병이 생기면 이 고해 성사로 치료를 받는다.
    237 󰃅 고해 성사로 어떻게 죄가 사하여지느뇨?
    󰂼 신부의 사죄함으로 사하여지느니라.
    238 󰃅 신부의 사죄함으로 어떻게 죄가 사하여질 수 있느 뇨?
    󰂼 이는 예수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인한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 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 다” 하시니, 고해 성사권을 받은 신부는 이 사죄권 에 대하여 사도들의 후계자니라.
    239 󰃅 고해 성사는 누구에게 필요하뇨?
    󰂼 영세한 후에 대죄를 범한 사람에게 필요하니라.
    240 󰃅 고해 성사의 효험은 무엇이뇨?
    󰂼 고해 성사의 효험은 고백한 모든 대죄와 소죄를 사 하고, 지옥 영벌을 면하게 하며, 잠벌을 감하고 성 우(聖佑)를 더하여, 후에 범죄함을 피하게 함이니 라.
    241 󰃅 고해 성사에 몇 가지 요긴한 것이 있느뇨?
    󰂼 고해 성사에 요긴한 것이 다섯 가지 있으니, 성찰 과 통회와 정개(定改)와 고명(告明)과 보속이니라.
    242 󰃅 성찰은 무엇이뇨?
    󰂼 성찰은 마음을 써, 혹 영세한 후로나, 혹 먼저 번 고해한 후로 범한 모든 죄를 살펴 알아냄이니라.
    243 󰃅 성찰은 어떠한 죄에 대하여 할 것이뇨?
    󰂼 성찰은 모든 대죄에 대하여 불가불 할 것이요, 소 죄에 대하여도 함이 매우 유익하니라.
    244 󰃅 자기가 범한 각 대죄에 대하여서는 성찰할 것이 무 엇이뇨?
    󰂼 성찰할 것은 그 횟수와 종류와, 종류를 변하게 하 는 연유니라.
    245 󰃅 죄의 종류를 변하게 하는 연유는 무엇이뇨?
    󰂼 두 가지 있으니, 소죄를 대죄 되게 하는 연유와 대 죄 되는 한 가지 행실로 여러 가지 계명을 범하게 하는 연유니라.
    246 󰃅 고해 성사의 다섯 가지 요긴한 것 중 제일 요긴한 것은 무엇이뇨?
    󰂼 고해 성사의 제일 요긴한 것은 통회니, 이는 죄를 뉘우쳐 한함이니라.
    247 󰃅 어떻게 하여 참 통회를 발하느뇨?
    󰂼 통회는 진정으로 발하고, 본성을 초월하게 하고, 극 도에 달하게 하고, 모든 죄를 다 뉘우쳐야 하느니 라.
    248 󰃅 통회를 진정으로 발하다 함은 무슨 뜻이뇨?
    󰂼 이는 외모로 하지 말고, 마음속으로부터 죄를 아파 뉘우치다 함이니라.
    249 󰃅 본성을 초월하게 하다 함은 무슨 뜻이뇨?
    󰂼 이는 본성의 이유에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성우(聖 佑)를 받아 신덕에서 나는 이유로 죄를 아파 뉘우 치다 함이니라.
    250 󰃅 극도에 달하게 하다 함은 무슨 뜻이뇨?
    󰂼 이는 세상 만고(萬苦)보다 죄를 더 아파 뉘우치다 함이니라.

  12. chlgurwn33 2019.02.01 1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51 󰃅 모든 죄를 다 뉘우치다 함은 무슨 뜻이뇨?
    󰂼 이는 모든 대죄를 하나도 빠짐이 없이 뉘우치다 함 이니라.
    253 󰃅 통회 몇 가지 있느뇨?
    󰂼 상등과 하등 두 가지 통회 있느니라.
    254 󰃅 상등 통회는 무엇이뇨?
    󰂼 상등 통회는 천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죄를 뉘우침 이니, 내 죄로 인하여 만유 위에 사랑하여야 할 지 선(至善)하신 천주께 욕되게 한 것을 생각하고 아 파함이니라.
    255 󰃅 상등 통회의 효험은 어떠하뇨?
    󰂼 고해할 뜻을 겸한 상등 통회는, 고명(告明)하기 전 에라도 즉시 죄를 없애느니라.
    256 󰃅 상등 통회를 자주 발함이 좋으뇨?
    󰂼 영혼의 은총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주 발함이 좋으 니, 특별히 범죄 한 때와 임종 때 발함이 더욱 좋 으니라.
    257 󰃅 하등 통회는 무엇이뇨?
    󰂼 하등 통회는 자기를 위하여 죄를 뉘우침이니, 내 죄의 추루함과 지옥벌을 받고 천당복을 잃게 된 것을 생각하고 아파함이니라.
    258 󰃅 하등 통회의 효험은 어떠하뇨?
    󰂼 하등 통회의 효험은 반드시 고해 성사를 겸하여야 죄사함을 얻고, 그렇지 아니하면 죄사함을 얻지 못 하느니라.
    259 󰃅 정개는 무엇이뇨?
    󰂼 정개는 다시 죄를 짓지 아니하고, 또한 범죄할 기 회를 피하기로 결심함이니라.
    260 󰃅 정개가 없으면 어떻게 되느뇨?
    󰂼 정개가 없으면 참 통회가 없음이니 사죄함을 얻지 못하느니라.
    261 󰃅 고명은 무엇이뇨?
    󰂼 고명은 고해 성사권이 있는 신부 앞에 성찰할 죄를 고함이니라.
    262 󰃅 예수 신부 앞에 고명하기를 명하심은 어쩜이뇨?
    󰂼 이는 예수 신부에게 죄를 풀고 혹 풀지 아니하는 권을 주셨은즉, 풀고 혹 풀지 못할 죄를 분별하기 에는 고명밖에 다른 법이 없느니라.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판결 형식으로 이 성사를 세우셨으므로, 판사인 신부는 전모를 먼저 알아야 하고, 또 이것은 고백자의 고명에 의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에 대하여 트리덴티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이미 설명한 고해 성사 설정에서 죄들의 완전한 고백도 우리 주로부터 제정되었고, 또 이것은 영세 후 범죄한 자들에게 하느님의 법으로 필요한 것임을 온 성교회는 언제든지 인정하여 왔다. …사제들이 사건을 모르면 판결할 수 없고, 또 각 죄의 종류를 말하지 않고 일반적으로만 고하면 보속을 정하는 데 공정을 기할 수도 없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고해자는 근실히 양심을 성찰하여 의식한 모든 대죄는 비록 지극한 비밀이라도 고백할 것이다”(Sess. XIV, cap. 5).
    “풀고 혹 풀지 못할 죄” : 본래부터 고해 성사로도 사할 수 없는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백자의 준비 여하에 따라 그럴 수 있다. 예를 들어, 첩이나 첩을 둔 사람이 고해소에 들어가 사실을 고백하면, 사제는 먼저 가서 완전히 청산하고 오라고 말할 것이며, 결코 사죄를 베풀지는 않을 것이다.」참조.

  13. chlgurwn33 2019.02.01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성삼 가족수도회 기도서 122-123페이지【「예수성심 호칭기도」】: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하늘에 계신 천주성부님
    자비를 베푸소서.(이하 같은 후렴)
    ● 세상을 구원하신 천주성자님
    ⃝ 천주성령님
    ●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 영원하신 성부의 아들이신 예수성심
    ● 동정 마리아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성심
    ⃝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성심
    ● 영광과 위엄이 가득하신 예수성심
    ⃝ 하느님의 성전이신 예수성심
    ● 지존하신 이의 장막이신 예수성심
    ⃝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신 예수성심
    ● 사랑의 불가마이신 예수성심
    ⃝ 나눔과 베풂의 그릇이신 예수성심
    ● 자비와 인정이 넘치시는 예수성심
    ⃝ 모든 덕행의 원천이신 예수성심
    ● 지극한 찬미를 받으실 예수성심
    ⃝ 모든 마음의 중심이요 임금이신 예수성심
    ● 온갖 지혜와 지식의 보고이신 예수성심
    ⃝ 천주성이 충만하신 예수성심
    ● 성부의 기쁨이신 예수성심
    ⃝ 풍부한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성심
    ● 죽은 이들의 희망이신 예수성심
    ⃝ 지극히 자비로우시고 인내하시는 예수성심
    ● 모든 이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예수성심
    ⃝ 생명과 성덕의 샘이신 예수성심
    ● 저희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성심
    ⃝ 극도의 모욕을 당하신 예수성심
    ● 저희 죄로 찢기신 예수성심
    ⃝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성심
    ● 창에 찔리신 예수성심
    ⃝ 모든 위로의 샘이신 예수성심
    ● 생명이요 부활이신 예수성심
    ⃝ 평화요 화해이신 예수성심
    ● 죄인들의 제물이 되신 예수성심
    ⃝ 주님께 바라는 이들의 구원이신 예수성심
    ● 주님을 믿으며 죽는 이들의 희망이신 예수성심
    ⃝ 모든 성인의 즐거움이신 예수성심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를 용서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마음이 어질고 겸손하신 예수님
    ●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

    + 기도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자의 성심을 보시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바친 성자의 찬미와 보속으로 마음을 푸시어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저희를 용서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 아멘.
    ※ 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전능」: 구약성경 총84절 + 신약성경 총14절 = 구, 신약 총98절 참조.
    ※ 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창조」: 구약성경 총83절 + 신약성경 총34절 = 구, 신약 총117절 참조.
    ※ 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진리」: 구약성경 총19절 + 신약성경 총82절 = 구, 신약 총101절 참조.
    ※ 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주님」: 구약성경 총7245절 + 신약성경 총916절 = 구, 신약 총8161절【야훼 10 + 0 = 10, 주 하느님 361 + 9 = 370】참조.
    ※ 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기적」: 구약성경 총78절 + 신약성경 총28절 = 구, 신약 총106절 참조.
    ※ 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계시」: 구약성경 총7절 + 신약성경 총21절 = 구, 신약 총28절【환시 116 + 20 = 136】참조.
    ※ 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지혜」: 구약성경 총395절 + 신약성경 총49절 = 구, 신약 총444절 참조.
    ※ 묵상집 ‘82. 8) 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의 요약된 핵심’ 편 참조.
    ※ 영성시집 ‘181. 천주께서 세우신 교는 한 길이지....’ 편, ‘182. 윤회사상은 어디까지나 사상일 뿐....’ 편, ‘183. 가톨릭교회의 구원관과 불교의 구원관’ 편, ‘189. 완전한 해탈은 완전한 완덕이다’ 편, ‘190. 깨달음에도 큰 깨달음과 작은 깨달음이’ 편, ‘206. 자연종교와 계시종교의 차이점’ 편, ‘207. 문득 구원의 화두(경지)를 깨달았습니다’ 편 참조.
    ※ 나는 불자들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절은 문화제로 보존될 것이니「시라의 아들 예수회(지혜의 수련원)」으로 간판을 걸고 성서의 지혜를 수련하고 싶었습니다.

  14. 최혁주33 2019.07.30 16: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16.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③” 편

    ※ 2019. 7. 29. 나는 아침기도 성무일도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하던 대로 오늘 ‘성녀 마르타 기념일’ 요한복음 11장 17-27절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 편을 살펴보고 오늘의 묵상【주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되찾아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창조 이전부터 우리에게 계획된 생명으로 이 땅에서 이미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며 육신의 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그런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되돌려 주시고자 하는 생명은 육신의 숨이 아니라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라자로가 되돌려 받은 육신의 생명은 다시 끊겼지만 그가 되돌려 받은 영원한 생명은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마르타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많은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일부분도 같이 살펴보았는데 즉 오늘의 묵상 일부분에서 ‘영원한 생명’이란 똑같은 단어가 다섯 번이나 소개된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道를 깨달았다. 진리를 깨달았다. 생, 노, 병, 사를 해결했다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즉 죽음이 없는 영생을 해결했다는 것은 바로 요한 14장 6-7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라고 말씀하신 전능하신 진리인 그분을 깨달았다는 즉 그분은 道를 깨달은 적도 없으신 道 자체이시고, 진리를 깨달은 적도 없으신 진리 자체이시고, 생명을 깨달은 적도 없으신 생명 자체이신 진리인 그분과 합일(空)을 이루었다는 즉 전능(空)을 깨달았다는 즉 그 생명(空)은 죽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생, 노, 병, 사를 해결했다는 것은 태어나서 받은 성소(聖召)를 깨달았다는 것이며 즉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제야 제대로 깨달아지는 것이지만 단순히 불교를 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반야다라를 따라 출가하여 40년 동안 수행하고 스승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 67년이 지나면 동쪽으로 가서 전법을 전하도록 하여라. 남쪽에 머무르지 말고 북쪽으로 가도록 해라. 그래서 남쪽에서 양무제를 만나고 북쪽 위나라로 가서 숭산 소림사에서 신광(혜가)이라는 수도자가 나타날 때까지 고요히 머물렀듯이 그리고 혜가에게 법을 전하고 내 일은 이미 끝났도다. 하고 혜가에게 다섯 번 독약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해주시고 여섯 번째의 독약은 제자에게 법을 전했음으로 즉 스승이 명하신 성소(聖召)를 완수했음으로 그냥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 독약을 먹고 죽어서 528년에 그 시신을 웅이산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듯이(인터넷 다음 블로그「달마의 생애」참조) 즉 내가 죽은 후 67년이 지나면 동쪽으로 가서 전법을 전하도록 하여라. 남쪽에 머무르지 말고 북쪽으로 가도록 해라. 그래서 남쪽에서 양무제를 만나고 북쪽 위나라로 가서 숭산 소림사에서 신광(혜가)이라는 수도자가 나타날 때까지 고요히 머물렀듯이 즉 67년 이란 년도까지 정해주신 이런 전법은 스승이 명하신 분명한 성소(聖召)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15. 최혁주33 2019.08.14 07: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06.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비디오를 보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불교를 전하러 오셨겠지만
    인도에서 깨달은 달마대사가
    와서 또 면벽을 구년을 하고
    “마음의 달이 물 밑에서 차오르면
    참 너는 어디로 가겠느냐?”고
    “네 화두는 바닥이 보이느냐?”고
    이것이 묻는 화두였습니다
    깨달음은 마음의 법칙이고 영의 질서인 것을
    마음의 달이 물밑에서 차오르면
    참 나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겸손해지면
    채워지는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마음이 깨끗하여지면
    왜 마음의 밑바닥이 들여다보이지 않겠습니까?

    ※ 영성시집 ‘216.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③”’ 편 ※ 2019. 7. 29. 참조.

  16. 최혁주33 2019.08.14 0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성시집 ‘216.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③”’ 편 ※ 2019. 7. 29. 참조.

    ※ 2019. 6. 19. 나는 영성시집 ‘190. 깨달음에도 큰 깨달음과 작은 깨달음이’ 편을 교정보면서 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에서「통달」과「깨달음」을 검색해보다 성경(욥기 11장 6절, 잠언 17장 16절, 지혜 15장 3절, 집회 51장 20절)에서 지혜라는 말을 하면서 깨달음이란 말을 또한 같이 언급하는 구절들을 보면서 ‘아하! 지혜와 깨달음은 비슷하면서도 또한 다른 말이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인터넷 다음에서「통달 깨달음」을 검색해 보았더니 블로그에「분별지(分別知) (No. 124)―분별지로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가 눈에 들어와 클릭해 보았더니 송담 스님의 법문과 해석부분이 있어서 법문을 듣고【*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분별지(分別智) ; 생멸 변화하는 물심(物心)의 모든 현상을 분별하는 지혜.
    범부(凡夫)의 지위에서는 허망하게 헤아리며 분별하는 망상이며, 불지(佛地)에서는 방편을 발휘하는 후득지(後得智)이다. 범부의 허망한 분별을 떠나면 무분별지(無分別智, 근본지根本智)와 상응하게 되는데, 이것이 근본적인 진실한 지혜이다.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무분별지(無分別智) ;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세상의 진리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지혜. 대상을 객체로 하여 인식하고 분석하는 분별을 초월한 절대적인 지혜를 뜻한다.
    *후득지(後得智) ; 근본지(根本智)에 이른 후(後)에 얻는[得] 지혜(智慧)라는 뜻.
    모든 분별이 끊어진 경지에 이른 후에 다시 차별 현상을 있는 그대로 확연히 아는 지혜. 모든 번뇌와 망상이 끊어진 깨달음을 이른 후에 다시 온갖 차별을 명명백백하게 아는 지혜.】해석부분을 읽어보았더니 그전에는 산은 변하지 않으니까 진리로 보고 물은 흐르고 변하니까 세속으로 비유해서 보는 경향으로 나름대로 이해해 왔었는데(영성시집 ‘141. 산은 산 물은 물①’ 편 참조) *후득지(後得智)를 보니 그게 아니고 깨닫기 전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깨닫고 난 후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뜻을 이론상으로나마 이제야 제대로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17. 최혁주33 2019.08.14 0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성시집 ‘216.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③”’ 편 ※ 2019. 7. 29. 참조.

    ※ 2019. 7. 29. 나는 아침기도 성무일도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하던 대로 오늘 ‘성녀 마르타 기념일’ 요한 11장 17-27절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 편【그때에 19절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절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절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절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절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절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절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을 살펴보고 오늘의 묵상【주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되찾아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창조 이전부터 우리에게 계획된 생명으로 이 땅에서 이미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며 육신의 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그런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되돌려 주시고자 하는 생명은 육신의 숨이 아니라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라자로가 되돌려 받은 육신의 생명은 다시 끊겼지만 그가 되돌려 받은 영원한 생명은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마르타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많은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일부분도 같이 살펴보았는데 즉 오늘의 묵상 일부분에서 ‘영원한 생명’이란 똑같은 단어가 다섯 번이나 소개된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道를 깨달았다. 진리를 깨달았다. 생, 노, 병, 사를 해결했다는 것이 바로 영생을 체험했다는 것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즉 요한 14장 6-7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라고 말씀하신 전능하신 진리인 그분을 체험했다는 즉 그분은 道를 깨달은 적도 없으신 道 자체이시고, 진리를 깨달은 적도 없으신 진리 자체이시고, 생명을 깨달은 적도 없으신 생명 자체이신 진리인 그분과 합일(空)을 이루었다는 즉 전능(空)을 깨달았다는 즉 그 생명(空)은 죽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생, 노, 병, 사를 해결했다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받은 성소(聖召)를 깨달았다는 것이며 즉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것도 이제야 제대로 깨달아지는 것이지만 단순히 불교를 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반야다라를 따라 출가하여 40년 동안 수행하고 스승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 67년이 지나면 동쪽으로 가서 전법을 전하도록 하여라. 남쪽에 머무르지 말고 북쪽으로 가도록 해라. 그래서 남쪽에서 양무제를 만나고 북쪽 위나라로 가서 숭산 소림사에서 신광(혜가)이라는 수도자가 나타날 때까지 고요히 머물렀듯이 그리고 혜가에게 법을 전하고 내 일은 이미 끝났도다. 하고 혜가에게 다섯 번 독약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해주시고 여섯 번째의 독약은 제자에게 법을 전했음으로 즉 스승이 명하신 성소(聖召)를 완수했음으로 그냥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 독약을 먹고 죽어서 528년에 그 시신을 웅이산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듯이(인터넷 다음 블로그「달마의 생애」참조) 즉 내가 죽은 후 67년이 지나면 동쪽으로 가서 전법을 전하도록 하여라. 남쪽에 머무르지 말고 북쪽으로 가도록 해라. 그래서 남쪽에서 양무제를 만나고 북쪽 위나라로 가서 숭산 소림사에서 신광(혜가)이라는 수도자가 나타날 때까지 고요히 머물렀듯이 즉 67년 이란 년도까지 정해주신 이런 전법은 스승이 명하신 분명한 성소(聖召)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