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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옵티콘 > 설국열차와 푸코의 '감시와 처벌'

by 문촌수기 2016. 6. 19.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본 영화 '설국열차'황선생 와이드 철학논술 ------------------황인술

승인 2013.09.03  14:07:00

http://www.reader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3361

 

▲ 황인술 논설위원     © 독서신문
[독서신문] Ⅰ. 생각해보기 

우리 모두는 서로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 일단의 일시적인 연합형태는 존재하겠지만, 그것의 기본적인 요소는 개인들 또는 개인을 이루는 요소가 될 것이다.
- 미셀 푸코의 『푸코의 맑스』 중에서 -
     
 
봉준호

  봉준호(奉俊昊, 1969년 9월 14일 ~ )는 영화감독, 각본가로 대구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88학번)를 졸업했으며 한국 영화 아카데미 11기 출신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소설가 박태원의 외손자로 북한에 큰이모가 생존해 있다. 봉준호 어머니는 박태원의 둘째딸이다.
  1993년 6mm 단편 영화 <백색인>을 연출하여 영화계에 데뷔했다. 첫 장편 <플란다스의 개>가 흥행에 실패했으나 <살인의 추억>으로 작품성과 상업성을 인정받으며 유명해졌다. 2006년 <괴물> 개봉. 2008년 도쿄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프로젝트 영화 <도쿄!>에 참여한다. 여기서 멜로적 감수성을 인정받는다.
  2009년 <마더>를 개봉했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아들을 구하기 위한 엄마 이야기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소를 배경으로 선택하여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장면을 연출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봉준호 감독은 2011년 미국 최고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프랑스 만화를 각색한 <설국열차>를 2013년 7월 31일에 개봉하였다. 정치적 성향은 진보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노동당 당원이다.

영화 <설국열차> 줄거리

새로운 빙하기, 그리고 설국 17년 인류 마지막 생존지역 <설국열차>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 한 대가 끝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맨 뒤쪽의 꼬리 칸, 그리고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까지 즐기며 호화로운 객실을 뒹굴고 있는 앞쪽 칸. 열차 안의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17년 째, 꼬리 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긴 세월 준비해 온 폭동을 일으킨다.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장악, 꼬리 칸을 해방시키고 마침내 기차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해 절대 권력자 윌포드가 도사리고 있는 맨 앞쪽 엔진 칸을 향해 질주하는 커티스와 꼬리 칸 사람들. 그들 앞에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Ⅱ. 생각확대하기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미셀 푸코는 권력은 외부에 존재하는 강제력이 아니라 내부에서 인간을 물리적, 기계적으로 점령하여 연장된 도구로 인간을 제조하고 조립하는 힘이라고 했다. 앞 칸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적 지배와 통제를 전략적으로 사용(생체권력, 규율권력)하면서 신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권력인 생체 권력과 규율권력을 꼬리 칸 사람들의 신체에 여러 가지 기호를 부여한다.
  신체는 권력의 섬세하고 전술적인 분할 속에서 분석되고 재배치된다. 즉 신체는 성, 인종, 지적 능력, 활동, 수완, 행동방법, 속도, 열성, 품행 등으로 분류되고 분할되어 감시되고 관리되는 권력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신체는 ‘경제적 활용’을 위해 공간속에 배치되고 모든 곳에서 감시와 관찰이 행해짐을 영화 <설국열차>는 보여준다.
  폐쇄된 열차공간은 원형감옥에 해당된다. 원형감옥에서 감시당하고 있는 주체들은 자신들이 언제 감시당하는지를 절대로 알지 못하며 아주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규율(자기검열)하게 된다.  스스로를 규율하는 자기검열에 빠지면 저항권이 권리임에도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게 된다.
  설국열차 안에는 자신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분류표를 만들고 재배치한 칸은 승객들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주도면밀한 계획은 엔진 칸을 점령하고 있는 절대 권력자 윌포드에 만들어지고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믿음 체계를 갖도록 기차 권력은 주도한다.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까불지 말고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개천에서 용 안 나오는 법이니 빨리 포기하고 너희들의 운명에 순응하라고 꼬리 칸을 향해 경고하는 틸다 스윈턴의 말에서 숨 막히는 감시 시스템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존엄한 생명을 얕잡아 봄이며 인간에 대한 업신여김이다.
  생명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인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설국열차> 안에서는 얕잡아봄과 업신여김이 문제 되지 않고 용인된다. 열차 바깥세상으로 나가면 얼어 죽는다는 믿음, 이 믿음체계는 감시와 통제, 통제를 어기면 처벌 받는다는 것을 믿게 하는 기반이 된다.
  푸코는 믿음체계나 지식체계는 권력을 만든다고 보고 있다. 생존하게 위해 코뚜레가 채워진 사람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 열망을 버리면 안 된다. 통제에 길들여져야 한다. 통제에서 벗어나면 먹이를 구할 방법이 없다. 때문에 권력은 그들을 착취하면서 시혜를 베푼다고 느끼도록 훈육해 간다. 바퀴벌레로 만든 음식조차 거부하면 안 되는 것이다
  설국열차에서 저항은 감시와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몸과 영혼을 찾는 일이다. 그것은 훈육되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열차 밖, 눈의 나라 설국으로 나가는 일이다. 설국을 바라보고 설국으로 나갈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눈을 바깥으로 돌려 밖을 봐야 한다. 열차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열차 밖으로 나가면 굶어 죽고, 얼어 죽을 것이라는 믿음, 두려움, 공포는 문을 벽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오고 있는 시간을 살펴봐야 한다.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정확하게 응시해야 만이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보게 된다. 문을 잘 봐야 바깥세상을 볼 수 있고, 바깥세상을 잘 봐야 열차를 세울 수 있다. 열차를 세워야만 바깥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원형감옥


  판옵티콘(Panopticon : 다 본다)이란 1791년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시시설이다. 판옵티콘은 바깥으로 원주를 따라서 죄수를 가두는 방이 있고 중앙에는 죄수를 감시하기 위한 원형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죄수의 방은 항상 밝게 유지되고 중앙의 감시탑은 항상 어둡게 유지되어, 중앙의 감시탑에 있는 간수는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없는 구조이다.
  원형감옥 속에서 범죄인들은 훈육(=규율)되고 신체는 규율에 의해 잘 순종되는 신체로 만들어진다. 특히 감시와 훈육에서 판옵티콘이 주요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이 감시 장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죄수가 항상 감시당하고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것인데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교육을 통하여 특정인의 경우 ‘종교’, 일반적인 경우엔 ‘도덕(우정, 신의, 효, 타인권리 침해안하기 등등)’과 같은 사회규범에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길들여져 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게 되고, 타인이 있든 없든(감시하든지 하지 않든지) 스스로 나쁜 일을 할 것을 자제하고, 혹은 나쁜 일을 할 때 최소한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된다. 이렇게 판옵티콘에 수용된 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간수의 시선 때문에 규율을 벗어나는 행동을 못하다가 점차 이 규율에 익숙해지면서 규율의 ‘내면화’에 의해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게 되는 것이다. 즉 판옵티콘은 『감시와 처벌』에서 묘사하듯 중앙 탑에서 감시하는 방법을 통하여 죄수들이 감시당하는 것을 확신 하게하여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도록(자기의 느낌, 자기의 영혼으로 자신을 감시)하여 감시의 효과를 배가시키고, 감시에 따른 감시자-죄수간의 갈등은 최소화시키는 2가지 뛰어난 효능을 가지게 되는 효과가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이전의 ‘스펙터클한 사회’(거대한macro 감시)와 근대적인 ‘규율사회’(국지적micro 수준의 감시와 처벌)를 구별했다. 스펙터클 사회란 만인이 한 사람의 권력자를 우러러보던 시선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사회이고, 규율 사회는 한 사람의 권력자가 만
인을 감시하는 시선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사회이다. 만인이 한 사람의 권력자를 우러러보던 시선이 ‘군주권력’을 상징한 것이라면, 한 사람이 만인을 주시하는 시선은‘규율 권력’을 구현한 것이다.
  푸코는 벤담의 판옵티콘이 군주권력에서 규율권력으로의 변화를 상징하고 동시에 추동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판옵티콘이라는 원형건물에 구현된 감시의 원리가 사회 전반으로 스며들면서 규율사회의 기본원리인 판옵티시즘 panopticism으로 탈바꿈했다고 본 것이다. 21세기가 되자 이러한 매커니즘은 전자감시 형태로 감옥에서 나아가 온 사회에 슈퍼판옵티콘으로 일반적으로 퍼져있다. 즉, 푸코는 원형 감옥의 구조가 현대사회에서 일반화 되어 있고, 감시-규율이라는 매커니즘이 공장, 학교, 병원, 군대, 사회전체로 확대되고 침투되어 있다고 했듯 슈퍼판옵티콘(전자감시)는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 속에 들어오고 있다.
- 출처 : 홍성욱,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 2002.
 

Ⅲ. 생각정리하기
 
『감시와 처벌』 살펴보기 -훈육된 신체
 
1. 권력이론
  푸코는 법의 체계나 지배의 형태와 관련 없는 분석 원칙을 권력에 적용하여 권력에 관한 이론과 전략을 설명하였다.
  권력이란 국가권력뿐 아니라 사회 속에서 다양한 경로와 형태 및 제도들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권력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이는 권력이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이 도처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푸코는 본다.  
- 권력은 손에 넣거나 빼앗거나 공유하는 것, 간직하거나 멀어지게끔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고, 무수한 지점으로부터, 불평등하고 유동적인 관계들과 상호작용 속에서 행사된다.
 - 권력관계는 다른 유형의 관계(경제과정, 인식관계, 성관계)에 대해 외재성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형의 관계에 내재하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분할, 불평등, 불균형의 직접적 결과이며, 역으로 그러한 차별화의 내부적 조건일 뿐더러, 금지나 추방의 단순한 역할과 함께 상부구조의 위치를 점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는 거기에서 직접적으로 생산적 역할을 맡는다.
 - 권력관계는 지향성과 동시에 비주관성을 갖는다. 이것은 권력이 개별 주체의 선택 또는 결정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권력의 합리성을 주재하는 참모본부를 찾으려 하지 말자. 통치하는 카스트도, 국가의 여러 기구를 통제하는 집단도, 가장 중요한 경제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도 사회에서 작동하는 권력망 전체를 관리하지 못한다. 그러한 전술을 구상할 사람도 더 이상 없고 그러한 전술을 표명할 사람도 거의 없게 되는 가운데, 여러 전술을 통괄하는 익명의 거의 말없는 광범위한 전략이 암묵적으로 행사된다.
 
2. 신체와 권력
  권력은 의식보다는 신체를 작용지점으로 하여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우리 신체는 성, 인종, 지적 능력, 등으로 분할되어 감시되고 관리되는 권력의 대상이자 표적이 된다. 푸코는 권력은 하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권력지배 효과는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열, 조작, 전술, 기술, 작용 등에 의해 이루진다고 본다.
- 복종의 기술을 통해서 새로운 객체가 만들어진다. 서서히 그 객체의 신체는 기계적인 겉모습을 갖춘다. 새로운 객체란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속적인 근거가 되는 자연 그대로 신체이고, 그 자체 질서, 시간, 내적 조건 및 구성요소를 갖춘 특정한 작업을 영위할 수 있는 신체이다. 신체는 새로운 권력기구들의 표적이면서, 동시에 지식의 새로운 형식대상이 된다.   
- 개인을 규제하는 모근 기관들은 이중적인 양식에 따라 행동한다. 즉 이원론적인 구분과 이름붙이기(미친/제정신인, 위험한/무해한, 정상적인/비정상적인 등)의 이중양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나아가 강제적 할당 양식, 차등적 배분 양식(그가 누구인가, 그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는 어떻게 특징지어져야 하는가, 그는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그를 개인적 방식으로 꾸준히 감시할 수 있는가 등등)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 그리하여 근대인은 규제라는 그물 속에서 태어난다. 갖가지 규칙과 세칙, 까다로운 검사, 삶과 신체에 속속들이 가해지는 자질구레한 통제, 특히 학교, 병원, 작업장 등의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그물 속에서 태어난다.
- 영혼은 신체의 감옥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그 인간, 그리고 사람들이 해방시키도록 노력하고 있는 그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 인간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복종화의 성과인 것이다. 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안의 한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신체의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
- 현대사회는 감시사회다. 신체는 심층적인 공격대상이 된다. 대대적인 교환의 추상화한 체계 뒤에는 유용한 힘을 얻기 위한 정밀하고 구체적인 훈육이 계속되며, 정보 소통의 경로는 지식의 축적과 집중화의 지주가 되고, 기호들의 작용은 권력이 어느 곳에 축적과 집중화의 지주가 되고, 기호들의 작용은 권력이 어느 곳에 닻을 내려야 하는 지를 규정한다. 사회질서 속에서 힘과 신체에 관한 전술에 의거하여 개인은 세밀한 의도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 이제 새로운 형태의 감시는 노동 전 과정을 따라다닌다. 그것은 생산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활동, 수완, 행동방법, 속도, 열성, 품행을 두루두루 고려하는데, 생산 장치가 한층 더 대규모화하고 복잡하게 됨에 따라, 감시는 분명한 기능을 갖게 되고 ‘생산과정의 일부’로 완전히 통합되게 된다.

3. 권력과 지식
  푸코는 지식 생산과 축적은 권력 장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지식에 대한 형식 및 내용의 발달이 인간본성 해방을 보장하는 요소가 아니라, 거대한 지식체계 형성은 예속화, 지배 효과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 여러 인간과학이 형성될 수 있고 인식구조에서 모든 대변동 효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과학이 특수하고 새로운 권력양태, 이를테면 신체에 관한 어떤 정책, 다시 말해서 축척된 사람들을 순종적이고 유용한 것으로 만드는 어떤 방법에 의해 유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인하여, 권력관계 안으로 지식의 명확한 관계를 끌어넣는 일이 필요했고, 예속화와 객관화를 교차시키기 위한 기술이 요구되었으며, 개인화에 따른 새로운 절차들이 구성될 수 있었다. 인식 가능한 대상으로 인간(영혼, 개성, 의식, 행실 중에서 어느 것이든 여기에서는 중요하지 않다.)은 이러한 분석적 시각의 포위와 지배- 관찰의 결과이자 대상이다.
- 더 나아가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권력은 어떠한 지식을 창출한다는 점이며, 권력과 지식은 상호 직접 관여한다는 점이고, 또한 어떤 지식의 영역과의 상관관계가 조성되지 않으면 권력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권력적 관계를 상정하거나 구성하지 않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4. 규율과 권력의 효과
  규율은 개인을 권력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특정한 기술이며, 다수의 인간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기 위한 기술이다.
- 규율은 다수 인간을 질서정연화게 배치하기 위한 기술이다. 이러한 규율 특성은
첫째, 권력 행사를 가능한 한 경비가 들지 않게 할 것, 그 결과로 신체로부터 최대한 시간과 힘을 추출하기 위하여 시간표, 집단훈육, 연습, 총괄적인 동시에 상세한 감시 등 전체적 방안이 마련된다.
둘째 사회적 권력 효과가 최대한의 힘으로 파급되도록 하고, 실패나 결함 없이 가능한 한 멀리 확산되도록 할 것,
셋째, 권력의 이러한 경제적인 증대와 권력이 행사되는 기관(교육, 군대, 산업)의 성과를 결부시킬 것 등이다.
- 말하자면 규율은 신체의 힘을 가장 값싼 비용의 정치적인 힘으로 환원시키고, 또한 유용한 힘으로 극대화시키는 단일화한 기술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장에서 규율은 더 중요한 것이다. 더욱이 법률체계가 보편적 규범에 의거하여 법적 주체를 규정하는 반면에 규율은 사람들을 특징짓고, 분류하며 특정화한다. 어떤 척도에 따라 배분하고, 어떤 기준을 삼아서 분할하며, 개개인을 상호비교해서 서열화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격을 박탈하고 무효로 만든다. 즉 이러한 규율 중심적 관계는 계약적인 관계를 대립시키고, 계약적인 관계가 규율 장치를 갖게 되는 순간부터 그 관계를 체계적으로 부정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얼마나 많은 현실적 방법들이 노동 계약의 법률적 약속과 다르게 이루어지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Ⅳ. 생각찾아보기
  푸코가 자기검열로 스스로 통제하도록 유도하는 판옵티콘을 말했다면 <설국열차>는 인간을 물리적, 기계적으로 점령하여 연장된 도구로 인간을 제조하고 조립하는 시스템으로 통제되는 세상을 은유한다. 열차 칸들은 일정한 계급질서에 의해 나뉘어져 있다. 맨 마지막 칸은 슬럼가, 중간 칸에는 프롤레타리아인 노동자, 그 다음 칸에는 통제도구인 경찰조직, 그 다음 칸에는 부르주아 계급으로 향유의식만 있는 귀족들이 있다. 맨 앞 칸인 엔진실은 통제된 세상을 설계한 통치자 윌포드가 있다.
  <설국열차> 설정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통제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글로벌화, 신자유주의, 최첨단 기기들에 의한 노동의 종말, 그로 인한 극심한 취업난, 불투명한 미래, 먹이마져도 구할 수 없는 상황,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열심히 살아왔으나 어느 날 하우스푸어로 전락해 절망에 빠진 사람들, 상대적 박탈감,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통제사회(CCTV) 등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 암담한 현실에서 피의 혁명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통제된 세상, 극심한 박탈감, 절망에 빠진 민중들은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봉기하여 세상을 뒤집어 놓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넘을 수 없는 물리적, 기계적벽이라는 시스템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편리에 의해 만들어낸 움직이는 기계 시스템. 인간성과는 아무런 상관관계 없이 제 스스로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자본이라는 괴물. 이 보통 사람 능력과 힘으로 불가능한 시스템, 열차의 엔진은 물신을 상징하고 있다. 이에 대해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황인술 논설위원(인문학당 아르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