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장(尋牛莊), 때는 1937년 3월. 아직 잔설에 서늘하다. 그림 속에 세 명의 주인공이 한자리에 만났다.
북정마을의 심우장 언덕 위로 성벽이 보인다. 한양도성 북악산 동북자락 성곽이다. 일제의 패망을 암시하듯 '돌집' 위의 남녘 하늘에는 핏빛 전운(戰雲)이 감돈다.
세 명의 주인공은 만해 한용운, 일송 김동삼, 시인 조지훈. 만해와 일송은 환갑을 바라보는 초로이며 지훈은 아직 감수성 풍부한 열일곱 청춘이다. 그들이 일송 김동삼의 장례식, 심우장 마당에서 만난다.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 ~ 1944)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만해 한용운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만해 선생은 성북동에 자리잡으면서 집을 북향으로 짓게 하였다. 집은 햇살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남향으로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일제의 조선총독부, '돌건물'을 향할 수 없다며 등을 돌렸다.
당호 심우장(尋牛莊)은 '소를 찾는 이의 집'이라는 뜻이다. 자기의 진면목과 부처의 도를 찾아가는 열 단계의 길이 곧 심우이며, 그 첫 걸음이 또한 심우[尋牛]이다. 그렇게 찾은 소를 길들이고[牧牛], 나아가 잊어 버리고[忘牛], 나도 비우고[人牛具忘ᆞ空], 중생을 제도하고자 저자거리로 나간다.
ㅡ참조ᆞ산사로 가는 길ᆞ벽화(심우도)
http://www.korearoot.net/sansa/source/me6/5.htm
구도의 심경으로 자신의 당호로 삼고, '찾았으면 또한 잊지 말 것'을 역설하면서 <심우장>을 제호로 시를 지었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 심우장1
♡ 마저절위(磨杵絶葦)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고, 가죽 끈으로 엮은 책이 다 헤어 질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라."
만해가 거처하던 방에서 친필을 서각한 현판을 만났다. 이 글은 제자에게 써 준 글이다. 한편 '심우(尋牛)'해 온 만해의 면학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백의 마부작침(磨斧作針)과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 고사를 하나로 묶은 듯 하다. 다만 공자가 세번이나 엮은 것은 가죽끈(위ㆍ韋)인데, 용운은 갈대(위ㆍ葦)을 썼다. 잘못 썼다해도 어긋남이 없다.
만해의 시는 에로틱하면서 경건하다. '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가? 그의 시 중에서 나는 이 시를 참 좋아한다. 대체 당신은 누구시길래?
♡ 심우장과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1878∼1937)
경북 안동 사람으로 본명은 김긍식이다. 독립운동을 하다 옥사하신 큰 인물이었음에도 내가 몰랐다. 참으로 송구스럽다. 이제라도 기억하고 보답하고 그 뜻을 전하고자 이 분을 그렸다.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김동삼 장군은 유교적 학식과 함께 '만주의 호랑이', '남만의 맹호’로 불릴 정도로 용맹한 기질을 겸비하여 김좌진, 오동진 등과 3대 맹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후에 독립군을 통합하고 통의부 총장을 역임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며 옥고를 치르다가 그만 1937년 3월 3일 순국하였다.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독립기념관에 옥중 유언인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던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옥중 순국 후에도 일제는 그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않았다. 가슴에 수인번호와 본명 '730, 김긍식(金肯植)'을 붙인 채 시신은 방기되어 있었다. 소문을 듣고 만해 선생이 형무소를 찾아가 시신을 수습하고 심우장에 모시면서 장례식을 치뤘다. 5일장이었음에도 찾아온 이는 스무명 정도였다. 여기에 시인 조지훈과 부친이 있었다.
많은 이들은 일제 탄압에 꼬리 잡힐까봐 두려워 자리를 피했다.
만해는 "내, 이 어른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장례식은 심우장 마당에 차렸다.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 조헌영(한의사, 독립운동가, 제헌의원, 납북)이 그 비용을 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장한 유해는 일송의 유언대로 한강에 뿌려졌다.
시인 조지훈은 일송선생 추모시에서
"아, 철창의 피눈물 몇 세월이던가
그 단심 영원히 강산에 피네
심상한 들사람들도
옷깃 여미고 우러르리라
온 겨레 스승이셨다.
일송 선생 그 이름아"
<일송선생 추모가 일부 조지훈시, 이강숙곡>
한편, 서촌의 우당기념관에서도 우당 이회영과 함께 한 독립운동가 31인에서도 김동삼은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경북 유림대표, 경학사. 신흥강습소 설립운영에 참여 부민단 조직. 서로군정서 참모장. 통의부 조직. 국민대표대회의장. 정의부 참모장. 행정위원. 민족유일당 촉진회 위원장. 피체, 10년형 선고, 옥사.>
♡ 조지훈(趙芝薰, 1920 ~ 1968)은 경북 영양사람, 본명은 동탁(東卓). 일제 강점기 이후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 시인(청록파)이다.
성북동 나들이 초입, 방우산장에서 만난 시인 조지훈을 여기 심우장에서도 떠올려본다.
만해는 심우(尋牛)한다했는데,
시인은 방우(放牛)해도 좋다고 했다.
'찾는 것'과 '놓아 버리는 것'이 크게 다르지만 십우 단계를 걷다보면 결국 같은 길에서 만나는 것 아닐까?
조지훈은 아버지 조헌영을 따라 심우장에서 치룬 김동삼의 장례식에 참례하였다. 이때가 열 일곱살, 어린 총각이다. 이 장례식에서 일송의 원혼을 달래는 승무제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훈이 심우장 마당에서 승무를 보는 것을 상상하였다. 시인은 열 아홉에 <승무> 시를 지었다.
훗날 시인은 “용주사 승무제에서 어느 이름 모를 승려의 승무를 보고는 밤늦도록 용주사 뒷마당 감나무 아래에서 넋을 잃고 서 있었다”며 “당시 승무의 불가사의한 선율을 다음 해 여름에 비로소 시로 지을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불교신문>에서)
시적 소질도 있었지만 불교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이 어떻게 스무살도 안된 어린 나이에 이런 깊이 있는 시를 지을 수 있을까?
일제시대, 많은 문예인들이 자발적으로 때론 어쩔 수 없이 곡학아세하면서 오명을 남겼지만 지훈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결벽과 절의의 선비였다. 해방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을 질타하는 대쪽같은 기질을 보였다.
그의 선비정신은 수필 '지조론'에서 잘 나타나있다.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ㅡ 지조론 중에서
김동삼의 장례식, 심우장 마당에서 일송의 원혼을 달래는 승무와 이를 지켜본 어린 총각 지훈의 감상을 상상하며, 그 순간을 그렸다. 이렇게나마 일송 김동삼 장군을 전하고 싶었다. 지훈의 나이쯤에 내가 애송했던 <승무>를 다시 불러 본다.
<승무(僧舞)> ㅡ 조 지 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을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 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런 뮤지컬이 있었다. 다시 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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