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대통령선거일.
아침 일찍 집 앞의 초등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 들러 투표하고 김포의 장릉을 찾았다. 동탄에 살 적에는 융건릉을 종종 찾았는데 부천에 와서는 집에서 3, 40분이면 갈 수 있는 김포 장릉을 2년을 넘겨서 이제서야 찾아간다. 김포시청 뒤 산, 도심에서도 가까워서 시민들에게 휴식의 장소가 되고, 숲도 있고 호수도 있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자연생태 학습의 장으로 쉽게 찾아갈 수 있겠다 싶다.
아니나 다를까?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 아이와 손을 잡고 걷는 이들, 유모차를 탄 아기, 하물며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들도 능을 찾아가는 숲길에서 볼수 있었다.









■ 능주 이야기
원종과 인헌왕후는 누구?

원종(元宗, 1580~1619)은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재위 1567~1608)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부李坪다. 8세에 정원군에 봉해졌고, 11세에 구사맹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셋을 뒀다. 임진왜란 중 아버지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막내 능창군이 역모에 연루돼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고 술을 많이 마시다 병들어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후일에 장남 인조가 반정 (1623)에 성공해 즉위하면서 정원군은 '원종', 그의 비는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로 추존(1632) 되었다.
■ 원종이 왕으로 추존된 이유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정통성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즉위 초반부터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선대 왕 선조, 추존왕 원종, 그 아들인 자신으로 이어지는 계승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원종 추존을 둘러싸고 찬반의견이 팽팽하게 맞섰고 결국 인조 10년에 추존하였다.











장릉 章陵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
원종元宗(1580~1619)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로 1587년(선조 20)에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고, 임진왜란 때 피난하는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이름을 올렸다. 1619년(광해군 11) 40세로 세상을 떠났고, 1623년 첫째 아 들 능양군(인조)이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존되었다.
인조는 재위 초반부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재위 10년 만에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하였다.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具氏(1578~1626)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590년(선조 23)에 정원군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에 봉해졌다. 1623년 인조가 왕 위에 오르자 계운궁啟運宮 연주부부인으로 높여졌으며, 1632년(인조 10)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1619년(광해군 11) 원종(정원군)이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고 1626년 당시 계운궁이던 인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김포 성산에 무덤을 만들고 육경원毓慶園이라 하였고, 이때 원래의 정 원대원군 묘도 원으로 지위를 높여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1627년(인조 5) 흥경원과 육경원을 합쳐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무덤의 이름을 흥경원이라 하였다가, 1632년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흥경원은 장릉이 되었다. 장릉으로 높여지면서 무석인, 석마, 석양과 석호 등의 석물을 추가로 세웠으나,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護石만 두른 상태로 두었다.


육경원 비대(비석 받침돌)
인조의 어머니인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 구씨(추존 인헌왕후)가 1626년(인조4)에 승하하자 무덤의 이름을 육경원(毓慶園)이라 하고 이곳 김포에 예장하였다.
다음해(1627년, 인조5)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추존 원종)의 무덤 홍경원(興慶園)을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서 육경원으로 옮겨와 두 원을 합하여 홍경원으로 하였다. 1632년(인조10)에 홍경원을 장릉(章陵)으로 격상시키면서 종전에 있던 석물들 중 사용하지 않게 된 일부를 능 좌측 언덕에 묻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육경원의 비석 받침돌이 지상으로 노출되어(2007년) 이 자리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
무늬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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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 저승과 이승을 이어주는 다리
나는 사찰에 가면 전각의 뒤로 즐겨 돌아간다. 좌우벽과 뒤벽에 그려진 벽화를 보기 위해서이다. 벽화 속에 감동과 깨달음이 있다. 왕릉을 즐겨 찾는다. 조용한 숲속 길을 즐겨 걷는다. 산 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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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기본구성
안내지에서는 정자각 뒤의 신로(神路)를 표시해두었지만, 막상 홍살문 앞의 구성도에서는 신로 표시가 없었다. 나는 꼭 정자각 뒤로 돌아가 신로를 찾아본다.
죽은 왕, 왕비의 신령이 이승 사람의 제향을 받으러 내려오는 길의 의미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마치 전생에서 이생의 삶으로 이어지는 탯줄과도 같은 길이기 때문이다.



















재실 齋室
Tomb Keeper's House
이 건물은 원종과 인현왕후 구씨의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이다. 재실은 왕룡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재래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그 외 부속 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
포근한 매화낙지형 터
大院君 묘제에 맞춰 조성
장릉(章陵)은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의 아버지 인 추존왕 원종(元宗, 1580~1619)과 비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 구씨(具氏)의 능으로, 난간이 없는 동원쌍릉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 (定達君)이며 이름은 부(坪)이다. 정원군은 선조와 인빈김씨 사이에서 난 세 번째 아들로, 친모가 낳은 형제가 9명이나 된다. 선조는 여러 부인 중인 빈김씨를 총애하였다. 생모의 힘으로 그의 동복형 신성군이 세자 책봉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때 병사하였다. 신성군이 아들 없이 죽자 선조는 인빈김씨의 봉사(奉祀: 제사를 받듦)를 정원군에게 맡겼고, 정원 군은 자신의 셋째 아들 능창군에게 신성군의 봉사를 위임하였다.
이처럼 선조의 사랑을 받은 정원군은 이복형인 세자 광해군의 섭정에 불만을 갖고 자주 정치에 개입하였다. 선조가 근심이 많을 때 정원군의 큰아들 종(條: 능양군, 인조)은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그림을 그려 바쳐 각별한 사랑과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선조의 급서로 이복형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정원군도 어려움 에 처했다. 정원군은 임진왜란 중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봉해졌으나, 셋째 아들 능창군이 광해를 축출하려는 역모사건에 연 루돼 곤욕을 치른다. 능창은 신성군의 아들로 입적돼 대북파의 지지를 받고 있어 광해군에게는 정적이었다. '광해군일기'(광해군이 폐위돼 실록이라 하 지 않고 일기로 명명)에 “능창군은 역모로 몰려 위리안치(圍離安置)돼 냉방에서 자 고, 모래와 흙이 섞인 밥이라 먹지 못해 나인 관동이 던져주는 밥을 얻어 먹다 목매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광해군이 넌지시 유 도했다"고 전한다.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새문리(塞門里)에 있는 정원군의 집터에 왕성한 기운이 돈다는 설이 나돌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민가 수 천 채를 헐고 그 자리에 이궁인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관동이 광해 때는 내놓지 못 하고 흙 속에 묻었다가 인조반정 이 후 알려졌다고 한다. 이는 광해군을 음해하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적인 글귀로 해석된다.
정원군은 어려서 기표(奇表: 우뚝한 외모)가 있고 우애가 깊어 선조의 사 랑을 많이 받은 만큼 광해군의 견제 가 심해 걱정과 답답한 심정을 술로 달래며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 하게 지낸 것을 알았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았다. 오직 바라건대 빨리 죽어 지하의 선왕(선조)을 따라가는 것뿐"이라고 말하 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정원군은 1619년(광해 11년) 12월 29일 세상을 떠나니, 불과 마흔 살이었다. 광해군은 길지로 알려진 정원군의 어머니 인빈김씨의 장지를 감시하게 하고, 정원군의 장례도 서둘러 양주군 곡 촌리에 군묘 형식으로 치러 조문객까지 감시하였다.
4년 뒤인 1623년 능양군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라(인조반정)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大院君)에 봉했다. 그리고 1627년에 묘가 원(園)으 로 추승돼 김포 성산언덕으로 천장하면서 1년 앞서 조영한 인헌왕후의 육 경원과 쌍릉으로 합쳐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인조 10년 이귀(李貴) 등 의 주청에 따라 정원군은 다시 원종으로 추존돼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석 물을 왕릉제로 개수했다. 존호는 '원종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元宗敬德仁憲鴻穆章孝大王)'이라 하고 비는 '경의정정인헌왕후(敬毅貞靖仁獸王后)'로 추승하면서 성종의 아버지 덕종의 추존 예를 따랐다.
인현왕후는 본이 능성(綾城)인 좌찬성 구사맹의 딸로 13세에 정원군(원 종)과 결혼해 능양군(인조), 능원군, 능창군을 두었다. 큰아들 인조가 즉위 하자 연주부부인으로 높여졌고, 궁호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였다. 엄숙 하고 화락(和樂)하고 법도가 있으며 침착하고 단정했다고 한다. 1626년 1 월 14일 인조의 모친 계운궁 구씨(추존 인헌왕후)가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 났다. 장지로 김포, 고양, 파주 교하의 객사 뒷산이 추천됐으나 김포가 풍수적으로 사신이 완벽한 지형이라고 해 이곳에 모셔졌다. 묘호는 육경 원(毓慶園)이라 하였다. 이때 상주는 사가의 예에 따라 큰아들 능양군(인조) 이 군주이니 차남 능원군이 했다. 이때는 정원군으로 추존되기 전이다. 다음 해 그의 부군 정원군이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흥경원으로 불렸다.
1632년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승될 때 함께 인헌왕후도 함께 추존되고 능호를 장릉(陵)이라 했다.
장릉은 남한정맥의 계양산과 가현산의 중간에서 분기, 황하산을 거쳐 장릉(북성)산에 이르는 용맥 아래에 자리 잡았다. 즉 장릉산을 주산으로 하고 계양산을 조산(朝山)으로 하는 사신(四神)이 확실하고, 수계가 맑고 분 명히 흘러 장릉 연지에 합수되는 길지로 알려진 곳이다. 풍수가들은 매 화낙지형,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등으로 평가한다.
경사지의 사초지를 따라 볼록한 지형에 자리한 장릉은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단순한 둘레석(호석 : 護石)을 두르고 있어 대원군의 묘제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석은 봉토를 둘러막는 돌로 호석면에 별다른 조각이나 문양을 새기지 않아 단순하다. 장릉만이 갖는 둘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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