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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고종과 명성황후, 홍릉(洪陵)

by 문촌수기 2025. 11. 8.

남양주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 40기 중, 4기가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순조와 순명ㆍ순정황후의 유릉, 단종비 순정왕후의 사릉,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이 있다.
축령산 자연휴양림에서 숙박하기로 하고 1박 2일에 걸쳐 이들 왕릉을 탐방하고 가을 단풍 숲길을 향유했다.
오전에 먼저 찾은 홍릉과 유릉, 같은 담장안에 있었다.
지금껏 찾아 다녔던 여러 왕릉과 달리 홍릉 유릉은 황제릉으로 능조성의 형식이 크게 달랐다.

황제릉이 왕릉과 다른 점은?
ㅡ 제향공간인 정자각이 일자형 침전

왕릉 정자각(위)과 황제릉 침전(아래)

ㅡ 침전 안에 어탑과 당가를 갖춤
*어탑(御榻): 임금이 앉는 평상이나 침상.
*당가(唐家): 침전 안에 설치하는 닫집(지붕 모양으로 만든 장식물)

왕릉 정자각 내부(위)와 황제릉 침전 내부(아래)

ㅡ 왕릉의 능침영역에 있던 문석인 무석인 등 동물석을 침전 앞에 배치
ㅡ 석양, 석호 대신 기린, 코끼리, 사자, 해치(해태), 낙타로 바꾸어 침전 앞에 배치

왕릉 봉분 앞의 석물(위)과 황제릉 침전 앞의 석문(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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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형 침전과 석물들 (홍릉)
침전 안에 어탑과 당기
침전 앞의 무석인과 문석인 (유릉)
홍릉(고종과 명성황후 합장릉), 병풍석, 난간석으로 두르고, 앞에 장명등과 좌우에 망주석만 있다.
낙타석, 해치석, 사자석 등이 향어로 좌우에 배치

홍릉洪陵

(대한제국 1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
조선 26대 왕(1863~1897)이자 대한제국 1대 황제(1897~1907)인 고종高宗 (1852~1919)은 추존 헌의대원왕(흥선대원군)의 아들로 1863년 신정황후의 명 으로 왕위에 올랐다. 세계정세에 발맞추고자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 각국과 수교 하였고, 근대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1897년 세계열강과 동등한 국격을 갖추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기면서 조선국 이태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1919년 세상을 떠났는데 고종의 장례는 3.1운동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1851~1895)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1866년(고 종 3) 왕비로 책봉되었다.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1895 년 궁궐에 난입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당하였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 포하고 왕비를 황후로 추존한 후 황제국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1897년 청량리(현 홍릉수목원 경내)에 만들어졌던 홍릉은 1919년 고종이 세상 을 떠났을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 황제릉의 형식을 갖춘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판위
석마석
사자석
무석인
침전과 월대
비각의 비석
능침영역 봉분
홍릉의 제정이 침전 오른편 뒤에 있다.
침전 왼편 뒤에는 예감이 있다.
신교

지당 池塘
홍릉 조성 시 배수를 위해 침전 앞에 지당을 조성하고 강우시에 빗물이 지당에 집수되어 연지로 배출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단부에 연지와 연결된 배수구로 추정되는 구조물이 있습니다.

지당 池塘
연지
연지
수복방 뒤로 마루와 뜰이 있다.
수복방 앞에 개천이 흐르고 다리가 놓여있다.
수라간, 특이하게도 좌우의 창 크기가 다르다

재실

홍릉 재실
재실에서 본 침전과 능침
능침과 봉분

<조선왕조실록>에서 읽는 을미사변

미우라 고로와 오카모토 류노스케

ㅡ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 살해사건과 이후 고종의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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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33권, 고종 32년 8월 20일 무자 1번째기사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에서 붕서하다


묘시(卯時)에 왕후(王后)가 곤녕합(坤寧閤)에서 붕서(崩逝)하였다. 【이보다 앞서 훈련대(訓鍊隊) 병졸(兵卒)과 순검(巡檢)이 서로 충돌하여 양편에 다 사상자가 있었다. 19일 군부 대신(軍部大臣) 안경수(安駉壽)가 훈련대를 해산하자는 의사를 밀지(密旨)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가서 알렸으며,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禹範善)도 같은 날 일본 공사를 가서 만나보고 알렸다. 이날 날이 샐 무렵에 전(前) 협판(協辦) 이주회(李周會)가 일본 사람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와 함께 공덕리(孔德里)에 가서 대원군(大院君)을 호위해 가지고 대궐로 들어오는데 훈련대 병사들이 대궐문으로 마구 달려들고 일본 병사도 따라 들어와 갑자기 변이 터졌다. 시위대 연대장(侍衛隊聯隊長) 홍계훈(洪啓薰)은 광화문(光化門) 밖에서 살해당하고 궁내 대신(宮內大臣) 이경직(李耕稙)은 전각(殿閣) 뜰에서 해를 당했다. 난동은 점점 더 심상치 않게 되어 드디어 왕후가 거처하던 곳을 잃게 되었는데, 이날 이때 피살된 사실을 후에야 비로소 알았기 때문에 즉시 반포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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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33권, 고종 32년 8월 22일 경인 1번째기사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 중에 왕후(王后) 민씨(閔氏)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착취하고 짐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 사직(宗廟社稷)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
짐이 그 죄악이 극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짐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역시 그 패거리를 꺼려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짐이 이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지난해 12월에 종묘(宗廟)에 맹세하기를, ‘후빈(后嬪)과 종척(宗戚)이 나라 정사에 간섭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여 민씨가 뉘우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민씨는 오래된 악을 고치지 않고 그 패거리와 보잘것없는 무리를 몰래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국무 대신(國務大臣)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며 또한 짐의 나라의 군사를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하여 변란을 격발시켰다. 사변이 터지자 짐을 떠나고 그 몸을 피하여 임오년(1882)의 지나간 일을 답습하였으며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왕후의 작위와 덕에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이 가득차 선왕(先王)들의 종묘를 받들 수 없는 것이다. 짐이 할 수 없이 짐의 가문의 고사(故事)를 삼가 본받아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하였다.
【이때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심상훈(沈相薰)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으며 내부 대신(內部大臣) 박정양(朴定陽)은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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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33권, 고종 32년 8월 23일 신묘 2번째기사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폐서인 민씨에게 빈의 칭호를 특사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은 왕태자(王太子)의 정성과 효성, 정리(情理)를 고려하여 폐서인(廢庶人) 민씨(閔氏)에게 빈(嬪)의 칭호를 특사(特賜)하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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