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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남양주 사릉

by 문촌수기 2025. 11. 10.

남양주 사릉 (南楊州 思陵)
국가지정유산, 사적 제209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사릉(思陵)

조선의 왕릉 중 유일하게 사가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의 능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宋氏)(1440~1521)는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1454년(단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다음 해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주자 의덕왕 대비 (懿德王大妃)가 되었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신분이 낮아져 영월로 유배되었고, 정순왕후도 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졌다. 궁을 나온 정순왕후는 현 동대문 밖에 있는 정업원*<낙산자락 비우당 자주동샘  https://munchon.tistory.com/m/1009>

낙산자락 비우당 자주동샘

■ 낙산정상에서 북으로 바라본 전경한양도성 낙산정상에서 동으로, 왼쪽으로는 한성대학교, 오른쪽에 쌍용2차아파트 담장 사이로 난 길을 내려오면 아파트단지 정문 가까이에서 자주동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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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한 많은 여생을 보냈는데, 정업원 뒷산 봉우리 동망봉*에 올라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후 1521년(중종 16)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698년(숙종 24)에야 단종이 왕으로 복위됨에 따라 정순왕후도 왕비로 복위되었고 무덤도 능으로 높여져 능의 이름을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정순왕후가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씨 집안에서 자신들의 집안 묘역에 정순왕후의 묘를 모셨다. 1698년(숙종 24)에 정순왕후가 왕비로 복위되자 무덤도 능으로 다시 조성하게 되었는데, 이때 주변에 있던 해주 정씨들의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숙종의 명으로 그대로 두어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사릉은 병풍석과 난간석, 무석인 등의 석물은 생략하고 문석인, 장명등, 망주석, 석양, 석호를 배치하여 간소하게 조성하였다.

정자각 배위청 기둥이 한면에 대개는 3개인데, 사릉은 2개로 짧다.

사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배위청(정자각은 흉벽을 두른 정청과 기둥만 세운 배위청으로 나눈다)이 짧아서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丁)자형 보다는 정사각형의 느낌을 준다.

사각장명등과 혼유석(가운데), 석마와 문인석(좌우)

사릉은 대군의 예에 따랐으므로 능원도 다른 능에 비하여 단출하게 추봉 하였다. 즉 능침의 규모가 작고 병풍석, 난간석도 설치하지 않았다. 문석인과 석마만 있으며 양석과 호석도 한 쌍씩으로 간소화되어 있다. 능원의 좌향은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을 바라보는 계좌정향(熒坐丁向) 형태이 다. 장명등은 숙종조의 것으로 단종의 장릉 것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초의 사각장명등으로 평가된다.

비각과 수복방
조선국 정순왕후 사릉
수라간
수복방
예감이 뚜껑으로 덮혀있다.
신교, 정자각 뒤에서 봉분 지역으로 이어주는 상징적인 다리

(더하기)
사릉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조선 왕조 500년의 수많은 왕후와 후궁들 중 한이 가장 많은 여인으로 여산 송씨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단종 2) 정월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올리면서 의덕대비(懿德大妃)로 봉해졌다.
1456년 6월 상왕복위사건이 일어나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출신과 성승.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하고, 이듬해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奉)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왕후도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으며, 생부(生父)는 역모죄로 지방관노(地方官奴)로 영속되었다.
이후 왕후는 궁궐에서 나와 영월의 단종이 묻힌 장릉을 바라보기를 소원하여 동대문 밖(현 숭인동)에 작은 초실(草室)을 마련하여 거처하면서 소복과 소찬으로 평생을 마쳤다.
이 곳에는 왕후가 동쪽을 향해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쳤다는 동망봉,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영도교, 세조가 내린 영빈전을 거부하고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정업원터, 왕후를 동정하여 몰래 채소시장을 가장하여 채소를 파는 척하고 왕비에게 가져다주었다는 금남의 채소시장에 관한 유래가 전해져 내려온다.
1521년(중종 16) 왕후가 82세의 일기로 승하하자 중종(中宗)이 군부인(君夫人)의 예로 장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왕후는 후사가 없고, 친정이 역적으로 몰려 죽었을 뿐만 아니라 가산도 적몰되었기 때문에 묘자리가 없었다. 이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자신의 아들인 정미수(鄭眉壽)에게 시양(侍養)하게 하여 해주정씨 선산에 안장하였으며 위패도 정씨가에서 모시게 되었다.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로 추봉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고 숙종이 향사를 행하였다.
사릉은 군부인의 예로 조성되어 난간석과 무인석이 생략되었으며 복위 후 왕릉으로 승격되면서 모든 석물들을 능제에 따라 다시 조성해야 하나, 당시 가뭄과 기근으로 일부만을 이전대로 증수하여 석양과 석호 1쌍을 추가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능을 수호하는 호석과 양석은 2쌍을 배치하는 것이 예인데 장릉과 같이 추봉된 경우에는 각 1기만 배치하여 두어 차등을 두었다.
또한 묘역이 능으로 정해지자 정씨집안의 묘역들을 이전시켜야 하는 문제가 생겼으나 봉릉도제조 최석정이 정릉(貞陵)의 예(例)에 따르자는 의견으로 정씨가의 분묘들을 이전하지 않게 하고, 석물들은 땅에 묻게 하였다.

사릉 능침뒤로 난 숲길에서 본 정자각

해주 정씨 묘역
한편 조선시대 모든 능역에는 사가의 무덤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유일하게 이곳 사릉에만은 사가의 무덤이 몇 기 남아있다. 세계문화유산 위원회 실사자도 이에 의문을 제기했다.
조선의 왕릉 중 유일하게 사가의 무덤이 있는 사릉, 이 석물은 사가의 문석인이다

유일한 시누이인 경혜공주(단종의 누이)의 해주정씨 시가묘역이라 숙종 때 추숭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사가의 무덤을 이전하지 않고 능역을 조성하여 사릉의 역사로 받아들였다. 다행히 이곳 사릉은 도성으로부터 100리 안에 조성되어 왕실에서 친히 제향을 받들 수 있었다. 반면 영월의 단종 장릉은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유배되어 조영된 까닭에 왕이 친행하거나 조정(삼정승 또는 관찰사)에서 제례 지내기가 어려워 영월의 현감이 대행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숙종 조에 영월읍이 영월부로 승격을 하고 현재에도 단
종제의 초헌관은 영월 군수가 한다. 이후 단종제는 영월 최대의 축제로
자리 잡았다.
사릉은 초기에 사가의 묘역에 조영되어 능역의 규모가 크지도 않으며
아담하지만 능원을 둘러싼 솔밭이 아름다워 많은 사진작가들의 발걸음 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는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
태조의 5대조 묘역인 삼척의 준경묘역에서 채취한 소나무 후계목들, 조선왕릉의 역사경관림 복원에 쓰인다
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어서 많은 전통 수종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즉 조선시대 모화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모화관은 현 서대문독립문 근처에 있던것으로 주변에 조선 왕실에서 쓰이는 꽃과 나무, 잔디를 재배하고 아름답게 꾸며 태평관등을 지어 놓 고 외국 사신의 숙소 및 영접을 하던 곳이었다. 특히 이곳은 송림이 아름다웠다 한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묘포장에 있는 종자은행과 소나무 등 각종 유전자원은 궁·능의 생태문화자원의 보존적 의미가 있다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곳의 어린 소나무 묘목은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 인 강원 삼척의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준경묘·영경묘의 낙락장송의 후손들이다. 이 소나무는 숭례문 복원에도 사용될 정도로 대표적인 한국의 소나무로 평가받고 있다.

단종의 누님 시댁 가문인 해주 정씨 묘역
진산군부인 류씨 묘터
진산군부인 류씨 묘터의 문인석 등 석물

이곳은 조선 11대 중종과 숙의 홍씨의 아들 해안군(海发君 1511~1573)의 첫 번째 부인 진산군부인 류씨(晉山郡夫人 柳氏, 1506~1532)의 묘가 있었던 자리이다.
진산군부인은 본관이 진주인 류홍의 딸로 해안군과 결혼하였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고 2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83년 전주이씨 해안군과 종친회에서 진산군부인묘를 경기 고양시에 있는 해안군묘 옆으로 옮겼고 기존에 있던 석물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현재 모터에는 묘표석(石), 상석(石), 문석인(文石人), 망주석(黑柱石), 향로석(香爐)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ㅡㅡㅡㅡㅡ
남양주 사릉을 포함한 조선왕릉(왕릉 40기, 원 13기 등 총 53기)은 2009년 6월 26일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자료출처 : 남양주시청)
사릉의 숲길이 아름다워서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오르내리는 계단길이 더러 있어서 어르신들이 산책하기에는 불편하시겠다.

재실
재실
재실
사릉의 홍살문, 정자각, 봉분

(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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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업원 터
‘앞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 년이나 영원하리(前峯後巖於千萬年)’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밤을 보냈던 청룡사 우화루
동망봉
동망정

https://maps.app.goo.gl/WcNhsJ374aGABBJ29

동망정 · 종로구, 서울특별시

www.google.com

청계천 영도교
청계천과 영도교

https://maps.app.goo.gl/YMa4DgNm9MgTHJdf6

영도교 · 중구, 서울특별시

www.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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