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파별천리(2005미주탐방)

미국 250년 ②英·佛의 북미패권투쟁

by 문촌수기 2026. 2. 3.

[미국 250년, 이상과 현실의 투쟁] 신대륙 놓고 피흘린 영국과 프랑스... 결국 리더들의 역량 대결이었다
② 英·佛의 북미 패권투쟁

명재상 리슐리외·콜베르 앞세운
프랑스가 식민지 개척 앞섰지만
피트 수상의 리더십 빛난 영국이
마침내 프랑스 누르고 북미 차지

송동훈 문명 탐험가
입력 2026.01.28. 23:31
ㅡㅡㅡ
미국은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았다. 1776년 독립 이후 미국의 영토는 약 11배 확대됐고 인구는 135배 폭증했다. 세계 제1 경제력을 갖춘 건 100년 전이다. 영국인들이 신대륙에 세운 식민지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기적을 이뤘을까? 미국과 세계가 중대한 변곡점에 선 지금이야말로 그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편집자 주

미국 화가 벤저민 웨스트가 1770년 그린 ‘울프 장군의 죽음.’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1759년 지금의 캐나다 퀘벡에 있는 아브라함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했지만 영국군을 이끈 제임스 울프 장군은 총상을 입고 숨진 장면을 묘사했다./캐나다 국립미술관

21세기 초강대국 미국의 모태는 영국이다. 미국의 역사는 250년 전 영국의 13개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며 시작됐다. 두 나라는 오늘날까지 영어라는 공통의 언어와 주권재민(主權在民), 대의제, 법의 통치,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다. 영국이 미국의 모태가 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가 아는 상식보다 더 치열하고 극적이다. 북아메리카라는 광활한 신대륙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피를 흘리며 투쟁한 결과, 비로소 지금의 미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의 강국이던 프랑스는 왜 신대륙에서 자취를 감췄을까? 영국이 북미의 패권을 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프랑스 식민지의 거침없는 확장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연 선도 국가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지중해 문명권의 서쪽 변방에 위치한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는 대서양 진출에 유리했다. 그들은 아시아와 신대륙에서의 교역과 식민지 건설을 선점하며 독점적 특혜를 누렸다. 그러나 황금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네덜란드와 스웨덴까지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기회에 도전장을 던졌기 때문이다. 선두에 영국과 프랑스가 있었다.
두 나라는 스페인이 장악하고 있던 중남미 대신, 무주공산(無主空山)인 북아메리카 대륙을 공략했다. 영국은 오늘날 미국 동해안 최북단 메인 주에서 남부의 조지아 주에 이르는 지역에 터를 잡았다. 반면 프랑스는 오늘날 캐나다 퀘벡을 거점으로 대륙의 안쪽으로 진출했다.
프랑스가 신대륙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건 프랑수아 1세(재위 1515~47) 때부터다. 당시 프랑수아 1세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 카를 5세(재위1516~56)와 유럽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바다와 중남미에서는 스페인이 압도적이었기에, 프랑수아 1세는 북미 탐험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탈리아 출신 베라차노와 프랑스 브르타뉴의 자크 카르티에(1491~1557)의 항해가 대표적이다. 카르티에는 1534년부터 154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오늘날 캐나다에 이르는 지역을 탐험했다. 그러나 종교전쟁 등 프랑스 내부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신대륙 진출은 지지부진했다. 프랑스가 다시 신대륙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건 앙리 4세(재위 1589~1610)가 종교전쟁을 끝낸 직후였다.
이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 사뮈엘 드 샹플랭(1567~1635). 그는 노바스코샤에 캐나다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인 ‘포트로열’을 건설했고(1605년), 이곳을 기점으로 세인트로런스강 안쪽으로 진출해 퀘벡을 건설했다(1608년). 이어서 오늘날의 몬트리올에 모피 교역소를 설치하며(1611년) 프랑스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그는 소규모 인원으로 식민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의 문화·언어·생활 습관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프랑스인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북미 대륙에 정착하며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루이 14세, 프랑스 식민지 전성기
추기경 리슐리외(재상 재임 1624~42)가 권력을 잡으면서 프랑스의 북미 진출은 한 단계 도약했다. 탁월한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던 리슐리외는 신대륙에 거대한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국왕과 자신, 그리고 프랑스의 주요 인물들이 주주로 참여하는 ‘뉴프랑스’ 회사를 설립하며(1627년), 식민지 개척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국가 사업으로 격상시켰다.
프랑스 식민 제국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와 재상 콜베르(1661~83) 치세에 전성기를 맞았다. 탁월한 총독 프롱트낙(1622~98)은 캐나다의 수로를 장악하며 오대호 지방까지 세력을 넓혔고, 과감한 탐험가 라 살(1643~87)은 오대호에서 미시시피강을 따라 내려가는 대장정을 펼쳤다. 라 살은 탐험한 모든 지역을 루이 14세에게 바치며 ‘루이의 땅’을 뜻하는 ‘루이지애나(Louisiana)’로 명명했다.
ㅡㅡㅡㅡㅡ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

어원> 루이지애나는 1643년부터 1715년까지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르네-로베르 카블리에르 드 라살이 미시시피 강 유역을 프랑스 영토로 주장했을 때, 그는 이곳을 라 루이지애나라고 명명했다. 접미사 –ana(또는 –ane)는 라틴어 접미사로, “특정 개인, 주제 또는 장소와 관련된 정보”를 가리킬 수 있다. 따라서 대략적으로, Louis + ana는 “루이와 관련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때 프랑스 식민 제국의 일부였던 루이지애나 영토는 현재의 모빌 만에서 현재 캐나다-미국 국경 바로 북쪽까지 뻗어 있었으며, 현재 캐나다의 앨버타 주와 서스캐처원 주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ㅡㅡㅡㅡ
이들은 언젠가 캐나다와 루이지애나를 통합해 북미에 거대한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는 꿈을 공유했다. 이 꿈이 실현됐다면 프랑스 식민지는 좁은 동해안 해안가에 몰려 있던 영국 식민지를 포위하며 숨통을 조였을 것이다. 계획이 성공했다면, 오늘날 미국인들은 프랑스어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웅혼한 꿈은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더 이상 탁월한 리더를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미의 패권을 움켜쥔 영국
반면, 위대한 리더는 영국에서 나타났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과 미래의 세계 제국을 놓고 충돌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4),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 7년 전쟁(1756~63)이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루이 14세의 절대왕정기를 거치며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프랑스에 영국이 도전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섬나라의 특성상 제해권과 교역에 전념할 수 있었던 영국이 바다에서의 우위를 토대로 유럽에서 누구도 패권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세력균형을 추구하자 프랑스는 수세에 몰렸다. 루이15세를 필두로 한 프랑스 궁정의 총체적인 무능과 부패도 한몫했다.



이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 사뮈엘 드 샹플랭(1567~1635). 그는 노바스코샤에 캐나다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인 ‘포트로열’을 건설했고(1605년), 이곳을 기점으로 세인트로런스강 안쪽으로 진출해 퀘벡을 건설했다(1608년). 이어서 오늘날의 몬트리올에 모피 교역소를 설치하며(1611년) 프랑스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그는 소규모 인원으로 식민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의 문화·언어·생활 습관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프랑스인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북미 대륙에 정착하며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루이 14세, 프랑스 식민지 전성기

추기경 리슐리외(재상 재임 1624~42)가 권력을 잡으면서 프랑스의 북미 진출은 한 단계 도약했다. 탁월한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던 리슐리외는 신대륙에 거대한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국왕과 자신, 그리고 프랑스의 주요 인물들이 주주로 참여하는 ‘뉴프랑스’ 회사를 설립하며(1627년), 식민지 개척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국가 사업으로 격상시켰다.


프랑스 식민 제국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와 재상 콜베르(1661~83) 치세에 전성기를 맞았다. 탁월한 총독 프롱트낙(1622~98)은 캐나다의 수로를 장악하며 오대호 지방까지 세력을 넓혔고, 과감한 탐험가 라 살(1643~87)은 오대호에서 미시시피강을 따라 내려가는 대장정을 펼쳤다. 라 살은 탐험한 모든 지역을 루이 14세에게 바치며 ‘루이의 땅’을 뜻하는 ‘루이지애나(Louisiana)’로 명명했다.

이들은 언젠가 캐나다와 루이지애나를 통합해 북미에 거대한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는 꿈을 공유했다. 이 꿈이 실현됐다면 프랑스 식민지는 좁은 동해안 해안가에 몰려 있던 영국 식민지를 포위하며 숨통을 조였을 것이다. 계획이 성공했다면, 오늘날 미국인들은 프랑스어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웅혼한 꿈은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더 이상 탁월한 리더를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미의 패권을 움켜쥔 영국
반면, 위대한 리더는 영국에서 나타났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과 미래의 세계 제국을 놓고 충돌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4),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 7년 전쟁(1756~63)이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루이 14세의 절대왕정기를 거치며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프랑스에 영국이 도전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섬나라의 특성상 제해권과 교역에 전념할 수 있었던 영국이 바다에서의 우위를 토대로 유럽에서 누구도 패권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세력균형을 추구하자 프랑스는 수세에 몰렸다. 루이15세를 필두로 한 프랑스 궁정의 총체적인 무능과 부패도 한몫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충돌로 7년 전쟁이 시작될 무렵,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와 북미대륙에 진출해 있었기에, 두 나라의 다툼은 필연적으로 세계로 확장됐다. 북미에서의 전쟁은 인디언 부족 대부분이 프랑스와 손잡고 영국에 맞섰기에 프랑스에게 유리했다. 영국인에게는 패배와 절망이 가득했다.
전황을 뒤바꾼 인물이 윌리엄 피트(1708~1778)였다. ‘위대한 평민’ 대(大)피트로 불리는 그는 영국의 사활적 이익이 더 이상 유럽대륙이 아니라 제해권·교역·식민지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는 식민지 전쟁, 특히 북미 전선에 영국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쏟아부었다. 그의 목표는 선명했고, 결단은 신속했으며, 의지는 강철 같았다. 그의 리더십 아래 영국은 일치단결해 승리에 대한 열망을 드높였다. 1759년 영국은 뉴프랑스의 전략적 요충지 퀘벡을 점령하고, 카리브해와 프랑스 서해 비스케이만에서 승리했다. 결국 프랑스는 무릎을 꿇었다(1763년 파리조약). 용감하고 탁월했던 프랑스 리더들의 꿈도 산산이 부서졌다. 오직 영국만이 북미대륙에 남게 됐다.
====================
영국·프랑스 ‘천년의 숙적, 지금은 둘도 없는 동맹

지난 6일 파리에서 만나 반가워하고 있는 키어 스타머(왼쪽)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로이터 연합뉴스

영국과 프랑스는 역사의 라이벌이다. 지난 1000년간 4차례에 걸쳐 ‘백년전쟁’이라 불릴 만한 장기적인 전쟁을 벌였다. 1차는 1128년부터 1226년까지의 영국 플랜태지넛 왕조와 프랑스 카페 왕조와의 전쟁. 프랑스 내의 영국 왕의 영토를 두고 싸웠다. 흔히 ‘백년전쟁’이라 일컫는, 잔다르크가 출현하는 전쟁은 2차에 속한다(1337~1453년). 두 나라의 목표는 프랑스 왕좌였다.
역사적으로 제일 중요한 장기전은 3차 백년전쟁(1689~1815년)이다.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시작돼 나폴레옹 전쟁으로 막을 내린 이 전쟁의 트로피는 세계제국이었고, 승자는 영국이었다. 마지막 백년전쟁은 그 이후에 펼쳐진 두 나라간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3차전의 승자인 영국이 노른자위를 차지했고, 패자인 프랑스가 그 주변부에 진출했다.
천년의 숙적이던 영국·프랑스가 손을 잡은 건 독일이 부상하고 두 나라 기득권이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긴 역사를 놓고 보면 우정은 불과 100년 남짓이다. 이들의 역사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영원한 국가이익만 있을 뿐이다’라는 국제정치의 대명제를 다시금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