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그런가? 아직도 이름이 자주 헷갈린다. 하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이름이다. 그런데도 헷갈리는 이유는 둘 다 잘 모르기 때문이리라. 그래, 이 기회에 공부 좀하고 정리하자.
먼저, 사람이름 라이프니츠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독일어: 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년 7월 1일 ~ 1716년 11월 14일)는 독일의 수학자이자 과학자, 철학자이다. 라이프니츠는 책을 쓸 때 라틴어(~40%), 프랑스어(~30%), 독일어(~15%)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였다고한다.
라이프니츠는 르네 데카르트와 바뤼흐 스피노자와 함께 대표적인 근대 합리론(합리주의, rationalism) 철학자로 꼽힌다. 그의 중요한 업적은 최소 단위 입자인 모나드를 기초로 한 단자론(monadologie)을 제시한 것이다. 단자론의 주요 내용은 먼저 우주의 근본이 되는 실체인 단자(모나드)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를 설명하고, 이 단자들 중에 이성을 가진 단자인 정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와 인식의 원리를 규명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단자론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부분이 없는 극도로 단순한 실체인 모나드들의 결합체이다. 마치 원자와 비슷한 개념처럼 보이지만, 원자와는 다르게 개별 모나드들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무관한 완전히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고유한 상태, 즉 지각과 욕구를 가진다. 지각은 모나드의 일시적인 상태고, 욕구는 한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이행하는 내부적인 힘이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모나드는 물질적 실체가 아닌 정신적 실체다. 우리가 보는 물질적 세계는 모나드들이 보는 현상일 뿐이다.
각 모나드들의 자발적인 활동은 신의 전능한 힘에 의해 조화된다. 경험적으로 보이는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물질세계는 사실 관념이지만, 모나드들의 관념은 모두 조화되어 있기에 그렇게 생각해도 별 상관없다. 즉, 모나드들은 자발적이라 인과관계나 상호작용 같은 건 없지만, 신에 의해 서로서로 맞아 떨어지게 조정되어 있으므로 일상적인 생각에 부합하는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충족이유율(충분근거율)의 개념을 정립하기도 했으며, 이는 훗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끼친다.
다음은, 도시 이름 라이프치히
이 도시는 내가 가봤다. 그 매력에 빠졌다. 다시 가서 얼마간을 살면서 바흐, 괴테, 멘델스존, 슈만의 길을 걷고 게반트하우스에서 음악공연에 빠지고 싶다.
라이프치히(독일어: Leipzig, 소르브어: Lipsk, 문화어: 라이프찌히)는 독일 작센 주의 가장 큰 도시이다. 독일의 도시이자 작센 주 최대의 도시, 독일의 10대 도시 중 하나이며 동독에서는 동베를린에 이어 제2의 도시였다.
문화 도시 라이프치히
라이프치히(Leipzig)는 독일 문화를 상징하는 도시 중 하나다. 위대한 수학자 라이프니츠(Leibniz,1646~1716)와 독일 문예학의 선구자 고췌트(Gottsched,1700~1766)의 주요 활동무대였고,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여기서 오랜 세월 봉직하며 기라성 같은 교회음악을 만들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라이프치히에게 ‘작은 파리(A Little Paris)’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젊은 시절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수학했던 괴테는 훗날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생각과 마음이 맞는 지식인들과 한 도시에 모여 살며 교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며 당시 라이프치히에서의 삶을 회상했다.
괴테는『파우스트Faust』의 첫 부분을 집필했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은 이곳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수장으로서 새로운 공연 문화를 선도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협주곡은 184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이뤄졌는데 지휘를 맡았던 멘델스존은 결국 무대에 서지 못했다. 과로로 건강을 해쳤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독일 서사 문학의 거인 장 파울(Jean Paul, 1763~1825)은 여기서 대학을 나왔고,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후원자 괴르너(ChristianGottfried Körner,1756~1831), 음악평론가 로흘리츠(Johann Friedrich Rochlitz, 1769~1842), 독일 악극의 위대한 작곡가 바그너(Richard Wagner,1813~1883)도 이 도시의 아들들이다. 일명 '노란책 문고'로 유명한 출판업자 레클람(Anton Philipp Reclam, 1807~1896) 또한 이 도시 출신이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니고 있는 '브라이트코프 운트 해르텔'이나 '페터스' 같은 음악출판사도 이 도시에서 창업했다. 아라비아 커피 바움이나 침머만과 같은 유서 깊은 카페에서는 그렇게 나온 책들을 읽고토론하는 살롱 모임이 성행했다. 다시 말해 라이프치히는학문과 음악, 출판과 저변이 선순환을 이룬 곳이었다. 학문과예술에 대한 진지한 자세는 이 도시의 오랜 전통이었다. 라이프치히의 문화적 저력은 훗날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나 알베니스(Isaac Albeniz, 1860~1909) 같은 외국인 학생들을 끌어들일 만큼 매력적이었다.
1830년, 하이델베르크의 대학생이었던 슈만도 이끌리듯 이 도시에 들어섰다. 법학 공부를 하던 슈만의 머릿 속은, 그러나 온통 예술뿐이었다. 문학과 음악 사이에서 장래를 고민하던 그는 마침내 음악가의 길을 선택했다.
이 곳에서 슈만(21세)은 소녀 클라라(12세)를 만나 정이 들고 사랑하고 몰래 약혼하고, 스승이자 클라라의 부친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였다. 이때가 1840년 클라라가 스물 한 살 때이다.
■ 성토마스 교회, 바흐 잠들다.
성 토마스 교회는 독일 라이프치히 구시가지 중심가에 있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1212년에 창단돼 현재까지 활동 중인 토마스 소년합창단, 1539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설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1723~50년에 봉직했다는 사실이 이 교회의 주요 연혁이다.
독일 여러 곳을 떠돌던 바흐는 1723년 이 교회에서 칸토어라는 직책으로 삶의 마지막 단락을 시작했다. 칸토어는 아직도 독일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교회 안팎 더 나아가 그 지방의 주요 음악 행사를 관장하는 자리다. 바흐는 이 직책을 맡는 동안 그의 인생을 총결산할 수 있는 다수의 명곡을 작곡했다.
요한 수난곡, 마태 수난곡, 성탄 오라토리오 등의 종교음악을 비롯해 농부 칸타타, 커피 칸타타 등을 작곡했으며 그의 대다수 종교음악은 여기 성 토마스 교회에서 초연됐다.
1950년 바흐 서거 200주년을 맞아 그가 말년까지 음악의 혼을 불태운 성 토마스 교회,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천장이 높고 가장 신성한 장소인 제단 앞에 안치돼 비로소 바흐는 영원한 안식을 맞게 되었다.
■ 성니콜라이 교회,
독일 통일의 도화선
동독 붕괴 당시 여기서 첫 1989년 동유럽 혁명이 일어났다. 이 시위는 소위 '월요 시위' (독일어 : Montagsdemonstrationen)로 불린다. 1980년대 초부터 라이프치히 중심가에 위치한 루터교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에서 담임목사 크리스티안 퓌러(Christian Führer)의 주도로 열리고 있었던 기도회가 1989년 9월에 들어서서 반정부 성격을 띠기 시작하는데 여기에 동독 당국이 강경 진압을 하기 시작하자 10월 9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시위가 동독 정부의 예상과 달리 라이프치히를 넘어서서 드레스덴, 카를마르크스슈타트, 동베를린 등 주요 도시에까지 번지기 시작해 동독 당국의 통제 밖을 벗어나기 시작하자 동독 정부는 당황해 지도자였던 에리히 호네커를 축출했다. 얼마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동서독 통일의 첫 시발점이 되었으니 이 변혁의 시발점이 된 시위가 처음 일어난 라이프치히가 얼마나 독일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게반트하우스
게반트하우스 역사
<게반트하우스>는 독일어로 <직물회관>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직물회관 교향악단>이라는 말로 직역된다. 악단의 기원은 1743년까지 올라간다. 부유한 직물 상인들이 협회를 조직하고 <대연주회(Grosses Concert)>라는 이름의 음악회를 개인 주택에서 갖기 시작했는데, 이듬해엔 <세마리 백조>라는 이름의 선술집에서 연주회를 갖게 되었다. 이 연주회는 16명의 연주자 (8명은 프로, 8명은 음악전공 학생들)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이후 36년간이나 계속되면서 꽤 유명해졌다. 그러나 1780년에 와서 많은 회원들이 선술집 음악회에 문제가 많다는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술집에서 여는 음악회니만큼 당연히 여러 문제가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당시 시장과 시의회가 나서서 단층짜리 건물인 직물회관을 재단장해서 거기서 연주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진정한 즐거움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직물회
관의 재단장 작업이 진행되었고, 1781년에 공사가 끝나자 동시에 이곳에서 연주할 새로운 대규모의 오케스트라도 만들었다. 그리고 첫 콘서트가 열렸고, 이 연주회는 전문가들과 청중들 모두를 기쁘게 만들었다. 이로써 독일 최초로 순수하게 시민의 힘으로 만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와 그 오케스트라는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고, 오늘날엔 세계 정상급의 오케스트라로 군림하게 되었다.
초대 음악감독으로 독일 징슈필의 창시자로 알려진 작곡가 힐러(Johann Adam Hiller)가 선출되었고, 이후 시히트(Johann Gottfried Schicht),슐츠(Johann Philipp Christoph Schulz), 폴렌츠(Christian August Pohlenz)가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그리고 악단이 만들어지고 54년이 지난 1835년, 독일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전통적으로 음악감독을 지칭하는 직함으로 사용해오던 카펠 마이스터(kapellmeister)라는 이름으로 멘델스존을 임명했고, 연주자와 지휘자를 겸하던 전임
자들과 달리 지휘만을 전담하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멘델스존은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이나 바흐의 <마태오 수난곡> 등을 사후 초연 또는 부활 공연하여 음악사에 크게 기여했고, 자신의 자작곡들도 연주했다. 멘델스존은 1847년까지 지휘자로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율리우스 리츠(1848-1854), 칼 라이네케(1860-1895)가 뒤를 이었다.
1884년에는 신축된 게반트하우스로 상주 공연장을 옮겼다. 라이네케는 악단 최장 기록인 35년 동안 재임하면서 자작곡 외에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최초로 전곡 공연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26세의 젊은 나이에 라이프치히 시립교향악단인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Gewandhausorchester)’의 지휘자로 부임했다. 이 기간 멘델스존은 잊혀져 가던 바흐의 곡들을 재발굴해 연주함으로써 바흐를 재조명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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