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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산책 그림이야기

인왕산 치마바위 이야기

by 문촌수기 2017. 3. 15.

경복궁에서 인왕산 사이에 형성된 마을을 서촌(西村)이라고 한다. 세종이 태어난 곳이라서 세종마을이라고도 한다. 서촌 골목길을 걸어 인왕산 수성동계곡을 찾아 들어가면 인왕산의 우람한 바위 절벽을 올려다 보게 된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에 주름이 생긴 암벽이 보인다. 이 절벽을 치마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에는 바위의 주름 만큼이나 슬픈 사연이 흘러 내려오고 있다.     

 ♣ 중종과 폐비 신씨의 애절한 사랑과 이별이야기, 빨간 치마바위 이야기

인왕산 치마바위


조선왕조 10대왕 연산군은 재위시절에 자신의 정책에 조금이라도 반대하거나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는 대신들은 가차없이 죽이는 등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저질렀다. 갑자사화 때에만 해도, 12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다. 이런 시절에, 진성대군(후에 중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몸을 최대한 낮추라고 조언하고 보필했던 부인 신씨(후에 단경왕후)의 충고와 조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부인 신씨의 충고와 기지로 진성대군은 몸을 낮추고 최대한 조신하게 행동함으로써, 숙청을 당하지 않고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진성대군과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인 신씨는 각각 12살과 13살의 어린 나이에 혼례를 치렀다. 지금의 중학생 나이인 어린 나이에 두사람은 혼인식을 치렀으니까, 진성대군에게 부인 신씨는 첫사랑이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부부가 된 두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진한 우정을 키워나갔고, 성인이 된 후에 두사람의 애정은 매우 두터웠고 금슬이 좋았다.
진성대군과 신씨의 나이가 각각 19살과 20살 되었을 때에, 연산군의 폭정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성공함으로써 연산군은 쫓겨났다. 그리고 반정군사들이 진성대군의 집앞으로 몰려들었다. 군사들이 집을 에워싸고 포위하자, 진성대군은 군사들이 자신을 해하려고 온 줄로 오해하고,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당차고 똑똑했던 부인 신씨는 겁먹은 진성대군의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출동한 군사들의 말머리가 우리를 향해있으면, 우리를 해하려고 온 군사가 맞지만, 군사들의 꼬리가 우리를 향해 있다면, 그것을 오히려 공자를 호위하려 온 것이기 때문에, 자살여부는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부인 신씨는 재치와 설득으로 진성대군을 달래고 대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군사들을 살펴보니까, 군사들이 몰고 온 말머리가 대궐쪽으로 향해 있었던 것이다. 집 앞에 모여들었던 군사들은 진성대군을 호위해서 대궐로 모시기 위해서 출동했던 것이다. 이때가 바로 1506년 9월 18일날. 박원종과 성희안 등을 중심으로 한 연산군 반대세력들이 군사를 동원해서 반정쿠테타를 일으켰고,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을 새로운 임금으로 옹립했다. 역사는 이날을 '중종반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의 기록을 읽어본다.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원종(朴元宗)·부사용(副司勇) 성희안(成希顔) 【일찍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있다가 갑자기 강등되었다.】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 등이 주동이 되어 건의(建議)하고서, 군자 부정(軍資副正) 신윤무(辛允武)·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수원 부사(水原府使) 장정(張珽)·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와 거사하기를 밀약(密約)하였다.

거사하기 하루 전날 저녁에 희안(希顔) 김감(金勘)·김수동(金壽童)의 집에 가서 모의한 것을 갖추 고하고, 이어 박원종·유순정과 더불어 훈련원(訓鍊院)에서 회합하였다. 무사와 건장한 장수들이 호응하여 운집하였고, 유자광(柳子光)·구수영(具壽永)·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덕진군(德津君) 이활(李𤂾)도 또한 와서 회합하였다. 여러 장수들에게 부대를 나누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뜻밖의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가, 밤 3경에 원종 등이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으로 향하여 가다가 하마비동(下馬碑洞) 어귀에 진을 쳤다. 이에 문무 백관(文武百官)과 군민(軍民) 등이 소문을 듣고 분주히 나와 거리와 길을 메웠다. 영의정 유순(柳洵)·우의정 김수동(金壽童)·찬성 신준(申浚) 정미수(鄭眉壽), 예조 판서 송일(宋軼)·병조 판서 이손(李蓀)·호조 판서 이계남(李季男)·판중추(判中樞) 박건(朴楗)·도승지 강혼(姜渾)·좌승지 한순(韓恂)도 왔다.

먼저 구수영·운산군·덕진군 진성 대군(晉城大君) 집에 보내어, 거사한 사유를 갖추 아뢴 다음 군사를 거느리고 호위하게 하였다. 또 윤형로(尹衡老) 경복궁(景福宮)에 보내어 대비(大妃)께 아뢰게 한 다음, 드디어 용사(勇士)를 신수근(愼守勤)·신수영(愼守英)·임사홍(任士洪) 등의 집에 나누어 보내어, 위에서 부른다 핑계하고 끌어내어 쳐죽였다.

-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일 무인 1번째기사 1506년

반정세력의 옹립으로 조선의 제11대 임금으로 등극한 진성대군(중종)은 궁궐로 입궁해서, 근정전의 용상위에 올랐다. 그리고 부인 신씨는 그 다음날에 궁궐에 입궁했다. 진성대군이 조선의 11대 왕으로 등극하였으니, 자연히 부인 신씨도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반정 공신세력 박원종과 성희안 등이 중종의 부인 신씨가 왕비가 되는 것을 매우 탐탐치않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중종의 부인 신씨가 연산대군의 처남이자 최측근인 신수근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종왕비 신씨가 바로 역적의 딸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미 연산군의 폐위를 극렬하게 반대했던 신수근을 죽였던 박원종은 자신들이 죽인 역적의 딸 신씨가 왕비에 오르면, 나중에 큰 피의 보복이 일어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박원종 등 반정 공신들은 중종의 부인 신씨가 왕비가 될 수 없다고 그녀의 폐위를 결렬하게 주장했다. 어린 임금 중종은 신씨의 폐위를 반대했지만, 결국 실권이 없었기에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못하고 반정공신들의 주장에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왕비를 쫓아낸 박원종은 중종비를 새로 들였다. 종종의 계비이자 인종의 모후인 장경왕후 윤씨의 외삼촌이 박원종이다. 또한 계비  장경왕후 신씨와 중종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아버지 윤번의 현손들로 서로 8촌지간이다.

진성대군(중종)이 조선의 왕이 되었지만, 그 부인 단경왕후 신씨는 왕비가 된 지 7일만에 폐위되어 궁궐 밖으로 쫒겨나 사가로 유폐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1권을 읽어본다. 

박원종·성희안 등이 임사홍의 연좌 여부에 대해 아뢰다

"신씨 집안은 폐주의 여러 아들과는 인척간이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우익(羽翼)이 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아울러 부처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임사홍 같은 자는 본디 간신으로 일찍이 대간(臺諫)의 논박을 입어 조정에 용납되지 못한 지 오래였는데, 갑자(甲子) 이후로 부자가 모두 뜻을 얻어 폐주의 뜻에 영합하고 아첨하였으니, 진실로 중하게 논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는 일신에만 국한시키고 연좌(緣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처리하겠습니까? 감히 품달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정승에게 물으라."  하자, 정승 등이 회계(回啓)하기를, "아뢴 바가 매우 마땅합니다." 하였다.
-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3일 기묘 5번째기사 1506년

 신수근의 딸이 하성위의 집에 우거하다. -  중종 1년 9월 9일 을유 8번째기사 1506년,

어렸을 때부터 곁에 있어준 가장 친한 친구였고, 광기의 형이자 폭정의 임금 곁에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지켜준 사랑이었지만 생이별을 맞이한 것이다. 남편은 한나라의 지존한 임금이 되었고,  조강지처였던 왕비는 궁에서 쫓겨나는 극한(極限)의  불행을 맞이한 것이다. <연려실기술>과 야사의 기록에도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젊었을 때부터 두사람은 애정이 두터웠지만, 부인의 아버지를 우리가 죽였으니, 그 딸(신씨)을 왕비로 둔다면, 나중에 우리에게 무슨 우환이 생길지 모른다’고 말한 기록에서 보듯이, 중종반정에 성공한 반정공신들이 신씨 부인으로 인한 후환을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야사에는 부인 신씨가 자신으로 인해 중종이 반정공신들로부터 화를 입을까봐, 반정공신세력들의 폐비조치에 순순히 응해서 궁궐에 나갔다고 한다. 어차피 역적의 딸이 되어버린 신씨는, 진성대군(중종)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고, 왕비의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나서, 사가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반정세력들의 도움으로 왕이 된 중종은, 반정공신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부인 신씨가 폐위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 한사람 지켜주지 못한 진성대군(중종)의 가슴을 얼마나 사무치게 괴로웠겠는가? 또한 끔찍이 사랑했던 지아비(중종)과 생이별하고, 평생을 유폐되어 살아야했던 폐비 신씨의 마음은 얼마나 처참하게 찢어졌겠는가? 
폐비 신씨가 쫒겨나가 살았던 사가(私家)는 지금의 서촌, 인왕산의 자락 수성동 계곡 근처에 있었다고 하며, 이미 신씨의 부모형제들은 역적집안으로 죽임을 당하는 등 풍비박산나서, 신씨는 홀로 외롭게 사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신씨가 폐위되고 난 후, 중종은 부인 신씨를 오랫동안 잊지못하고 무척 그리워했었다고한다. 야사에 의하면, 중종은 종종 혼이 나간 사람처럼,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고 하며, 수시로 궁궐마당으로 나가 인왕산쪽을 바라보았다고도 한다. 

1515년(중종10년). 중종이 새롭게 혼인한 장경왕후 윤씨가 혼인 10년 만에 아들(인종)을 출산했는데, '단경왕후의 7일의 운명'인가?  그 출산의 후유증을 앓다가 그만 7일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렇게 중종비의 자리가 다시 공석이 되었다. 왕비의 자리가 비게 되자, 담양부사인 박상(朴祥, 호는 눌재) 등 일부대신들은 폐위된 신씨를 왕비의 자리에 다시 복위시켜줄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서슬이 퍼렇던 반정공신세력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서, 중종은 폐비 신씨를 끝내 복위시키지는 못했다. 중종은 여전히 반정공신들에게 휘둘리는 연약한 임금이었을 뿐이며, 다른 여인과 혼인할 수밖에 없었다. 

인왕산은 부인 신씨가 유폐되어있는 사가가 있는 곳이다. 중종은 새로운 왕비와 혼인생활을 하는 중에도, 종종 자신의 조강지처였던 신씨를 잊지못하고, 그녀가 살고있는 인왕산쪽을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폐비 신씨도 또한 지아비인 중종을 하염없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폐비 신씨는 중종의 생일날이 되면, 생일상을 차려놓고 그 앞에 앉아서 중종의 안위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폐비 신씨는 중종이 자신이 있는 인왕산쪽을 자주 바라본다는 소식을 들고 난 후에는, 자신이 즐겨입었던 붉은치마를 인왕산의 큰바위에 걸쳐두었다고 한다. 폐비 신씨는 중종이 인왕산쪽을 자주 바라본다는 말을 듣고, 인왕산의 큰바위에 자신의 치마를 걸어서,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바위가 바로 인왕산의 ‘치마바위’이다. ‘치마바위’는 실제로 사직동 수성동계곡에서 올려다보는 인왕산의 암벽(巖壁)이다.

그리고 1544년, 중중은 57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눕게 되고, 곧 임종이 맞이 할 때가 되었다. 임종 직전에, 한 여승이 궁궐의 중종 처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여승의 차림으로 중종 앞에 나타난 여인은 바로 폐비 신씨였다고 한다.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했던 중종의 요청으로 폐비 신씨는 여승으로 분장하고서 중종 앞에 나타난 것이다. 폐비 신씨가 궁궐을 나간 지, 무려 39년만에 중종과 신씨는 다시 재회하였다. 자신이 왕이 되고도 권력이 약해서, 부인을 지켜주지 못했던 중종은 자신의 임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조강지처인 신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 11월 15일 경술 11번째기사(1544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폐비 신씨를 궁에 들였다는 소문이 나다"

사알 이수천이 정원에 말하였다.

"입내(入內)하는 궁인(宮人)이 있어 통화문(通化門)을 시간이 지나도록 열어 놓았기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는데, 들으니 상이 임종시에 폐비(廢妃) 신씨(愼氏)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입내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문을 열어놓고 신씨를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는 대개 헛소문이다. 자세히 물어보니 상의 옥체가 미령하기 때문에 요사스러운 여승들을 불러다 기도를 드리려고 한 것이었다고 했다.

○司謁 李壽千言于政院曰:
"有入內宮人, 其留通化門。" 問所入者何人, 則答以不知。 聞之則上臨終, 欲見廢妃愼氏, 故入內云。
【史臣曰: "留門引入愼氏之說, 蓋出於虛傳。 審問之, 則以上未寧, 召妖尼輩, 將禳禱云。"】

- 【태백산사고본】 53책 105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1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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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신씨는 1557년 71세의 나이로, 폐위된 지 51년 만에 자신의 사가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남편 중종이 죽은 지 13년 만에 사망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폐비 신씨는 죽은 지 233년이 지난 영조 때에 단경왕후로 복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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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애틋한 사연을 품고 있는 치마바위가 일제시대에 크게 훼손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동원체제를 강화하던 일제는 1939년 서울에서 이른바 ‘대일본청년단회의’를 열고 이를 기념한다며 치마바위에 글씨를 새겼다. 사진의 오른쪽 ‘동아청년단결’로부터 시작하는 100여 글자다. 해방 후 글자를 쪼아냈는데 흔적이 너저분하게 남아 있다. 

석공 스즈키 긴지로가 인왕산 병풍바위에 새긴 ‘동아청년단결’(바위 맨 오른쪽 글씨).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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