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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와 놀기

1413 時然後言 義然後取, 타이밍이다.

by 문촌수기 2021. 7. 17.

아테네 학당으로 들어오는 스승과 제자가 가리키는 손 모양이 크게 다르다. 스승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를 이야기하는 듯 하늘을 가리키고,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엎어 땅을 가리키며, 현세를 살아가는 중용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대와 과소의 극단이 없는 최적의 상태를 중용(memos, Golden Mean)이라고 하였다. 즉 지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상태이다. 비겁과 만용의 중용은 용기이고, 무감각과 방탕의 중용은 절제이며, 인색과 낭비의 중용은 절약이며, 비굴과 교만의 중용은 겸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술적인 평균 값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편도 아니고 저 편도 아닌 것을 중용이라 여기면 줏대가 없다. 오고 가는 선이 다른데 그저 중간에 서 있다면 이쪽 저쪽에서 치여 크게 다친다. 매사 적당히 平以上만 유지하고 있다면 발전이 기대할 수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용일까?
君子中庸也, 君子而時中
(군자중용야, 군자이시중)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이다."
라는 말을 새긴다. <중용>에 나오는 말이다. 때에 적합한 행동이 중용이다. 용기가 중용이라지만, 때를 먼저 아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 갈 때를 알아 나아가는 것만 용기가 아니다. 저자거리에서 깡패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간 한신(韓信)과 같이, 물러날 때를 알아 물러나는 것도 참된 용기이며 중용이다. 비록 그 순간에는 조롱거리가 되었겠지만, 이 순간의 수모를 참지 못했다면 한신은 결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때에 적합한 행동만이 아니다. 장소에 적합한 행동도 時中이요, 상대하는 사람에 적합한 처신도 時中이다. 시장터에서 하는 짓을 전장터에서 할 수 없고, 자식 대하듯 부모를 대할 수 없다. 때를 알아 時言, 後笑, 義取하는 것이 중요하다.

14‧13 子問公叔文子於公明賈曰:
“信乎, 夫子不言, 不笑, 不取乎?”
公明賈對曰:
“以告者過也. 夫子時然後言, 人不厭其言;
樂然後笑, 人不厭其笑;
義然後取, 人不厭其取.”

子曰: “其然? 豈其然乎?”
(자문공숙문자어공명가왈:
“신호, 부자불언, 불소, 불취호?”
공명가대왈: “이고자과야. 부자시연후언, 인불염기언; 락연후소, 인불염기소;
의연후취, 인불염기취.”

자왈: “기연? 개기연호?”)

공자(孔子)께서 공명가에게 공숙문자의 인품을 물었다.
"참으로 공숙문자는 말씀하지 않고 웃지 않고 취하지도 않으시는가?"
공명가(公明賈)가 대답하였다.
"말한 사람이 지나쳤군요. 夫子께서는 때에 맞은 뒤에야 말씀하시므로 사람들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않으며, 즐거운 뒤에야 웃으시므로 사람들이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의에 맞은 뒤에야 취하시므로 사람들이 그 취함을 싫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할까? 어찌 그렇겠는가?"

*공숙문자:위나라 대부 공손지(公孫枝)
*공명가: 성이 공명, 이름이 가, 위나라 사람


Kung-ming Chia replied, ‘This has arisen from the re- porters going beyond the truth.
– My master speaks when it is the time to speak, and so men do not get tired of his speaking. He laughs when there is occasion to be joyful, and so men do not get tired of his laughing. He takes when it is consistent with righteousness to do so, and so men do not get tired of his taking.’ The Master said, ‘So! But is it so with him?’

시연후언, 낙연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