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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들

내일은 없다.

by 문촌수기 2013. 1. 2.

내일은 없다.

 

 

 

일산사람들의 행복이 여러 가지겠지만 저에게는 일산 사는 기쁨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동생이 가까이 산다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먼 객지에 살아도 이렇게 가까이 동생과 한 동네 산다는 것은 여간 행복이 아닙니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고향과 어릴 적의 추억들, 모든 것을 동생과 함께 있으면 많은 위로가 됩니다.
둘째는 넓은 호수공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일산 사람들 모두의 자랑거리입니다.
이제 직장도 바로 집 앞의 학교로 옮겼으니 일산 사는 세 번째 기쁨입니다. 이젠 한 겨울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데도 난 걱정 없습니다. 걱정은커녕 어린이와 강아지들처럼 그저 가슴이 설레며 즐겁기만 합니다. 아이랑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눈 오는 날이 이렇게 기쁘기는 우리 학교가 바로 내 집 앞이란 점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서울에 근무하는 동생, 동료들의 출퇴근길도 걱정이 되지요.


여름이 갔나봅니다. 저녁이 되면 선선한 호수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동생네 식구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한 후 호수공원으로 산책을 갔습니다.
나와 아내. 내 딸 소헌이. 초등학교 3학년이죠.
내 동생과 제수씨, 조카 4학년 치훈이 1학년 영훈이 그리고 이제 두 돌 안된 귀여운 질녀 경서. 동생네는 식구가 많아 다복해 보입니다.

호수공원 동쪽 끄트머리에는 작은 인공 폭포가 있고 서쪽 끄트머리에는 야생, 수생식물원이 있습니다.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또한 자연적인 운치와 아기자기한 꾸밈이 예쁜 야생 식물원을 즐겨 걷습니다.
호수 위로 나무다리를 만들어 산책의 멋을 더하였습니다.

그 나무다리를 따라 걷다가 오리 한 마리가 물 위에서 바람 따라 가만히 흘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짜냐 가짜냐 호기심을 가지면서 다들 그 오리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몸통은 꼼짝도 않은 채, 눈도 깜빡 않은 채 가만히 떠 있어 바람 따라 흐르는지 사람 따라 흐르는지 모르게 우리 쪽으로 오다가 멈추곤 하였습니다. '진짜다' '가짜다' 이러쿵저러쿵 재미있어하며 한 마리의 오리에게 눈길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하도 가짜가 진짜 같은 세상이라 여간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장난기로 (저요? 장난 잘 쳐요.) 휴대폰을 꺼내 안테나를 오리 쪽으로 뽑아내고선 오리를 움직이는 리모콘인냥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우리 일행이 아닌 사람들 중에는 내가 인공 오리를 호수에 띄어놓고 리모콘으로 조정하는 줄 아나봐요.

"'저것 봐, 가짜 맞지."
"히히--(고만 하자. 명색이 윤리 선생님이란 자가 이렇게 사람을 놀려서야....쯧쯧)"

재미있었지만 장난을 오래 끌 수도 없었습니다.
아, 요놈의 오리가 갑자기 고개를 까딱거리는 게 아닌가요?
일제히 소리칩니다.

"저것 봐, 진짜잖아."

그리곤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절 쳐다보았습니다.
어찌나 민망했는지...그러나 다들 한 바탕 웃으며 우리의 주인공인 오리에게 금방 눈길을 되돌렸습니다. 고놈의 짧은 다리가 물밑에서만 움직이니 몸은 떠서 흐르고 있었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아 바람 따라 흐르는 목각 오리인줄만 알았지 뭡니까?

흥겨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나옵니다.
그런데 뒤따르던 일곱 살 조카 녀석이 묻고 아홉 살짜리 딸아이가 대답합니다.

"내일은 있을까?"
"내일은 없을껄."

'으잉!. 이 무슨 소린고? 이 무슨 선문답인고?'
흥분되고 자랑도 삼아 앞서가던 동생내외를 불러 이 어린놈들의 선문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내일은 있는가 없는가'에 얘기한다. 우리 아이들이 철학을 한다. 선문답을 한다."고 말입니다.

"정말 너희들이 그런 얘기를 나누었니? 설마......."
의심 반, 경이 반으로 제수씨가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아이들 대답은 정말로 나를 기가 막히게 하였습니다.

"오리 말야. 아까 그 오리가 '내일도 있을까'라고 누나한테 물었어."
"그래 맞아. 내일 되면 날아가고 없을 꺼야."

'(뜨악!)' 하도 어이없어 뒤로 자빠질 뻔했습니다.

'이런 숙맥. 이런 순진한 사람. 그저 모든 걸 자기 취향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자기 혼자서 좋아하고 자기 혼자서 슬퍼하고.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는데, 세상은 눈도 깜빡하지 않는데..... 쯧쯧쯧.' 동생의 눈빛을 보면 압니다. 항시 그렇게 형님을 동정해온 그 눈빛과 웃음이라 이제 나도 척 보면 압니다.
그렇게 또 한바탕 웃고 말았지요. 참 고마운 오리입니다 .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힌 선문답 아닙니까?

'내일은 정말 있을까? 없을까?
'내일(來日)'이란, 말 그대도 '올 날'이건만 정말 오는 걸까 오지 않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일이란 놈은 결코 오지 않는 놈이란 걸 알게 됩니다.
내일이란 놈은 가만히 있어도 내게로 '다가올 날'이 아니라, 내가 아무리 다가가도 또 내 앞에서 도망가고만 있습니다. 결코 잡을 수 없는 날이 내일(來日)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내일이란 오늘의 날짜에 하루를 더한 구체적인 달력 속의 날을 가리키기에 내일을 약속합니다만, 진정 내일이란 놈의 실체는 결코 '오지 않는 날'입니다.
그렇듯, 없는 내일을 기다리거나 꿈꾸지 말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참된 오늘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지금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것이며 내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일은 없습니다.

09월 10일 (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