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유산청에서

18세기 말에 제작된 한양 지도이다. 도봉산과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면서 백악산(白岳山)·인왕산(仁王山)·목멱산(木覓山, 남산)·타락산(駝駱山, 낙산)의 내사산(內四山)을 중심으로 한양의 빼어난 자연 환경을 산수화처럼 그렸다. 정확한 제작 시기는 미상이지만, 1785년에 설치되었다가 1802년에 폐지된 장용영(壯勇營)이 종묘의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것을 통해 이 지도가 18세기 말에 제작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지도는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政事)를 살피는 국왕의 시각에 맞추어 남쪽이 지도 상단으로, 북쪽이 지도 하단으로 배치되어 있다. 도성 안 시가지의 인문(人文) 현상은 평면적으로 처리했고, 풍부한 지명을 기록하여 주위의 산세와 대비되도록 하였다. 여백에는 행정 구역, 도성의 크기와 도로 상황 등을 기록했는데, 당시 법궁(法宮)이었던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을 기점으로 삼았다.
화면구성, 필법, 준법, 수지법, 채색 등 일반적인 산수화에서 사용되는 모든 기법을 충실하게 구사하면서 회화적인 표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작품이다. 18세기 유행한 정선(鄭敾, 1676-1759)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르고 있으며 회화성이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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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 AI
조선시대 서울(한양)을 그린 고지도인 보물 제1560호 도성도(都城圖)는 궁궐의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단을 배치하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따릅니다.지도 여백(왼쪽 하단 등)에 적힌 대표적인 한자와 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한자: 敦化門 (돈화문), 宗樓 (종루) 등
해석: 지도의 거리 및 위치 설명입니다.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과 종로 등 성안의 주요 지점들 사이의 거리를 당시의 단위인 보수(步數·걸음 수)로 기록하여 관리가 가능하도록 표기했습니다. 도성도의 정확한 제작 배경과 문화재 정보는 국가유산포털 도성도 안내에서 자세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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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웅의 고지도이야기 | 도성도] 회화성 뛰어난 조선시대 서울 지도
월간조선, 산, 기자명 최선웅 2017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하자마자 풍수도참설에 따라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해 한양(漢陽) 천도를 추진해 2년 뒤인 1394년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겼다. 궁궐을 짓는 한편 수도 방어를 위한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1396년(태조 5)부터 한양의 내사산(內四山)인 백악산(白岳山, 지금의 북악산), 타락산(駝酪山, 지금의 낙산), 목멱산(木覓山, 지금의 남산), 인왕산(仁王山)을 잇는 산마루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축성 초기에 산지는 돌로, 평지는 흙으로 쌓았지만 세종과 숙종 대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도성(都城)’이란 한성부(漢城府)를 둘러싼 성곽을 가리키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도성의 범위는 성곽에 둘러싸인 성 안뿐 아니라 성 밖의 주변 지역인 성저십리(城底十里)까지를 포함했다.
조선시대 서울을 그린 도성도(都城圖)는 조선 초기부터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도성도는 지도에 따라 명칭도 달라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한양도(漢陽圖), 한성전도(漢城全圖), 성시전도(城市全圖),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수선전도(首善全圖) 등 20여 종에 이른다. 도성도는 대부분 필사본으로 제작되었으나,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의 도성도나 수선전도는 목판으로 제작되었다.
도성도의 표현 방식은 대부분 회화식으로, 도심 한복판에서 도성 주위의 산이나 성곽을 동서남북 사방으로 돌아가며 바라보는 사방시점(四方視點)으로 그렸고, 지명도 그런 방식으로 표기했다. 도성 주위의 산은 진경산수화처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성안의 하천과 도로는 실측(實測)을 한 듯 정확하고 자세하게 그렸다.
낱장으로 된 대형 도성도 가운데 회화성이 가장 뛰어난 지도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도성도(古軸 4709-3)이다. 종이에 채색필사로 그려진 지도의 크기는 가로 92cm, 세로 67cm이며, 족자로 꾸며졌다. 작자는 알 수 없으나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제작연대는 1788년(정조 12) 10월 북부에 신설된 상평방(常平坊), 연은방(延恩坊), 연희방(延禧坊)이 지도에 없고, 지도상 종묘 좌측에 1788년에 개칭된 국왕 호위군대인 장용영(壯勇營)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지도는 1788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는 위가 남쪽으로 놓여 목멱산이 위에 놓이고, 지도 아래쪽에는 도봉산과 삼각산, 보현봉, 비봉 등이, 그 안쪽으로는 백악산, 인왕산 등이 회화적 준법에 따라 실감나게 묘사되었다. 특히 도봉산과 삼각산의 바위봉은 실경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사실감이 뛰어나다. 내사산을 따라 이어진 성곽은 성벽과 여장(女牆)을 구별할 수 있도록 묘사되었고, 성문은 실제 모습과 같이 그렸다.
성안에는 하천과 도로가 서로 얽혀 현대의 지형도를 보는 듯하다. 하천은 모두 쌍선으로 그려 청회색으로 채색했고, 대부분 남쪽과 북쪽 산지로부터 발원해 도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에 합류한 뒤 동쪽 중랑천으로 흘러들고, 지도 오른쪽 성 밖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남쪽 한강 쪽으로 흘러간다. 도로는 붉은색으로 굵기가 서로 다르게 대로·중로·소로를 구분해 표시했고, 하천과 교차할 때는 사각형 기호로 교량을 표시했다.
도성의 궁궐인 창경궁과 경모궁, 종묘, 경복궁, 경희궁, 사직단 등은 녹지에 소나무를 그려 나타내고 곳곳에 전각을 그려 넣었다. 그러나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파괴된 채 복구되지 않아서인지 경회루 못과 전각 하나만 있고, 정문인 광화문도 ‘구광화문(旧光化門)’이라 쓰여 있어 폐궁임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의 성문은 모두 8개로 성의 동서남북에 각각 대문이 있고, 대문과 대문 사이에 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이고, 4소문은 동소문인 혜화문(惠化門), 서소문인 소의문(昭義門), 수구문인 광희문(光熙門), 자하문인 창의문(彰義門)이다. 이 가운데 현재 돈의문과 소의문은 성문이 남아 있지 않다.
지도 왼쪽 상단의 설명문은 지도의 범례를 적은 것이다.
첫 번째 ‘오부분계즉오방본색별(五部分界則五方本色別)’은 한성 5부의 경계를 오방색으로 구분했다는 뜻인데, 지도에서는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
두 번째 ‘각부가방권이분지(各部加方圈以分之)’는 5부의 명칭을 네모 선 안에 표시했다는 뜻이고,
세 번째 ‘방명역가방권이위표(坊名亦加方圈以爲標)’는 방명 역시 네모 선 안에 표시했다는 뜻이다.
네 번째 ‘각계상서소속방명일자가원권이식지(各契上書所屬坊名一字加圓圈以識之)’는 각 계가 소속된 방명의 첫 글자를 원 내에 표시한 것은 방(坊)의 범위를 나타낸 것이다.
여섯 번째 ‘삼군문분계즉이황점별지(三軍門分界則以黃點別之)’는 도성 방위를 담당한 삼군문, 즉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경계를 황색 점선으로 구분했다는 뜻으로, 종로 가운데 찍힌 노란점이 삼군문의 경계이다.
왼쪽 하단의 설명문은 돈화문(敦化門), 종로 등지에서 성안 주요 지점 간의 거리를 보수(步數)로 나타낸 것이고, 오른쪽 하단의 설명문은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열거한 것이다. 당시 한성부의 행정구역은 5부(部) 43방(坊) 329계(契)로, 동부(東部)는 6방 38계, 서부(西部)는 9방 91계, 남부(南部)는 11방 71계, 북부(北部)는 9방 38계, 중부(中部)는 8방 91계이다.
지명은 대체로 성안과 성 밖의 표기 방향이 다르다. 성안은 종로를 중심으로 위쪽은 바르게 쓰고, 아래쪽은 북쪽을 향해 써 거꾸로 보이고, 성 밖은 사방시점으로 안쪽에서 볼 수 있도록 썼다. 지명은 부(部)·방(坊)·계(契)·동(洞) 등 행정명과 어영청(御營廳)·중추부(中樞府)·선혜청(宣惠廳)·조지서(造紙署)·관상감(觀象監) 등 관아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밖에 산·고개·못·성문·교량·사찰·정자·학교·창고 명 등이 표기되어 있다.
조선 후기 여러 가지 형태로 제작된 한양 도성도는 지도로서의 효용성과 더불어 도성 주위의 산세가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려져 회화성이 돋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많은 도성도 가운데 1788년 제작된 규장각 소장 도성도는 화면구성이나 필법, 채색 등에 있어 발군의 기량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손꼽혀 2008년 4월 22일 보물 제156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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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하자마자 풍수도참설에 따라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해 한양(漢陽) 천도를 추진해 2년 뒤인 1394년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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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수정 2026.05.19 20:43
장지연의 역사 상상력
고려인 시각서 ‘한양 풍수’ 비판…
첫 조선인들 ‘남산 뷰’로 맞섰다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한양의 ‘주산’ 논쟁
18세기 말 조선 때 한양의 모습을 그린 도성도. 국가유산청 제공
18세기 말 조선 때 한양의 모습을 그린 도성도. 국가유산청 제공
세종 때 최양선 “경복궁의 백악은 주산 아니다”…창덕궁 서편을 궁궐 옮길 ‘혈 자리’로 짚어
태조·태종 대 관원들은 “앞뒤로 석산이 험하고 물길 말랐다” 한양에 대해 부정적 평가 일색
개경 기준으로 보는 고려인 관점…조선서 성장한 이들은 남산에 올라 ‘새 프레임’으로 접근
남산에 있는 서울타워에 올라서 도심 방향을 내려다본다. 빽빽한 고층 빌딩 숲 사이로 멀리 북한산에서부터 뻗어 내리는 푸르른 산세가 창덕궁·창경궁, 종묘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 보인다. 우뚝 솟은 백악과 그 아래 푸른 지붕의 청와대와 경복궁 역시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종묘까지 이어지는 그 수풀의 풍성한 양감에는 미치지 못한다. 1433년(세종 15), 바로 그 관점에서 한양의 주산에 대해 딴지를 건 이가 있었다. 최양선, 풍수를 공부해 관련 관청에서 일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경복궁의 북산은 주산이 아닙니다. 목멱산에 올라 바라보면, 향교동으로 이어지는 줄기인 지금의 승문원 자리가 실로 주산입니다. 도읍을 정하던 때에 어찌하여 궁궐을 여기에 짓지 않고 백악 아래에 지었을까요? 지리서에서는 ‘인가가 주산의 혈에 있으면 자손이 쇠미해진다’고 했으니, 창덕궁을 승문원 자리에 옮기면 만세에 이익이 되겠습니다.”(<세종실록> 세종 15년 7월3일)
승문원 자리는 창덕궁 서편이다. 최양선은 경복궁 북쪽의 백악이 아니라 창덕궁 쪽으로 내려오는 응봉의 연맥이 주산이라고 보았다. 아니, 창덕궁조차도 정확한 혈 자리가 아니며 그 서편이 혈 자리라고 했다. 최양선은 태종 대 풍수학생이던 시절 한양의 서전문을 열자고 한 것을 필두로, 나라 곳곳의 풍수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다. 한양의 주산 문제를 꺼내기 3년 전에는 헌릉(태종의 능)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그 주변의 고갯길을 막아야 한다고 해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 논란은 한양의 주산 논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위가 한창이던 세종 15년 음력 7월 내내 조정은 최양선이 던진 한양의 주산에 대한 논쟁으로 뜨거웠다.
천도할 당시의 근심, 물길
태조 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와 태종 대 다시 한양으로 천도할 때 모두 풍수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부분 한양으로 천도하기를 원하지 않았을 때니, 한양의 풍수에 대해 나올 만한 안 좋은 평이 다 나오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부정적인 평가가 도드라진 것은 태종 대 재천도를 위해 한양과 무악을 다시 살펴보던 때다.
무악을 살펴보던 날, 서운관 관원들은 무악과 한양을 비교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 한양의 단점을 지적하기 바빴다. 가장 혹독하게 비판한 사람은 윤신달이었다. 그는 “지리로 논하면 한양은 앞뒤로 석산이 험하고 명당의 물이 끊겨 도읍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무악이야말로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추켜세웠다. 유한우는 무악에 대해 호평하지는 않았으나 “한양이 앞뒤로 석산이 험하고 명당에 물이 없으니 도읍할 수가 없다”는 윤신달의 평가에는 그대로 동의했다. 거기에 “지리서에서 ‘흐르는 물이 길지 않으면 사람이 반드시 끊긴다’고 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도읍에 사람이 끊긴다는 말이니, 왕조가 망할 수도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극언이었다. 이양달은 그나마 조금 다른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했다. “한양이 비록 명당에 물이 없다고는 하지만, 광통교부터 그 위로는 물 흐름이 있습니다. 전면에 물이 있고 사방을 감싸고 도니 조금은 도읍할 만합니다”라고. 그러면서 무악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태종실록> 태종 4년 10월4일).
윤신달, 유한우, 이양달 등 서운관 관원들은 무악에 대해서는 조금씩 판단을 달리하기는 했지만, 한양에 대해서는 입을 모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들이 이처럼 극언에 가까운 비판을 한 것은 전후좌우 눈치가 빤했기 때문이다. 서운관 관원들의 답변은 태종의 질문에서 비롯했는데, 사실 질문 이전에 답변의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태종은 관원들을 이끌고 무악의 중봉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며, “여기가 도읍하기에 합당한 땅”이라고 먼저 운을 뗐다. 그러면서 서운관 관원들에게 거리낌없이 자기 말을 다 하라며, “이 땅(무악)과 한양 중 어디가 좋으냐?”고 물었다. 무악은 임금의 오른팔 하윤이 건의했다. 직접 후보지를 살펴본 자리에서 이미 임금이 여기야말로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평가했다. 답변의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진배없지 않은가? 사회생활 좀 해본 사람이면 다 안다. 윗사람의 ‘거리낌없이 자기 말을 다 하라’는 말은 대체로 ‘내가 원하는 답을 대신 말해줘’의 뜻이라는 것을.
논의의 분위기와 결론은 잠시 젖혀두고, 한양의 문제에 다시 집중해보자. 서운관 관원들이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했지만, 한양에 대해 공통적으로 한 설명이 있다. 전후에 석산이 험하고 물길이 말랐다는 평가다. 이는 태종 대 처음 나온 얘기도 아니다. 태조 대 천도 논의에도 참여한 윤신달은 “우리나라 경내에서 송경(개성)이 가장 좋고 이 땅(한양)이 그다음입니다. 한스러운 점은 건방(북서쪽)이 낮고 물길이 말랐다는 것뿐입니다”라고 설명했다. 태조는 짐짓 한양을 맘에 두고 있으나 신하들은 개경에 그대로 있자고 하던 때, 그에 맞춰 답변을 했기에 결론과 어조는 다르지만 한양 풍수에 대한 평가는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앞뒤로 돌산이 험하고 물길이 부족하다는 것. 처음 천도할 당시 한양의 풍수에서 문제시됐던 것은 주산이 아니라 물길이었다.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북한산과 그 아래 도심의 모습. 김창길 기자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북한산과 그 아래 도심의 모습. 김창길 기자
남산에서 시작한 새 프레임
세종이 최양선의 주장을 면밀히 살펴보자고 결정하자, 곧 첨예한 논쟁의 장이 펼쳐졌다. 태조 대 천도 논의 때부터 참여해온 풍수계의 중진 이양달은 백악이 주산이 맞다며 최양선의 주장을 일일이 반박했다. 풍수학인들의 분분한 공방에 판단이 어렵자, 세종은 직접 경연에서 풍수설을 공부하겠다고 하기도 하고, 영의정 황희 등 최고위급 관료들에게 직접 풍수를 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목멱산에 올라 답사하고 지도를 그리게도 했다. 이때 양측은 삼각산에서 내려온 맥이 보현봉을 거쳐 어떻게 펼쳐져 가는지를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으며 논쟁했다. 핵심은 가운데에 위치한 주산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백악을 옹호하는 측은 백악을 기준으로 해야 명당의 전후좌우가 ‘균제하고 방정하다’고 평한 데 비해, 최양선 등은 승문원 연맥이야말로 가운데에 위치한 바른 맥이라고 보았다(<세종실록> 세종 15년 7월9일).
어느 쪽의 의견이 맞는지를 떠나 이들의 논의에서는 흥미로운 지점이 보인다. ‘타락산’, 지금은 ‘낙산’이라고 부르는 동대문 북쪽의 산세에 대한 명칭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악, 인왕, 무악, 남산 등의 명칭이 등장하는 데 비해 한양 도성의 좌청룡맥으로 꼽히는 타락산은 언급되지 않고, 동대문, 혹은 동대문 수구로 이어지는 맥세 정도로 설명이 된다. 지금처럼 한양의 사신사 중 ‘우백호 인왕산, 좌청룡 타락산(낙산)’이라고 하는 대칭적 인식과 명칭이 분명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이때 누구의 풍수 해석이 맞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며 별 의미도 없다. 당대에도 결론을 내지 못한 채, 괜히 임금이 나서서 논란에 불붙이는 바람에 후세에 쓸데없는 부담만 안겼을 뿐이다. 다만 이런 논의를 통해 시대와 사람이 바뀌면 생각과 해석의 관점도 바뀐다는 점을 알 수 있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
태조 대 처음 천도를 논의할 때에는 고려 숙종이 찾은, <도선비기> 속의 ‘면악’이 어디인지를 비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록에 대놓고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도선비기>는 조선 초에도 여전히 주요 참조 서적이었고, 백악 아니면 삼각산이 바로 그 ‘면악’이라 여겨졌다. 북쪽에서 내려오며 개경과 비교하면서 천도지를 찾은 이들은 삼각산을 기준으로 터를 살폈지, 남산에는 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한양이 석산이 험하다거나 물길이 짧다는 근심도 개경을 기준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한양은 개경에 비해 석산이 험했고, 개경에 비해 물길이 풍부하지 않았다. 무악을 건의한 하윤도, 한양을 비판한 윤신달도 모두 그 지세 판단의 기준에 개경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들은 고려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성장한 새 세대가 땅을 보는 관점은 달랐다. 최양선은 남산에 올라 지세를 살폈다. 그는 명당의 기준으로 개성을 언급한 적이 없으며, 물길은 전혀 문제 삼지도 않았다.
고려인 출신의 조선인이 개경이라는 과거의 프레임으로 한양을 접근했다면, 첫 조선인들은 새로운 프레임으로 한양을 보았다. 과거의 프레임이 낡은 사고에 근거했기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면, 무책임한 새 프레임은 별 성과는 거두지 못한 채 훗날 새로운 논쟁을 빚어낸다. 오늘날 우리가 서울타워에서 보게 되는 푸르른 도심의 지세는 조선 초 신구 세대의 서로 다른 해석이 대립하던 현장이다. 무심한 땅에 의미를 불어넣는 것은 결국 인간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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