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십팔번, 이문세의 '옛사랑' 노래를 부르며 눈 오는 날 광화문 거리를 찾아가고 싶지만 말문이 막혀서.
이 시대는 촛불을 켜고 반대의 함성이 가득했던 광장을 비워야 하며 반대는 커녕, 입 다물기를 강요 받으며 살아야 하나보다. 코로나19바이러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임금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의 심기를 상하게 해서는 안되는 또 다른 이유가 또 있구나. 국민과 소통하겠다며 광화문 앞으로 내려오겠다는 공약은 空約이 되고. 방역과 경호의 철옹성을 쌓아 스스로 여는 말문조차도 뜸하다.

이문세 노래그림, 광화문 연가(좌)ㆍ옛사랑(우)

그래도 노래 부른다. 내 마음대로 노래라도 부르며 추억속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그린다. 광화문 연가와 옛사랑을 좌우로 나란히 그려 두니 보기도 좋지않나? 하늘에 복을 빌며 기도하는 좌우의 합장이다.
내리는 흰눈으로 반칙과 거짓과 위선과 독선을 씻어내고 깨끗한 새해를 소망해본다.
* 이문세 노래에 맞춰, 하모니카 연주> HOHNER 다아이토닉, 크로스오버 Akey

옛사랑Aㅡ이문세노래.m4a
4.50MB

<옛사랑> 노랫말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빈 하늘밑 불빛들 켜져가면
옛사랑 그이름 아껴 불러보네

찬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우다
후회가 또 화가 난 눈물이 흐르네
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인걸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내맘에 둘꺼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 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흰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길 찾아가지
광화문 거리 흰눈에 덮여가고
하얀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내맘에 둘꺼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 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사랑이란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넘쳐
눈 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위엔
옛사랑 그대모습 영원속에 있네

흰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길 찾아가지
광화문 거리 흰눈에 덮여가고
하얀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https://youtu.be/CPLK6L1fq7k

窮民이 가지는 집회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와 의사표현의 자유마저도 저당잡히는 시대를 살아야 하나보다. 이순신 장군도 세종대왕도 기가막혀 말문을 닫으려 한다. 정말 '경험 해보지 못한 나라'에서 지금 살고 있다.

 ㅡㅡㅡㅡㅡ
<추억그리기>
성공회 주교좌 성당
청계천
동아일보사옥
광화문 네거리ㆍ세종대로ㆍ종로
이순신장관ㆍ세종대왕 동상
광화문 광장
세종문화회관
교보문고와 주미대사관
광화문과 경복궁
북악산과 북한산
르네 마그리트의 '사람의 아들' 패러디
광장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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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oogle 2021.01.24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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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길, 덕수궁 돌담길, 정동골목 언덕길. 동생이 고향을 떠나 총각때부터 18년 동안 생활했던 경향신문사를 찾아 올라갔던 그 골목길. 함께 걸었던 추억을 떠올려본다. 떠나온 고향보다 오래 살았던 서울 생활. 동생은 가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디가 내 고향일까?", 하기사 우린 어디에 살던 나그네이다.  
일산에 살다가 동탄으로 이사를 올 적에도 가장 그리울 것 같아 떠나야 할 발길이 머뭇 거렸던 곳이 이곳, 광화문 네거리(세종대로, 종로) 였다. 새해에는 마스크 벗고 같이 노래하며 다시 이 길을 걸어보리라 희망한다.

이문세 노래그림 ~ 광화문연가

*하모니카 연주> HOHNER 다이아토닉, 마린밴드 Bb key

광화문연가Bb-반주.mp3
1.70MB

노랫말 따라 그린다. 오월의 향기와 눈덮인 교회당, 그리고 지금은 비어있는 돈의문(서대문)이 다시 설 수 있기를 바라면서....
https://youtu.be/mezYFe9DLRk

<광화문 연가>
이제 모두 세월따라 /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다정히 걸어가던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 세월을 따라 따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 곳에 /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 세월을 따라 따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 곳에 /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 세월을 따라 따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ㅡㅡㅡㅡㅡ
노래따라 그림따라 걷는 추억과 역사의 현장
덕수궁 - 서울시립미술관 - 정동극장 - 정동제일교회 - 구 러시아 공사관 터 - 이화학당 - 경향신문사 - 돈의문터 -
경교장(강북삼성병원) - 홍난파가옥과 월암공원 - 인왕산 한양도성 곡장과 성곽길 정상

개화기 당시 한성부, 덕수궁 주변 - 오른쪽 하단의 황단(皇壇)이 대한제국 선포 뒤 하늘에 제사드리는 환구단이다.


스크랩1> 망국의 현장 덕수궁과 석조전.
서울 중구 정동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이 있습니다. 덕수궁 안에는 최초의 서양식 석조 건물이 있는데요. 최근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는 가상현실(VR) 영상으로 제작한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을 내년 1월까지 홈페이지에 공개한다고 밝혔어요. 석조전은 서울 덕수궁 안에 대한제국 황제와 황후의 생활 공간을 만들어 놓은 서양식 궁전입니다. 비운의 한국 근현대사가 농축된 장소이기도 하죠.
◇한양 한복판에 지은 서양식 건물
1896년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은 1년 만에 돌아옵니다. 일본군이 점령한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을 정궁(정식 궁궐)으로 삼고, 대한제국을 선포해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지요. 이해인 1897년에 설계를 시작한 덕수궁 안의 전각이 석조전이었습니다. 영국인 재정고문 존 맥리비 브라운이 발의해 13년 동안 건물을 짓게 됩니다. 자신이 살 서양식 궁전을 건설했다는 데서 고종의 근대화 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어요.
설계를 맡은 사람은 영국인 건축기사 존 레지널드 하딩이었어요. 하딩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그리스 풍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석조전을 설계했죠. 여기에 유럽의 식민지였던 동남아 지역의 기후에 맞춰 베란다를 설치했죠.
지층을 포함해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의 장대한 규모였죠. 석조전은 조선의 궁궐이 왕의 침소와 업무 공간으로 분리됐던 것과 달리 두 기능을 통합했습니다. 1층엔 접견실과 홀, 2층엔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거실이 있었어요.
◇궁궐 완성 석 달 전 나라는 망하고
1910년 12월 1일 석조전이 완공됐습니다. 그러나 ‘황제와 황후’는 이곳으로 들어와 생활할 수 없었습니다. 석조전이 완공되기 석 달 전인 8월 29일 일본과 강제병합되면서 나라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황후도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대한제국이 건립된 해에 설계를 시작한 궁궐이 그 대한제국이 멸망한 해에 완공된 것입니다.
1907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뒤로 덕수궁을 거처로 삼고 있던 고종은 “서양식으로 생활하려니 영 불편하다”며 입주하지 않았어요. 고종 입장에선 자신의 근대화 노력이 좌절된 상징으로 보였을지도 몰라요.
석조전에는 정식 이름이 붙지 않았어요. 조선 시대 궁궐의 전각 이름에는 깊은 속뜻이 있습니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에 ‘부지런히 정치함’, 덕수궁의 중화전(中和殿)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란 의미가 있죠. 하지만 석조전은 그냥 ‘돌로 지은 건물’이란 뜻입니다.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던 우리 전통 건축물과 다르다는 의미가 그대로 건물 이름으로 굳어진 셈이죠.
◇좌절된 근대화, 망국, 그리고 분단
이후 석조전은 귀빈 접대나 만찬을 여는 건물로 가끔 사용됐고,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잠시 고국에 올 때마다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1922년 5월 11일 이곳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어요. 영친왕과 일본인 왕비 사이에서 난 장남이자 왕실의 후계자였던 이진이 생후 9개월도 되지 않아 이곳에서 갑작스럽게 구토를 하고 열이 오른 끝에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1930년대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석조전 옆에 새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서관(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지어 이왕가미술관을 만들었고, 원래 석조전에는 일본 미술품들을 전시했습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가 석조전에서 열렸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반도 문제 해결을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신탁통치 문제로 의견 대립을 보인 끝에 1947년 결렬됐습니다. 좌절된 근대화와 망국(亡國)의 한을 품은 장소에 이번엔 분단의 아픔이 더해진 셈이죠. 이후 국립박물관과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되던 석조전은 2014년 복원 공사를 마치고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스크랩2> 한국최초의 감리교회 정동제일교회 

서울정동 감리교회

1884년 여름, 조선을 방문한 맥클레이(Mcclay,R.S.)는 고종으로부터 선교 윤허를 받았다. 당시 맥클레이는 일본에 체류 당시 친분을 맺었던 김옥균(金玉均), 미국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Foote,L.H.)와 동반하여 고종에게 선교의 뜻을 전하였다. 고종은 병원과 학교를 먼저 개설하고 점차 선교할 것을 권하였다.
한편, 1884년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甲申政變)에서 왕실의 외척 민영익(閔泳翊)이 개화당의 습격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이때 선교사 알렌(Allen,H.N)이 그를 치료하였는데, 이 일로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한 왕실의 신임이 커졌다. 조선 선교를 위하여 선교사 파송을 염두에 두고 있던 감리교와 장로교에서는 각각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보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를 통하여 조선에 첫 발을 디뎠다. 당시 언더우드는 서울에 입성하여 제중원 교사로 활동을 시작한 반면, 아펜젤러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인천에 머물다 1885년 4월 13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6월 20일, 아펜젤러는 다시 한국을 찾았고 인천에 머무르다가 6월 28일 외국인을 위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예배를 인도하였다. 최초로 풍금을 들여와 찬송과 예배를 봉헌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889년 서울에 선교의 터를 구축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곧 인천 선교에 착수하여 청국 조계 내에 초가집 2채를 구입하여 감리교 서점을 열었다. 하지만 청국 조계가 조선인 거류지와 거리가 떨어져 있는 관계로 전도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1년 6월 아펜젤러가 인천 지역 선교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했는데, 주말마다 말을 타고 인천에 와서 전도를 하면서 예배당의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35.6㎡(10.8평)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바닥에 마루를 깔고 외벽에 석회를 발랐으며 두 개의 방을 둔 이 예배당은 비록 작은 규모였지만 기존 건물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위해 새롭게 건축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교인이 점차 증가하면서 1901년 내동에 웨슬리 예배당을 새롭게 건립하였다. 1955년 웨슬리 예배당이 멸실되자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예배당 건립이 진행하었고 화재와 철거 등을 반복하다가 1985년 창립 100주년 기념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2012년에 옛 웨슬리 예배당을 복원하였다.

정민교 기자 jmk2580@incheonnewspaper.com <저작권자 © 인천신문>

스크랩3> 구 러시아공사관 - 치욕의 아관파천 현장

사적 제253호. 지정면적 1,102㎡. 1885년 10월에 정동에 개설한 러시아공사관(당시 영사관)의 정식 건물을 짓기 위하여 1890년 8월 그 자리에 초석을 놓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장소, 즉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피신하여 있던 곳인데, 파천중 친일 김홍집(金弘集)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徐載弼) 주재의 독립협회가 결성되는 등 역사적으로 다난한 시대의 증인이 된 건물이다. 건물은 6·25사변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탑옥부분만 남아 있다. 구조는 벽돌조 2층으로 한쪽에 탑옥이 있으며, 양식은 사면에 무지개모양의 2연창(連窓)과 요소에 박공머리를 두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원형이 대부분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의를 감안하여 1977년 9월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서

구, 러시아 공사관

* 아관파천(俄館播遷): 친러 세력에 의하여 고종 임금이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으로,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함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1895년의 이듬해인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고종 임금이 피신하여 국정을 수행하며 대한제국 건설을 구상하였던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곳이다. 1890년(고종 27)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립되었지만,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탑 부분만 남은 상태다.
이곳에서 고종 임금은 친위 기병대를 설치하는 안건(1896.6.8.)과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1896.8.5.)을 반포하였으며, 민영환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임명(1897.1.11.)하여 영국ㆍ독일ㆍ러시아 등 각국에 외교 사절로 머물게 하는 등 일본을 비롯한 열강으로부터 주권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환구와 사직 등에 지내는 향사(享祀, 제사)를 모두 옛 역서(曆書)의 예대로 거행하도록 조령(1896.7.24.)을 내리는 등 천자의 독립된 나라임을 알리기 위한 준비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 결과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환궁(1897.2.20.)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환구단을 건축하고 환구 의례를 거행한 후 황제로 즉위하여 대한제국을 선포(1897.10.12.)하기에 이르렀다.
* 환구단은 문화재 지정 시 문화재위원회에서 한글 표기는 고종 황제가 제사를 지낸 1897년 10월 12일 자 ‘독립신문’ 기록에 따라 ‘환구단’으로,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전하는 바와 같이 圜丘壇으로 하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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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커피여과지 노래그림 2020. 12. 25. 17:09 Posted by 문촌수기

지난 가을 낙엽 하나가 이런 기쁨도 주네요.

https://youtu.be/ibHLTH2icVw

코로나 바이러스 같이 어서 쫓아버릴 것도 있지만,
가지말라고 애원하며 붙잡을 것도 있죠?
건강과 지금.
오늘 덕분에 재밌게 놀았어요.
https://youtu.be/OkXyUZ_Kems

따라쟁이, 금방 모방.
Allen Shaw 검색해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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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거룩한 밤

커피여과지 노래그림 2020. 12. 24. 21:22 Posted by 문촌수기

고요한 밤(Silent night) 노래그림

고요한 밤 거룩한 밤(silent night)은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불리는 캐럴 송 중 하나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를 경축하며, 새해 인사도 드릴 겸 노래 그림을 그린다. 2021년은 새해는 소띠해. 음양 오행설에 의하면 白(흰색)의 운이 따른다고 하니, 반칙과 거짓과 질병이 없고 평화롭고 깨끗한 세상이 올거라 믿으며 흰송아지를 그렸다. 딸 아이네 반려묘, 나나 순이도 함께 아가의 탄생을 축하한다.
온 세상에 평화와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도드린다.

1818년 프란츠 그루버(Franz Xaver Gruber)가 작곡하고,  오스트리아의 오베른도르프(Oberndorf bei Salzburg)에서 요제프 모어(Joseph Mohr)가 가사를 붙였다.

*하모니카 연주 > HOHNER 다이아토닉, 크로스오버 G key

고요한밤.m4a
2.35MB
고요한밤G.m4a
2.10MB

우리말 노래> 가톨릭식 번역본

1절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만상이 잠든 때/홀로 양친은 깨어있고 평화 주시러 오신 아기/평안히 자고 있네 평안히 자고 있네
2절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하늘의 천사가/기쁜 소식을 알려주니 착한 목동은 기뻐하네/구세주 나셨도다 구세주 나셨도다
3절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천주의 성자가/인간 모습을 취하시니 우리 구원을 알림인가/우리 주 강생했네 우리 주 강생했네
4절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하느님 사랑을/오늘 우리게 베푸시니 천하만민은 화해하네/지극한 사랑이여 지극한 사랑이여


"Stille Nacht, heilige Nacht"
어니스틴 슈먼하인크가 부르는 소프라노 솔로
https://youtu.be/bXMM24n1yno Bb

https://youtu.be/DKz1eOyIfz8

Portrait by Sebastian Stief (Hallein,1846), Silent Night Museum, Hallein

Franz Xaver Gruber(1787-1863)
Joseph Mohr (1792-1848)


이 노래의 발상지는 오스트리아의 음악도시 잘츠부르크에서 약 20km 떨어진 오베른도르프(Oberndorf)라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에서 자동차로 약 20분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노래의 발상지가 된 성 니콜라우스 교회

1800년대 초 이 마을에 요제프 모어(Joseph Mohr)라는 가톨릭 교회 사제와 프란츠 그루버(Frantz Gruber)라는 학교선생이 있었다.
음악의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어는 이 마을의 성 니콜라우스 교회에서 1817년부터 1819년까지 사제로 재직했다. 그루버는 이웃 마을인 아른스도르프에서  1807년부터 1829년까지 학교선생으로 있으면서 성 니콜라우스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얼굴을 자주 맞대며 일하는 동안 자연히 가까워졌다.
1818년의 크리스마스 축제를 며칠 앞두고 성당에 있는 오르간이 고장이나 고칠 수가 없었다. 당시 26세인 모어 신부는 그루버 선생에게 축복이 가득한 성탄 전야에 모여들 마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무엇인가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는데 탈이 났다. 이에 대해 그루버는 모어 신부가 잘 치는 기타 반주로 곡을 만들어 보자고 해서 이 제안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
모어 사제는 모든 사람들이 조용하게,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그 동안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느꼈던 감정을 토대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Stille Nacht Heilige Nacht)"으로 시작되는 노랫말을 만들었다.

[1818 년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어는 2 년 전에 쓴 시를 가지고 이웃 마을 인 아렌스도르프(Arnsdorf)에있는 친구 그루버를 방문하기 위해 오베른도르프(Oberndorf)에 있는 그의 집에서 3km를 걸어갔다 .
그는 불과 몇 시간 거리에 있는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  미사를 위한  캐롤이 필요했고, 교회의 합창단 마스터이자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한 그의 친구 그루버가 그의 시에 가락을 맞출 수 있기를 바랐다. 그루버는 모어의 "고요한 밤"에 단 몇 시간 만에 멜로디를 붙였다. 
이 노래는 자정 미사에서 기타와 합창단을 위해 간단한 편곡으로 불려졌다. "고요한 밤"의 기원과 관련하여 수 년에 걸쳐 다양한 전설이 생겨 났지만, 가장 간단하고 가능성 있는 설명은 모어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악기인 기타로 연주 할 수있는 오리지널 노래를 원했던 것 같다. 
몇 년 안에 캐롤의 편곡이 잘츠부르크 대교구의 교회에 나타 났고 Ziller Valley의 포크 가수들이 유럽을 여행하면서 작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노랫말은 6절로 되어 있는데 1절은 다음과 같다.

Stille Nacht, heilige Nacht!
Alles schläft, einsam wacht
Nur das traute hochheilige Paar.
Holder Knabe im lockigen Haar,
Schlaf in himmlischer Ruh',.
Schlaf in himmlischer Ruh'.

모어 사제는 이 노랫말을 성탄전일인 12월 24일 그루버선생에게 전하면서 두 명의 솔로, 그리고 기타반주를 곁들인 합창에 맞도록 곡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노랫말을 받고 난 그루버는 그의 탁월한 음악 소질을 발휘하여 그날 밤으로 곡을 만들었다. 성탄전일의 조용하고 거룩한 뜻을 담고 있는 가사에 어울리는 곡이었다.
모어 사제는 이 곡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노래는 두 사람의 공동노력으로 오베른도르프의 성 니콜라우스 교회에서 곡을 만든 당일인 12월 24일 저녁예배 도중에 처음으로 불렸다. 물론 참석한 신도들로부터 많은 갈채를 받았다.
모어 사제는 기타를 치면서 테너를 맡고, 그루버 선생은 베이스를 맡았으며, 교회합창단이 후렴을 불렀다. 그 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이 교회에서 불리면서 점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 중인 19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벨기에의  이프르에서  영국과 독일 간의 전쟁중 독일군의 한 병사가  크리스마스 캐롤인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는데, 이를 들은 영국 군사들이 환호하자 독일군이 노래를 다 끝마친 후 독일군 장교가 나와 영국군 하사와 악수를 하여 정전을 맺었다. 이를 크리스마스 정전이라 한다.
1937년 8월 15일 성 니콜라오교회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노래를 만든 모어 신부와 그루버 두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고요한 밤 성당(Stille Nacht Kapelle)"으로 명명되었다.

Silent Night Chapel in Oberndorf, Austria

한편, 성 니콜라우스는 산타클로스의 원형이기도 하다. 라틴어로 성 니콜라우스를 뜻하는 상투스 니콜라우스(Sanctus Nicolaus)를 네덜란드어 로는 산테 클라스라 불렀는데, 이 발음이 영어식으로 변형되어 오늘날의 산타클로스가 된 것이다.


Instrumental version played on piano by Kevin MacLeod in 2000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Round yon virgin mother and child!
Holy infant, so tender and mild,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Silent night! Holy night!
Shepherds quake at the sight!
Glories stream from heaven afar,
Heavenly hosts sing Alleluia!
Christ the Saviour is born!
Christ the Saviour is born!

Silent night! Holy night!
Son of God, love's pure light
Radiant beams from thy holy face
With the dawn of redeeming grace,
Jesus, Lord, at thy birth!
Jesus, Lord, at thy birth!

Oberndorf bei Salzburg 는 잘츠부르크 시에서 북쪽으로 약 17km (11 마일) 떨어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에 있는 마을이다.

Oberndorf bei Salz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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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여과지 노래 그림 한 장 그리기위해
커피를 갈아서 내린다.

커피를 마신다

노래를 듣다.

노래를 부르며 추억에 젖는다.
광화문 연가와 옛사랑
그리운 마음에 그림이 그려진다.
커피여과지 물들다.

커피 여과지 씻다.

여과지 말리다. 펴다.

그리다.

 낙관을 찍는다.

다리미로 다린다.

종이 박스를 오려서 액자로 삼는다.

스프레이 접착제로 풀칠한다.

중심을 잡고 조심스럽게 붙인다.

전시하고 감상하며 다시 노래부른다.
노래 사연과 그림 속 이야기를 추억하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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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릉 제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쌍릉)

 예릉睿陵(철종과 철인황후)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능의 형식 :쌍릉능의 조성 :1863년(고종 1), 1878년(고종 15)

능의 구성
예릉은 조선 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철종장황제, 오른쪽이 철인장황후의 능이다. 예릉은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마지막 조선왕릉의 형태로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예릉의 문무석인과 석마, 장명등, 석양과 석호 일부는 중종의 구 정릉(靖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정릉(靖陵)을 서울 강남으로 천장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장명등은 문석인 가운데가 아닌 능침 앞쪽으로 배치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배치방법이다.

능의 역사
1863년(철종 14)에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64년에 고양 희릉(禧陵) 서쪽 언덕인 구 정릉(靖陵)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철인장황후 김씨가 1878년(고종 15)에 세상을 떠나자 예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향로와 어로. 황제릉 조영원칙에 따라 향로 좌우에 어로를 깔았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후 향로 왼편으로 어로를 하나 더 깔다보니 정자각에서 볼 때 참도가 왼편으로 치우쳤다.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이야기

철종장황제(재세 : 1831년 음력 6월 17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 재위 : 1849년 음력 6월 9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인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아들로 1831년(순조 31)에 경행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할아버지는 은언군으로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은언군은 정조 즉위 후 역모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순조 1)에 신유박해사건 때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이후 순조는 1830년(순조 30)에 은언군의 가족을 방면하였고,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이 1831년(순조 31)에 철종을 낳았으나, 헌종 즉위 후에 역모사건으로 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계속 강화도에서 생활하였다가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숙황후의 명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처음에는 순원숙황후의 수렴청정을 받아 국정을 운영하였고, 1851년(철종 2)부터 친정(親政)하였다. 헌종 대에부터 시작된 삼정(三政 :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진주민란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도로 인해 국정을 바로 잡지 못하였다. 그 후 1863년(철종 14)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었다.

이야기 더하기 ㅡ 극에 달한 세도정치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진다면 동생이나 조카벌이 왕통을 잇게 한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 드릴 때에 항렬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는 법도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동 김씨 척족들의 세도 권력 유지 차원에서 선왕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을 왕통을 잇게 했다. 원범은 천애고아가 되어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년여가 지난 어느날 갑자기 왕이 되었다. 순원왕후 김씨의 명이었다. 나이도 어린 데다 배운 것도 없다보니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였다.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이때부터 절정을 이루었다.
본디 세도ㆍ世道 정치라 함은 조광조가 도학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킨데서 주창된 것이다.즉,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여 정학을 북돋는 일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유탁을 받은 사돈이자 초계문신인 김조순은 12세의 어린 순조가 왕이 된 후, 안동 김씨 척족들의 세도ㆍ勢道가 시작되었다.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이야기
철인장황후 김씨(재세 : 1837년 음력 3월 23일 ~ 1878년 음력 5월 12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씨의 딸로 1837년(헌종 3)에 순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858년(철종 9)에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다. 철인장황후는 안동 김씨 출신의 왕비였지만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고, 말수가 적고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순대비(明純大妃)가 되었으며, 1878년(고종 15)에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인장황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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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릉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쌍릉)ㅡ미공개 지역
~인종과 인성왕후 무덤인 효릉은 젖소개량사업소 안에 섬처럼 고립돼 있어 원칙적으로 문화재 수리·보존과 학술조사 시에만 출입이 가능하다

효릉孝陵(인종과 인성왕후)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능의 형식 :쌍릉능의 조성 :1545년(명종 즉위), 1578년(선조 11)

능의 구성

효릉은 조선 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효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인종, 오른쪽이 인성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인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형식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효릉 조성 당시에는 병풍석이 없었으나 1578년(선조 11)에 인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병풍석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인성왕후의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능의 역사

1545년(인종 1)에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고양 정릉(靖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인종의 능을 조성할 때 인성왕후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어 놓았다. 이후 인성왕후 박씨가 1577년(선조 10)에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78년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인종(仁宗) 이야기

인종(재세 : 1515년 음력 2월 25일 ~ 1545년 음력 7월 1일, 재위 : 1544년 음력 11월 20일 ~ 1545년 음력 7월 1일)은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로 1515년(중종 10)에 경복궁 동궁별전에서 태어났다. 1520년(중종 15)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9개월의 기간을 재위한 인종은 기묘사화로 유명무실해진 현량과를 복구하고, 조광조를 복권시켜주었으나, 중종의 상을 치르면서 몸이 악화되어 1545년(인종 1)에 경복궁 청연루 소침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성왕후(仁聖王后) 이야기

인성왕후 박씨(재세 : 1514년 음력 10월 1일 ~ 1577년 음력 11월 29일)는 본관이 반남인 금성부원군 박용과 문소부부인 김씨의 딸로 1514년(중종 9)에 태어났다. 1524년(중종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종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명종 즉위 후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되었다. 1577년(선조 10)에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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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릉禧陵(중종비 장경왕후)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능의 형식 :단릉능의 조성 :1537년(중종 32)

능의 구성

희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단릉이다.
고양시 일산에서 멀지 않은 서삼릉 목장으로 진입하는 포퓨러 가로수 길도 희릉의 일부였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며 갑옷의 조각 수법을 보면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노출시켜 맞잡고 있다. 소매의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를 보여 주고 있다.

능의 역사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에 희릉 조성 당시에서 문제점이 있다는 김안로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다. 이후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능을 희릉 서쪽 언덕(현 철종 예릉)에 조성하면서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취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으나, 1562년(명종 17)에 중종의 능을 현 서울 강남구로 천장하면서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조 유시에 따라 병풍석 없이 12지간의 난간 만을 두른 단릉이다.
몸통에 비해 머리가 유별히 큰 문석인. 홀笏 역시 크며, 양팔 소매 주름은 끝에서 돌아와 손목 위에서 두겹으로 감겨 흐르고 있다
희릉의 문ㆍ무석인은 조선왕릉 최대의 석물이다
정자각 신문에서 능침으로 이어진 신교는 사초지 강 (岡)속으로 스며 들어가듯이 조성되어 상상력을 더하고 경건한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예감에는 뚜껑돌이 덮혀 있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이야기

장경왕후 윤씨(재세 : 1491년 음력 7월 6일 ~ 1515년 음력 3월 2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원부원군 윤여필과 순천부부인 박씨의 딸로 호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중종 1년(1506)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내명부 종2품)로 책봉되었다가,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가 칠일 만에 폐위되면서 이듬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9년간 왕비로 있으면서 어느 누구도 천거하거나 해하지 않아 중종이 감탄하여 어진 장경왕후를 주나라 문왕의 비와 비교하면서 '태사(太姒)의 덕' 이상이라 극찬하였다. (참고, 문왕의 모후는 태임(太姙)이며, 신사임당의 당호는 태임의 덕을 본받는다는 뜻.)
중종 사이에서 효혜공주와 인종을 낳았으며, 1515년(중종 10)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경복궁 동궁별전에서 25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은 훗날 장경왕후와 같이 묻히길 바라며 헌릉(태종릉) 우측 능선 너머, 현 서초구 세곡동에 희릉을 조성하였다. 시호는 '단정하고 밤낮으로 조심스럽다' 하여 장경(章敬)이라 하고, 능호를 희릉(禧陵)이라 했다.
그러나 20여년 후 능역조성의 주도세력이었던 정광필 등에 반감을 산 김안로가 장경왕후 능침 아래에 큰 암반이 있어 세자(인종)에게 흉하다고 고해서 귀가 얊은 중종이 천장을 지시하였다. 정적 제거를 위한 옥사였다. 그래서 지금의 서삼릉 영역 내로 옮겨 졌고, 정광필 등은 김해로 유배되고 김안로 세력이 실권을 장악했다.
김안로는 장경왕후의 딸 효혜공주의 시아버지로 중종과는 사돈지간이 되며, 장경왕후 부친인 윤여필, 오빠 윤임과 손을 잡고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장경왕후 승하 후 왕비가 된 문정왕휘 윤씨의 동생 윤형원과 대립하게 된다. 이런 세력다툼을 세자편의 윤임을 대윤, 문정왕후 동생 윤형원 파를 소윤이라 했다.

희릉이 있는 서삼릉 지역은 없어진 수복방, 수라청이 복원되어야 하며, 주변의 승마장과 목장으로 훼손된 지형, 물길, 금천교 등의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장경왕후는 그의 아들 인종과 며느리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ㆍ孝陵이 희릉 옆 서측 능선 서삼릉 영역 안에 같이 있어, 인종을 낳고 칠일 만에 산후병으로 죽은 애통한 장경왕후는 영원토록 효자 인종과 며느리의 효도를 받고 있다. (이창환, 신의 정원 조선왕릉에서)


희릉 초장지ㅡ서울 서초구 구룡산
처음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 초장지 일 것이라고 여겨 발굴을 시작하였다가 쌍릉이 아니고, 단릉이라서 연구결과 장경왕후 초장지로 밝혀졌다. 태종의 헌릉이 있는 대모산에서 서쪽에 있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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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제6대 단종의 능

세자 묘(원)의 형식을 갖춘 장릉(단종릉)
홍살문과 정자각을 잇는 참도가 ㄴ자로 꺾여있다.

 

 장릉莊陵(단종)

위치 :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능의 형식 :단릉능의 조성 :1457년(세조 3), 1516년(중종 11), 1580년(선조 13), 1698년(숙종 24)

능의 구성

장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능이다. 단종이 1457년(세조 3년) 노산군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1698년(숙종 24) 단종대왕으로 복위되면서 묘소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영월 장릉의 진입공간에는 재실 외에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있다.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묘을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재실 옆에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한 번 꺾여있다. 능침에는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도 한 쌍만 조성하였다. 그 밖에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석마 등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으며, 무석인은 생략하였다.

장릉의 문석인, 눈과 입을 깊게 감은 모습은 계유정란의 참극과 단종 복위운동 실패의 화를 증언하는 듯하다.

 

<신의 정원 조선왕릉조선왕릉>ㅡ 이창환, 한숲 에서

 

배치도

 

<신의 정원 조선왕릉조선왕릉> 이창환, 한숲 에서
조감도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낙촌비각(駱村碑閣)

박충원의 낙촌비각

 장릉 정자각을 들어가는 입구

단종역사관을 지나 재실과 엄홍도 정려각이 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엄홍도 정려비

 

장판옥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가 있다.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
나의 조상, 영의정 황보 인(仁)자 할아버지 휘가 보인다.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

 

제향공간

 

홍살문,비각,수복방 - 홍살문과 정자각을 잇는 참도는 'L'자로 꺾여있다. 정자각 위로 능침의 곡장이 동쪽을 향해 열려있다.
정자각
수라간
비각. 비각 안에 장릉 표석이 있다.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
정자각과 능침(봉분) 영역

 영천(靈泉)
장릉 서쪽에 있는 우물로써, 정조15년에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하여 한식때 제정ㆍ祭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 때는 물이 조금씩 쏫았으나, 한식 때는 많이 용출ㆍ湧出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1.5미터이며 하단은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있고, 상부는 장방형이다.

영천
숙종 대에 추봉하면서 제작된 사각의 장명등은 조선 최초의 형식으로 추정된다.

 능의 역사
단종은 1457년(세조 3) 세상을 떠나 영월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1516년(중종 11) 묘를 찾아 봉분을 만들었고, 1580년(선조 13)에 상석, 표석 등의 석물을 세웠다. 그 후 1698년(숙종 24)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어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端宗) 이야기
단종(재세 : 1441년 음력 7월 23일 ~ 1457년 음력 10월 21일(또는 24일), 재위 : 1452년 음력 5월 18일 ~ 1455년 음력 윤6월 11일)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에 경복궁 자선당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년)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12세의 나이로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수렴청정을 할 대비(大妃)가 없어 고명대신 김종서 등이 단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숙부 수양대군(세조)이 불안정한 왕권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1453년(단종 1)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후 2년 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 신하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송현수(단종의 장인) 등도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1457년(세조 3)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이후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자 영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해 숙부 금성대군 등이 계획한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결국 1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자결하자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영월호장 엄흥도가 노산군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중종대에부터 노산군의 대해 거론하기 시작하여 1516년(중종 11) 노산군의 묘를 겨우 찾아 봉분을 만들었으며, 선조대에는 석물을 세웠다. 그 후 숙종대인 1681년(숙종 7년) 노산군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하였으며, 여러 논의 끝에 1698년(숙종 24) 왕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였다.

ㆍ청령포

ㆍ관풍헌

엄홍도의 이야기
1457년 경상도로 유배 간 막내삼촌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자, 단종은 폐서인으로 강등되어 그해 10월 영월 관풍헌에서 사사(세조실록에서는 자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버려진 시신을 아무도 거두지 않았지만, 영월의 아전인 엄홍도가 거두어 동을지산ㆍ冬乙旨山에 몰래 묻었다.
후환이 두렵다며 주위사람들이 말렸으나,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며 홀로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지게에 짊어지고 산지를 찾아가는데 소나무 밑에 사슴 한마리가 앉았다가 자리를 비켜주어 그 자리에 잠시 쉬었다 일어서려는데 지게가 들리지 않아서 그 자리에 급히 암장하였다 한다. 이곳이 현재의 장릉이다. 그래서인지 장릉의 능침은 첩첩산중의 중턱이지만, 눈이와도 쉽게 녹고 따뜻한 양지바른 곳이다.
단종의 넋은 두견새로 환생했다고 전해진다.

 

장릉은 첩첩산중이지만 양지바른 곳이다. 모든 산 능선들이 단종께 조배를 드리는 듯 장엄하다. -<신의 정원 조선왕릉조선왕릉> 이창환, 한숲 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 단종비, 정순왕후의 자주동천 
munchon.tistory.com/1009

낙산자락 비우당 자주동천

낙산 동쪽 자락 비우당(庇雨堂), 조선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의 저자, 실학자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집터이다. 집터는 한양도성을 이루고 있는 동.서.남.북 봉우리 중 가장 낮은 서쪽 좌청룡에

muncho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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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면 잊혀지나 했는데 지워지지 않는구나. 그래도 생각하지 않고 살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밀려 오는 생각은 어쩔 수가 없구나. 그래도 차마, 입에는 담지 못할 것 같았는데....차마 그릴 수 없는데...

조동진 <제비꽃>, 커피여과지 노래그림

다행히 아무도 울지 않았다. 모두가 잠 듯한 조용한 소아암병동을 남자는 혼자 걷고 있다. 복도벽에 붙은 아기 천사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한참을 바라보더니 그림에서 조심스럽게 아기 천사의 날개를 뜯어내고 있다. 그제서야 안심한 듯 남자는 복도를 지나 돌아간다. 병실의 아이는 평온히 잠들어 있고, 묵주를 들고 기도하던 마리아는 아이 옆에 엎드려 있다.

조동진의 <제비꽃> 사연이야 어쨌든, 나는 이 노래를 세상 먼저 떠난 모든 아기들을 위해 부른다. 점점 야위어 가고 아주 한밤 중에도 깨어있기를 바랐던지 잠들지 않은 너. 하늘 높이 날으는 작은 새가 되어버린 나의 어린 아기에게 이 그림과 노래를 바친다. 이 노래 덕분에 나의 아이는 작은 새가 되었고, 제비꽃이 되었다. 잊어야 하는데 잊혀지지 않아 나의 작은 소녀를 그린다. 너는 말 한마디 없이 새털보다 가벼운 미소를 건내주었다. 그게 마지막이었지. 널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와 노래 뿐이구나.
'음~ 음~ 음~ 음~ ' 다하지 못 한 말, 다 할 수 없는 말은 이렇게 신음한다.

'제비꽃' 하모니카 연주
: (호너 다이아토닉, 마린밴드 Bb
)

제비꽃ㆍ반주Bb.m4a
4.40MB

 조동진의 <제비꽃> 노랫말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음~음~음~음~~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많이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음~음~음~음~~

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 너머 먼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어

음~음~음~음~~


기독교에서 제비꽃은 장미, 백합과 더불어 성모님께 바치는 '성실겸손'의 꽃이란다. 조동진의 <제비꽃> 노래를 부르며 내가 떠올린 꽃말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며, '꽃 피지 못한 삶'이다. 그래도 다행히 너는 '영원한 나의 소녀'가 되었다.


https://youtu.be/SAK_LuLpf8s


(스크랩), 조동진의 <제비꽃> 사연
조동진은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청맥, 1991)에서 '제비꽃' 시를 쓰게 된 내력을 밝힌다. 그는,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봄바람 속에서 짧게 흔들리고 있는 그 꽃을 발견하게 되면 반가움과 함께 왠지 애처로운 생각도 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꿈 많은 젊음이 갖는 절망감을 보는 듯해서 더욱 그러하다"고 한다. 이 시의 제목을 '제비꽃'이라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제비꽃'(1985)을 불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제비꽃의 실제 모델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내 노래 속의 등장인물은 내가 살아오면서 실제로 만났던 사람들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중략) 특히 〈제비꽃〉을 지으면서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여성 이미지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던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 가운데》의 니나 붓슈만과 프랑스 작가 앙드레 슈발츠-바르트(Andre Schwarz-Bart)의 《내 이름은 고독(A Woman of Named Solitude)》에 나오는 혼혈 노예 '솔리튜드'였다. 아마도 세상과 맞서며 끊임없이 자신과의 투쟁을 벌이는 두 여주인공에게서 상당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우리와 닮은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꿈과 사랑, 슬픔과 좌절, 그러고는 조금씩 달관해 가는 그 성숙 과정을 노래해 보고 싶었고, 그래서 조금 욕심을 내어본 노래가 〈제비꽃〉이다.

-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청맥, 1991)

 그는 '제비꽃' 시를 쓰면서 니나 붓슈만과 솔리튜드를 생각했다. 이 시는 동화처럼 서사를 갖추고 있고, 한 소녀의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의 말처럼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꿈과 사랑, 슬픔과 좌절, 그러고는 조금씩 달관해 가는 그 성숙 과정을" 노래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조동진 또한 앞글에서 살핀 안동 대곡분교 홍성희(3학년), 김춘옥(2학년)과 마찬가지로 활짝 핀 제비꽃에서 '웃음'("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을 읽는다. 그런데 홍성희와 김춘옥이 제비꽃의 웃음을 직관으로 단순하게 '방글방글' '생글생글'로 붙잡았다면, 조동진은 그 웃음에서 '한 인간의 인생'을 본다. 1연에서는 '꿈과 사랑'(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2연에서는 '슬픔과 좌절'(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3연에서는 '달관'(창 너머 먼 눈길)의 웃음으로 말이다. 그는 제비꽃의 웃음에서, 꿈과 희망을 보고, 힘들지만 그래도 버텨내겠다는 의지를 읽고, 지난날이 한없이 그립지만, 그래서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지만, 이제는 지금을 긍정하는 달관의 웃음으로 노래한다. 연마다 있는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에서 그 웃음은 저마다 결이 다른 웃음이고,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세상을 알고, 살아가고, 이제 곧 세상을 떠날 때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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