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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유산의 길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

by 문촌수기 2025. 11. 18.

경주 양동(慶州 良洞)마을은 내 고향 가까이에, 고향 가는 길에 늘 지나가던 마을이다. 2010년 세계문화유산이 되고 처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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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慶州良洞마을)
Yangdong Village, Gyeongju
국가민속문화유산
National Folklore Cultural Heritage

이 마을은 조선시대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최대 규모의 전통마을이다.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로 5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양민공 손소(1433-1484)가 풍덕 류씨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경주 손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여주이씨는 찬성공 이번(1463-1500)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혼인한 신랑이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풍습이 있었다. 그동안 두 집안에서는 우재 손중돈 (1463-1529)과 회재 이언적 (1491-1553) 등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마을 앞으로는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설창산 산줄기에 마을이 들어선 모양새가 독특하고 아름답다. 산에서 뻗어내린 네 줄기의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150여 채의 옛집들이 굽이굽이 들어서 있는데, 이 중에서는 임진왜란(1592~1598) 이전에 지어진 기와집이 네 채나 남아 있어 눈여겨 볼만하다. 집들은 대개 'ㅁ'자 모양인데, 이는 조선 중기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가옥 형태이다. 다양한 가옥의 조화는 우리나라 전통역사마을의 생활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 주변의 산, 들판, 강 등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함께 '하늘의 별처럼 늘어서 있는 마음의 고택'은 진풍경이다.
양동마을은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1984), 세계문화유산(2010), 형산강팔경 (2016)으로 선정되어 보전되고 있다.

세계유산 표지석

세계유산 世界遺産
韓國의 歷史마을 良洞
THE WORLD HERITAGE Historic Village of Korea Yangdong


양동마을은 500여년의 전통을 가진 역사 마을로 2010년 7월 31일 34차 세계유산 위원회(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되었다.
Yangdong Village, which has a 500-year-old historic tradition, was listed in UNESCO World Heritage Sites with Hahoe Village in Andong as "The Historic Villages of Korea: Hahoe and Yangdong at the 34th World Heritage Committee meeting held in Brazilian, Brazil on July 31, 2010

탐방로
양동초등학교
양동초등학교 관사
관가정(좌)과 손종로 정충비각(우)
언덕 위, 관가정
향단
향단

1) 손종로 정충비각
(孫宗老 旌忠碑閣)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손종로(孫宗老,1598~1636)와 그의 충성스런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7년(1783)에 세웠다. 손종로는 광해군 10년(1618) 무과에 급제하여 남포현감을 지낸 분으로 병자호란 때 이천의 쌍령전투에서 그의 노비인 억부와 함께 전사하였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여 옷과 관으로 제사를 지냈다.

손종로 정충비각(孫宗老旌忠碑閣)
손종로 정충비각(孫宗老旌忠碑閣)

'충노억부지려(忠奴億夫之閭)'는 한자어로, '충성스러운 노비 억부의 정려문'이라는 뜻이다.
閭(려)는 정려문으로, 충신이나 효자 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문이다.
이 현판은 경주 양동마을에 있는 비각에 걸려 있으며, 병자호란 당시 주인을 따라 전쟁터에서 함께 목숨을 바친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노비의 충절을 공식적으로 기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주인인 손종로의 '정충각(旌忠閣)'과 나란히 서 있어, 신분을 초월한 두 사람의 충절을 함께 기리고 있다.
내 고향의 구룡포 성동리 광남서원에도, 노비였던 '단량'의 충절을 기리는 비와 비각이 있다.

충노억부지려
충노억부지려
정충비
왼쪽의 은행나무는 벼락을 맞아 반쪽이 떨어져 나갔다.

2) 관가정 | 觀稼亭
Gwangajeong House

보물 제442호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의 살림집이다. 중종 9년 1514에 지은 집이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담으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둘러막아 집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하여 낮은 지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관가정'은 '곡식 자라는[稼]이 모습을 본다[觀]'는 뜻으로 누마루에 올라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대청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인데 살림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 때 필요한 공간 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다. 본채의 뒤쪽에 사당이 있으며,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있다. 대문과 담은 원래 없었으나 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조선 중기 남부지방의 주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관가정 누마루와 안채 대문
관가정 현판이 걸린 누마루
관가정에서 내려보는 양동마을
관가정 누마루 뒷뜰
관가정 누마루 뒷뜰에서 보는 안강들판
관가정 향나무
관가정 안채 대청의 객거암, 안방 출입문과 호문(號門)
안채 대청 좌우의 방문이 대칭구조가 아니다. 그 이유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방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는 추측이 있다.
관가정 사당의 삼문
관가정 사당
관가정에서 본 향단과 향당의 사당

3) 물봉(勿峰) 동산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에서 무첨당으로 가는 길에 마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높고 느른 동산으로 양동 마을의 최고 전망 명소이다.

물봉동산과 영귀정
물봉동산에서 내려본 안강들판
물봉동산
물봉동산에서 보는 성주산

4) 무첨당(無忝堂) /보물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齋) 이언적 (李彦迪,1491~1553) 선생 종가의 제청으로, 기능에 충실하게 지어진 조선 중기의 건물이다.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 종가에 16세기 중엽에 지어진 제청(祭廳)으로, 그의 맏손자인 무첨당 이의윤(1564~1597)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고, 동쪽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본채가 있다.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의 기능이 강했으며, 독서와 휴식, 손님 접대와 문중 회의를 했던 큰 사랑채다. 대청 오른쪽 벽에 걸린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현판은 '영남에서 선비가 살고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기 전에 '상갓집개'처럼 떠돌다 이 곳을 방문했을 때, 따뜻하게 맞아준 것에 감사의 마음으로 죽필로 직접 쓴 것이란다.
'좌해(左海)'는 한양의 왼쪽으로 영남을 말하고, '금서(琴書)'는 거문고와 서책을 뜻하는 정신문화와 지식을 상징한다.
그리고보니, 책만 보는 백면서생이 되지말고 예술과 풍류도 아는 멋쟁이가 되란 말이지 않은가?
왼쪽 현판, 물애서옥(勿厓書屋)
청나라에서 형부상서를 지낸 문각공 조광(1797~1855)이 현판을 남겼다.
물애(勿厓)는 무첨당이 위치한 '물봉골'이며, 서옥(書屋)은 '학문하는 마을'이라 뜻으로 조선제일의 반촌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문각공 조광(1797~1855)은 경복궁, 창덕궁, 낙선재의 조선궁궐 건물에도 글씨를 남겼다.

무첨당 대청에 물애서옥, 좌해금서
좌해금서(左海琴書)
사랑채
행랑채 현판, 청옥루 세일헌
무첨당과 사당
무첨당과 안채
무첨당
안골동산
안골동산
안골동산
'하버드댁'이란다. 초가삼간 이 집의 아들들이 하버드대, 예일대 등을 나왔다나?

■ 우물과 향나무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이런 노랫말도 있지만, 우리의 전통 마을 우물가에는 향나무를 심는단다.
그 이유는
ㆍ위생 및 살균 효과: 조상들은 향나무 뿌리나 잎에서 나오는 특정 성분(리모넨, 알파-피넨 등)이 물을 소독해 주고 질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향나무 추출물은 항균 및 살균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소독약이 없던 시절의 지혜로운 방식이었다.
ㆍ벌레 퇴치: 향나무에서 나는 강한 향기는 날벌레들이 우물가로 접근하는 것을 막아주어 우물물을 위생적으로 관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ㆍ방향(芳香) 효과: 향나무의 좋은 향기는 우물가 주변의 공기를 맑게 하고 악취를 제거하는 데 기여했다.
ㆍ위치 표시: 길을 가던 행인들이 멀리서도 향나무를 보고 우물의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이정표 역할도 했다.
ㆍ문화적/신성한 의미: 예로부터 향나무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부정한 기운을 없애주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졌다. 생명의 원천인 우물 옆에 이러한 신성한 나무를 심어 물을 보호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여러 자료는 과거에 우물가에 '뚝향나무'를 심는 관습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우물과 향나무

5) 송첨종택(松簷宗宅)과 서백당 국가민속문화유산
경주 손씨 큰 종가로 이 마을의 입향조가 된 양민공(襄敏公) 손소(昭 1433~1484)가 조선 세조 5년 (1459)에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孫仲暾, 1463~1529)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李彦迪,1491~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인 '서백당'의 의미는 '참을 인(忍)자를 백 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의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으며, 마당의 향나무는 50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관(地官)이 '이 집터에서 세 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손소의 아들 손중돈과 외손자인 이언적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송첨종택 대문
송첨 종택 대문과 행랑채
몸채, 서백당
서백당과 송첨 현판
서백당 사당(中)과 향나무(左)
대문 행랑채에서 오른쪽으로 성주산이 보인다.

6) 양동의 향나무 | 良洞의 香
Chinese Juniper of Yangdong

경상북도 자연유산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동해안을 비롯하여 울릉도와 일본 등지에 분포하며, 상나무 또는 노송나무로도 불린다. 그 밖의 지역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인공적으로 심은 것이다. 향이 강해서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 쓰이며 정원수와 공원수로도 많이 싣는다.
양동의 향나무는 송첨 종택의 사당 앞에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초기 문관이며 양동의 경주손씨 입향조인 손소 선생이 세조 5년(1459년)에 집을 새로 짓고 그 기념으로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원줄기가 지상 90cm 높이에서 세 방향으로 가지를 낸 뒤에 그 윗부분이 꾸불꾸불 위로 자라서 다시 세 가지를 내고 있다. 수관폭이 12m에 달할 정도로 수세가 매우 왕성하여 멀리서 보면 분재처럼 꾸민 듯 보인다.

양동의 향나무와 성주산
양동의 향나무
사당
서백당 제청
송첨 종택, 종손
우물 곁에 향나무

7) 심수정(心水亭)
심수정은 양동마을의 안골에서 출구로 나오다 왼쪽 성주산 자란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로 국가민속문화재 제81호이다.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이언적의 아우 이언괄을 추모하여 1560년 경에 여강이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철종 때의 화재 이후 1917년에 원래 모습대로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양동마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정자로 꼽히는 심수정이라는 정자명은 "고요함이란 자는 마음 가운데 있는 물에서 나온다"라는 글에서 유래하며, 마음의 평안을 이루는 고요함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심수정

성주산의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양동마을에 있는 여타 고택과 구분되게 유난히 오랜 수령의 회화나무들이 집을 둘러싸듯 식재되어 있다. 농재 이언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의 정자이기 때문에 가옥의 규모는 크지 않다.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정자 앞 마당에는 향나무 두 그루가 심어져 있단다.
심수정의 누마루에 걸린 편액 함허루(涵虛樓)는 '누마루의 서남쪽 도리에는 ‘함허루(涵虛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함허(涵虛)’는 『논어』의 ‘유약무실약허범이불교(有若無實若虛犯而不校)’에서 그 뜻을 취하여 “허함이 가득차고 잠긴다.”라는 의미이다. 꼭 차 있어도 텅빈 것처럼 보인다는 이 말은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자(曾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안회(顔回)를 두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겸손한 성품을 지칭한다. 이 말은 『논어』, 태백편(泰伯篇)에 나온다.
심수정은 건너편 산자락에 있는 향단을 볼 수 있도록 반대편 위치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 ‘함허루’의 편액이 걸린 누마루에 올라 바라보면 마을 건너편에 있는 향단이 훤히 올려다 보인다.

심수정 회화나무들, 담장안의 삼정승과 밖의 임금이라나?
심수정
아름답게 조각된 계자난간으로 멋을 낸 함허루 앞의 회화나무

8) 향단(香壇) / 보물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에 있으며, 기와집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벗어난 형식으로, 주생활의 합리화를 도모한 우수한 공간구성을 보인다. 회제 이언적의 집으로 원래 99칸이었다고 전하나 6.25 한국전쟁으로 일부는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56칸이 보존되어 있다.

향단, 언덕위의 집
양동마을 체험관

9) 이향정(二香亭)고택
이집은 온양군수를 지낸 이향정(二香亭) 이범중 선생이 살던 곳으로 집 이름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조선 숙종 21년(1695)에 지었다고 하며 양동 마을 안골로 들어가는 동구 첫 어귀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크게 안채, 사랑채, 아래채, 방앗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서쪽 끝에 부엌을 두고 오른쪽에 안방, 대청, 건넌방이, 왼쪽에 광과 아랫방이 있다. 방과 대청 앞뒤로 반칸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방 배치양식은 이 지역의 일반적인 구성과 같다. 안채 부엌 뒤편으로는 방앗간채가 있다.
사랑채는 앞면 6칸·옆면 1칸 반 크기로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두었다. 구조면에서 안채와 별도로 분리되어 있는데 양식이 중부지방이나 서울의 큰 집들이 지니는 평면 배치와 같다. 특히, 사랑큰방 뒤로 부엌과 툇마루가 있는 서재를 꾸며 기능의 변화를 꾀하고 있으며 마루는 亞자형 난간을 둘러 누마루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향정고택

양동마을 전망
양동초등학교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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