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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by 문촌수기 2026. 1. 4.

성탄 대축일, 헨델의 메시아를 합창하면  올해 성가대 활동은 다 끝내고 부활절 준비까지는 좀 쉴 줄 알았다.
아니다. 착각했다. 아직 성탄시기는 계속된다.
2025년 마지막 주일 28일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이며
2026년 첫날
1월 1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1월 첫 주일 4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
둘째 주일 11일은 '주님 세례축일'까지 교회 전례력으로 성탄시기이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친구 카톡 단체방에 나 요셉과 아내 마리아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축하한다며 친구가 메시지를 올렸다. 몇몇 친구가 "생일 추카.."한다며 친절하게 응대해주었다. 축일과 생일? '허허허 그래. 나의 축일이면 영적 생일이기도 하지.' 그래서 자세한 설명보다는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우리집,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상

인천주보, 2025.12.28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ㆍㆍㆍㆍ
오늘의 말씀에서
「완전한」이 아닌 「온전한」

성가정 축일이 제정되던 1921년, 근대화 물결 속에서 모든 전통 질서가 하나둘 무너지던 때였습니다. 농경문화에서 성장한 고전적 의미의 가정도 빠르게 해체되었습니다. 축일 제정의 이면에는 아마도 가정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교회의 고민이 있었을 터입니다. IMF 사태를 떠올려 봅니다. 모두 돈으로 환치되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가정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이웃이 또 하나의 가정이 되어주던 마음의 미덕도 사라졌습니다. 생로병사를 지켜보며 서로 돌보고 견디는 것을 배웠던 가정. 이젠 모두 전문화된 공간(요양원, 장례식장)에서 상품처럼 처리됩니다. 더욱이 유산을 두고 혈육들이 벌이는 반목을 생각하면 우리가 말하는 가정이 얼마나 허약한 것 이었는지 실감합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축일이 과거로 돌아가자는 때늦은 주장을 반복 하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성가정'은 '정상적'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첫째는, 혈육으로 맺어지지 않았습니다. 혈연이 곧장 가정을 뜻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난민 상태의 가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위협을 피해 요셉은 가족과 함께 먼 여정을 떠납니다. 영락없는 난민입니 다. 이는 단순히 떠돌이였다는 처지 말고도 가정이 어떤 공간에 국한된 개념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곧 가정은 '집' 이전에 전제되는 것으로, 건물이나 혈연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결속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다시 성가정을 돌아봅니다.

가장은 무한책임을 지고 나머지는 그에게 운명을 맡깁니다. 하나의 운명으로 이들을 묶은 것은 '신뢰'였습니다. 요셉이 하느님과의 약속에 신뢰를 두었듯, 어머니와 아기도 아버지를 믿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설명하는, 제1독서의 '공경'이 유대인의 관념에서 단지 힘에 압도된 두려움이기보다 깊은 사랑과 신뢰에 가깝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 합니다. 유랑의 고단함에도 성가정을 지탱한 것은 피도, 안정된 정착지도 아닌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흔히 말하듯 '모두 같은 믿음을 고백함'이나, '무탈하고 정상적'인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지탱되는 관계이며, '완전한'이 아닌 '온전한' 가정인 셈입니다.

성가정의 여정을 쫓다 보면 가족의 불완전함이 보입니다. 안정된 정착지를 찾지 못한 아버지, 아이에게 묶여있는 어머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 그러나 이 불완전함은 '통공'을 묵상케 합니다. 사실 가정은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뛰어넘는 '통공'이라는 신비와, 연대의 힘을 가장 많이 깨닫는 곳입니다.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줘야만 하는 처지를 배우는 곳입니다. 이 세상 모든 가정의 '구차한' 속사정은 이런 의미에서 통공의 학습인 셈입니다. 통공은 비단 가정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의 다름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도 발휘되어야 할 능력입니다.
시야를 넓혀 봅니다. 피와 공간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가정의 개념은 다른 형태의 가정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허술한 '가정'의 정의로 이웃을 판단했는지 반성하게 합니다. 이러한 성찰은 이제 더 크고 넓은 가정을 알아보게 합니다. 모든 가정이 결국 조금 더 커진 자기애에 불과한 가족애를 뛰어넘어 더 큰 가정으로 뻗어가길 기도합니다.
(장동훈 빈첸시오 신부 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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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성당공부]에서 더 읽음

우리가 흔히 사그라다 파밀리아 (Sagrada Familia)라고 부르는 바르셀로나의 성 가족 성당은 '성스러운 가족에게 봉헌된 성당'이라는 뜻이지요. 여기에서 성스러운 가족이라 하면, 예수와 그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 그리고 아버지인 성 요셉을 말합니다. 예수를 일컬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하느님을 성 가족에 포함시키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세속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성 가족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은 당연히 예수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로부터 비롯된 종교이므로,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그리스도 교의 기반을 이룹니다. 당연히 성당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이미지는 예수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는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며, 거의 모든 성당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모자(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표현한 성화와 성상(1)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 보니 성당 투어 시 성모자와 관련된 이미지는 따로 관심을 갖지 않는 편입니다. 비슷한 작품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예수의 아버지인 성 요셉에게 봉헌된 성당은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고, 그를 단독으로 표현한 성화나 성상도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성 요셉이 성모 마리아에 비해 소홀한 대접을 받는 이 유는, 그와 예수 사이에 생물학적인 혈연관계가 없다고 보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서에 의하면, 마리아는 요셉과 결혼하기 전에 성령에 의해 잉태했다고 하니, 그가 예수의 친아버지는 아닌 셈입니다.
물론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의 아버지 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요셉을 예수의 양육자로 선 택한 까닭은, 그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에게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세상을 구할 메시아가 나온다.'는 믿음이 널 리 퍼져 있었으므로, 예수가 메시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윗의 후손에 게서 태어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과 예수가 함께 있는 장면은 대개 요셉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형태가 많습니다(2). 사실 성부자상은 많지 않기 때문에, 어쩌다 만나면 반 가울 정도이지요.

어린 예수가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는 장면은 무수히 많고, 양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성 요셉과 함께 있는 장면도 종종 볼 수 있는 데 비해, 성 가족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3)은 드문 편입니다. 베들레헴의 외양간에서 예수가 태어난 순간과 천사의 인도를 받으며 이집트로 도피하 는 장면을 제외한다면, 매우 드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외조부모를 성 가족에 넣을 수 있는지는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가끔 외조모인 안나와 함께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외조부모, 즉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대해서는 '성모 마리아의 일생' 중 '마리아의 탄생' 편(161쪽) 참조] 성모자와 안나가 함께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 중에는 레오 나르도 다 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가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지요.(4)

특별한 사연의 성모자상
ㅡ <여행자의 성당공부>에서

■ 성가정에서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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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2장 13-15.19-23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9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21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23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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