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청계천, 언제나 정겹다.
이번에는 특별히 조선 최초의 조각물, 조선 최초의 왕비와 연관되는 청계천 다리를 살펴본다.
청계천의 두번째 다리인 광통교는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경처*)의 눈물과 태종 이방원의 원한을 품고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향 동북면(함경도)에 첫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鄕妻)를 두었다. 이 부인은 조선건국(1392년) 전에 죽었다. 수도 개경에 스무살 정도 어린 신덕왕후 강씨(京妻)를 두었으니 이 부인이 조선의 첫째 왕비이다.)
먼저 광통교라는 다리 이름은 조선시대 한양의 행정구역이었던 광통방(廣通坊)에 위치한 '가장 크고 넓은 다리'라는 뜻의 대광통교(大廣通橋)에서 유래했다.
서울의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사거리 방향으로 나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의 청계천을 건너다니던 조선시대 기원의 다리다.
역사적인 유물을 보존하고 기리기 위해, 청계천의 물길을 오른쪽으로 몰았다.

다리 밑 그늘로 들어가며 좌우를 살피면 예스러운 문양들이 새겨진 돌들이 눈에 띤다. 이 돌들은 조선시대 최초의 왕릉인 정릉의 석물인, 병풍석과 영저·영탁 등이다.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계모이자 아버지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무덤을 파묘하여 그 석물들을 백성들의 발에 밟히는 광통교 다리축조에 사용했다.
다리 아래 음지에서 햇볕에 노출되지 않았으며 애처가인 태조가 좋은 재료의 돌을 골라 쓴 덕분인지 이보다 12년 후에 조영된 자신의 무덤(건원릉) 조각물과 비교해도 훨씬 더 보존상태가 좋고, 그 돋을새김이 선명하다.
이 왕릉 석물 조각들은 조선시대 최초의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620년 이상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들보다 1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청계천을 지날 때면 꼭 봐야 할만큼 명품 조각들이다.
들어가면서 왼쪽을 보았을때 처음보는 석물과 나중 보는 석물은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지만 문양의 모습이 위 아래로 바뀌어 있다.
석물 중 가장 큰 돌인 호석(護石)의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신장(神將:수호신)이 유교식으로 복두나 금관을 쓰고 홀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식의 보관을 쓴 채로 합장을 하고 있다. 고려의 전통인 불교 숭상 문화가 조선 최초의 왕릉 석물에 새겨진 것이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면 마름모꼴로 놓인 교각 뒤로 우측 교량 벽면에도 이와 비슷한 석물들이 보인다. 가능하다면 내려가서 가까이에서 볼 만하다. 여기에는 영저와 영탁이 돋을새김으로 뚜렷하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그 생김새가 명품임을 알아 볼 수 있다.


영탁(靈鐸)과 영저(靈杵)는 조선 시대 왕릉의 병풍석(봉분을 보호하는 둘레돌)에 새겨진 불교식 장식 문양이다. 왕릉을 영적으로 수호하는 상징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
영탁(靈鐸)은 불교 의식도구인 요령을 형상화한 방울로서, 맑은 소리를 내며 부처의 말씀을 전하고 깨달음을 주는 도구다. 영저(靈杵)는 불교 의식에 쓰이는 도구인 금강저(金剛杵)를 형상화한 것으로 악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왜 왕릉의 석물들이 청계천의 광통교에 쓰였을까? 그 사연에 원한과 눈물의 사연이 기구하다.
1408년 9월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아버지를 건원릉에다 모시고, 다음 해에 기다렸다는 듯이 계모인 신덕왕후의 초장지 정릉(현재의 덕수궁 옆, 주한영국대사관 땅)에 대해 '옛 도성 안에는 능묘가 없다'는 이유로 파묘하여 도성 밖,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천장하였으며, 초장지 정릉의 정자각과 초석으로 태평관*의 누각을 짓고 기초석으로 쓰게하고 봉분의 흔적을 없애라고 명을 내렸다.
1410년 8월 8일 큰 비가 와서 청계천에서 주민이 빠져 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흙으로 만든 광통교(廣通倫)가 비만 오면 무너지니 '정릉의 석물들로 돌다리를 만들자'는 의정부의 의견에 따라 태종은 그렇게 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광통교는 토교(土橋)에서 석교(石橋)로 바뀌었다.
태종이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에게 원한을 품고 신덕왕후의 정릉을 여러차례 이장하고 광통교의 석물로 사용한 사연은 태조 이성계가 계비 신덕왕후 소생인 열살 짜리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노골적인 분풀이로 보고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은 모두 8명으로 신의왕후 한씨(향처)의 소생이 6명, 신덕왕후 강씨(경처)의 소생이 2명이다. 한씨 소생의 형제들이 단합하여 강씨 소생의 왕자들을 참살한 '제1차 왕자의 난'*은 조선 개국의 역사를 피로 얼룩지게 만든 첫번째 사건이었다.


교각이 마름모꼴로 놓인 이유는 물흐름을 유선형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교각에 '계사경준,경진지평, 기사대준' 등의 한자가 음각되어있다.
'庚辰地平'(경진지평)은 '庚辰'년(영조 36년, 1760년)에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공사를 하였으며, 하천 바닥의 높이 기준면을 '地平'으로 표시한 것이다.






* 태평관(太平館)은 조선시대 한양(현재의 서울)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세워진 국영 영빈관이자 숙소. 조선-명나라 간의 핵심 외교 공간으로, 사신들이 머무는 동안 임금과 세자, 종친 등이 이곳을 방문해 연회를 베풀고 국사를 논의한 장소
* 제1차 왕자의 난과
의안대군 방석(1382-1398)
방석은 방번의 연년생 아우로 태조의 여덟째아들이다. 현빈 유씨와 결혼했 으나 그녀가 폐출되자 춘추관대제학 심효생의 딸과 재혼했다.
조선 개국 원년에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 등이 정안군 방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이때 왕비 한씨는 이미 죽고 없었기에 계비 강씨의 의향에 따라 태조는 무안군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배극렴, 조 준, 정도전 등 개국 공신들의 반대로 방번의 세자 책봉은 무산되었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불과 11세밖에 안 된 나이로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된 방석은 어머니 강씨의 보살핌과 정도전, 남은 등 개국 공신들의 지원에 힘입어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그의 배후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난을 일으켰고, 이 난의 성공으로 세력을 잡은 방원은 방석을 유배시키고 이어서 방번과 함께 살해했다. 이때 방석의 나이 17세였다.
후에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이었으나, 금성대군이 세조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32세의 나이에 처형되자 후사가 완전히 끊어졌다.
참조함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신의 정원 조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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